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올해의 문제소설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21년 2월
어제 이 소설집에 대한 페이퍼를 쓰면서 마지막 두 작품을 읽지 못했다고 써놓고 나니 왠지 찜찜해서 오늘 늦은 오후에 두 작품을 마저 읽었다. 읽고나니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래도 맘이 편해졌다. 특히 전하영의 <남쪽에서>는 특히나 요즘 나태와 우울에 빠져있던 나를 향한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대로 옮겨온다.
""나는 눈을 감고 한 사람이 무언가를 쓰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40년이 넘도록, 아니 평생에 걸쳐 쓰는 삶에 대해서, 보이지 않아도 쓰이는 어떤 삶을, 어딘가에 존재하는 질서를, 그 깊고 어두운 세계를.(353쪽)"
이것은 작중 인물의 입을 빌린 작가의 독백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쓴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사람이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이 견딘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들은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다. 비록 타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삶에 머물지라도 말이다.
전하영의 인물들은 익숙한 퇴행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퇴행과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레테로토피아의 세계에서 그들은 과거를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타인의 인정과는 상관없이 이 행위는 끝내 의미를 획득한다. "보이지 않아도 쓰이는 어떤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윤리 때문이다. 이것은 평생에 걸쳐 쓰고 싶다는, 한 작가의 출사표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주목받는, 특별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 기대는 언제나 배신당하고 희망은 쉽게 휘발된다. 삶은 복잡하고 부조리한, 지리멸렬한 우연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생을 소진한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늘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보인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점차 체념에 길들여진다. 과거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복기하는 일은, 사람을 초라하고 쓸쓸하게 만든다. 어떤 소설들은 이 외로움을 동력으로 삼는다. 이것은 외로움에 초연하거나 극복한 결과가 아니라 쓸쓸할 수밖에 없는 삶에 공감하기에 가능해진다. 아픈 과거로의 '행진'은 끝났지만, 멈추지 않고 쓰는, '나'의 '아름다운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357~358쪽)작품 해설, 레트로토피아, 기록하는 자의 윤리, 이정현)
마지막 작품 최진영의 <유진>도 작품 자체가 당연히 좋았지만 해설을 읽으며 밑줄 그은 부분을 남겨두고 싶다.
"........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끼기보다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심리적 고립 상태에 놓인 바로 그 형상 말이다. 고로 이 울렁거림은 "그 시절의 나", 즉 생물학적으로는 어른이었지만 결코 '어른'이 되지 못했던 '나'에 대한 자책과 부끄러움 때문에 유발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스무 살을 전후로 한 시점의 나는 무영과 헤어진 이후에도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 채 고립된 삶을 자처하고, 이유진과 헤어진 이후에도 "완벽하게 혼자"이기를 꿈꿨다. 이는 그야말로 세계와의 교섭을 차단한, 미성숙한 어른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나로서는 죽은 유진의 삶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자신의 미성숙한 민낯을 발견하는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는 사라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게 된다."((390쪽), 작품해설, 죽음 이후의 삶, 이만영)
필요한 순간에 책은 스승이 되고 처방전이 되어준다. 물론 그것은 감기약처럼 그 감기에 걸렸을 때 한 번 복용하고 낫는 것 이상은 아닐수도 있다. 완전한 해결책도 영원한 방법론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서보다 책이 훨씬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오늘 이 작품의 해설이 특히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