여자라는 종족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09년 9월
일기 비슷해질 것 같다. 텍스트 이외의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이 책은 예선 언니가 준 책인데(언니에게서 몇 권인가 책 선물을 받았다) 내게는 부족한 스릴러와 공포, 불안 등이 주제와 소재로 다루어지는 단편소설집이었다. 여자들이 주인공이거나 화자가 되기도 하고 3인칭 전지적 시점을 쓰기도 하는데, 주로 피해자나 가해자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순히 좀 끔찍하거나 두려운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범죄적인 선에까지 근접하므로 나로선 썩 좋아하지 않는 장르이다. 바로 이 점,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또 잘 다루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필요하다면 필요한 소설집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몇 편의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재미있어서 배운 것도 있고 신선하기도 했지만 목차에 있는 것 전부를 읽기에는 버거웠다. 그만큼 나는 이런 장르적인 문학을 좋아하지 않거니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연이어 나오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반복되는 패턴을 못 견뎌한다. 그래서 반쯤 읽다가 책을 덮었고 배수아의 책 두 권을 읽다보니 세 권의 책이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해서 배수아와 오츠를 교대로 읽은 셈이 된다.
그러면서 거의 세 달이 지나갔다. 중간에 이사를 했고 아팠고 우울과 실의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들이 한 달이 넘었다.
그리고도 권외의 이야기 또 하나. 오츠의 책 붉은 면지에 수많은 작품들이 언니의 펜으로 메모되어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써보련다.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하진 <멋진 추락>(중국 작가)-이전에 waiting(기다림)의 작가이다.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작가.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배명훈 <신의 궤도>
이케이도 준 <하늘을 나는 타이어>
조이시 캐롤 오츠-- '블랙워터, 블론드, 작가의 신념.
토머스 h <붉은 낙엽>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뒤마클럽>(스페인 작가)
예선 언니가 좋아하는 책들의 반(?) 정도는 스릴러와 미스터리, 고딕인 것 같다. 나랑 취향이 아주 정반대인 편인데 내게는 그런면에서 반쪽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잊었을 때를 대비해(벌써 거의 잊었다) 가장 좋았던 작품에 대해서는 간단히라도 언급해야겠다.
1. 하늘에 맹세코
출신과 계급이 확연히 다른 연상의 남자, 그것도 폭력적이고 교묘하면서 의심까지 많은 남자에게 유혹당한(그러나 깊게 보면 가스라이팅과 성폭력이 개재되어 있다) 어린 소녀가 그와 결혼해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다 그 굴레를 벗어나는 이야기. 그러나 의도치 않은 살인이 벌어지고, 소녀는 부유하고 권위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어쩌면 그런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살인 외에는 달리 길이 없을지 모른다. 결코 살아있는 그가 그녀를 보내줄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이 서사를 풀어가는 작가의 방법은 아주 센스있고 매력적이다.
첫 문장, 문단 - "전화벨이 울린다. 사촌 안드레아가 받는다. 맹렬한 기세로 비가 내리는 지난 4월의 어느 평일 저녁, 7시를 막 넘겼을 뿐인데 어둡기가 한밤중 같다. 안드레아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집인 양 수화기를 들면서 갓난쟁이 딸을 왼쪽 엉덩이께로 옮기는데, 그 모습이 마치 1930년대에 워커 에번스가 찍어서 널리 알려진 시골 농가의 이민자 아낙을 연상시킨다. 벨이 울린다! 그녀의 손에서 수회기를 뺏어 들고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냅다 내려놓았으면 좋았을 걸."
안드레아는 주인공의 사촌 언니쯤 된다. 나는 안드레아가 아주 중요한 인물인 줄 알았다. 이런 건 몰랐지? 하며 작가가 내게 메롱, 혀를 내밀고 있는 것 같다. 안드레아는 뒤에서도 거의 언급이 없다. 이런 시작이 매력적!!! 이런 스릴러적인 작품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만은 다시 봐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다시 볼 일은 업을 것이다.
2. 인형, 미시시피 로맨스
어린 소녀처럼, 인형처럼 화장을 하고, 의붓아빠인지 매니저(?)인지 되는 남자와 떠돌아다니며 원조교제(그러나 대부분 하룻밤)를 하는 것으로 생활을 이어간다. 소녀는 해맑을 정도로 거짓말에 능숙하며 매니저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황을 택하고 주도한다. 소녀는 찌질하고 비열한 성인 남자들을 조롱하고 끝내는 그들의 신체의 한 부위를 잘라서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삼기도 하는데... 너무 끔찍하고 잔혹하지만 비열한 남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죽이고 도륙하는 데에는 약간의 후련함이(?).
3. 허기
한 부르주아 젊은 주부의 일탈기- 믿음직스럽고 충직하며 우직한 남편을 죽일 것인가, 매혹적이지만 불순해서 위험한 정부를 죽일 것인가? 그녀는 기로에 서 있다.
'허기'는 애정에, 소통에, 매혹에 허기진 그녀 마음을 가리킨다. 제목이 좋았다.
4. 용서한다고 말해 줄래?
딸아이가 어릴 때 불륜 관계에 있던 남자를 지하실로 떠밀어 죽이고 그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지하실로 내려보낸 여자의 죽기 전 편지와 그 놀라운 사연이 주요서사인데, 그런데 반전은 , 그 불륜의 남자를 죽인 이유가, 자신이 친부를 사랑하고 모종의 관계를 친부와 맺었다는 비밀을 그 남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딸에게 죽은 남자를 확인하는 심부름을 시킨 일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만 친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엄마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로 인해 불륜남을 죽인 여자의 말로가 너무나 기막혔다. 반전에 반전. 막장드라마도 이런 막장이 없어서 오츠의 상상력과 그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놀랍다. 놀랍다.
5. 분노의 천사
사랑하는 미혼모인 여자를 위해, 그녀가 원하는 남자를 죽여주는 천사가 된 남자. 집착이라 말할 수 없는 광기의 스토커. 그는 그녀가 지목하는 남자를 죽이고 그녀의 믿음을 얻는다. 가난하고 서글픈 그녀에게 한편으로는 천사일 수도 있겠다.
6. 자비의 천사
미국 한 병원에서 오랫동안 간호일을 했던 전문 간호사인 여자가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을 약물로 안락사한다. 그러나 여자의 의도는 점점 변질돼 환자를 죽이는 일이 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만족이나 피로함을 덜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어간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정의롭고 자비로운 것이라 내심 믿고 있었다.수십 명의 환자들의 그녀의 손에서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죽어갔다. 그리고 몇 십 년 뒤까지 그녀의 이름은 자비의 천사라고 불리며 병원에서 전설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쓰다보니 총 9개의 단편 중에 6개나 썼다. 나름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소재가 만만치 않게 충격적이어서 내겐 좋은 학습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