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읽은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야 페이퍼를 쓴다. 이 작품은 <모자>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나서 내가 예선 언니에게 베른하르트에게 빠졌다고 하자 언니가 추천(베른하르트가 좋았다면 이 작품 또한 좋아하게 될 거라는 언니의 예측)한 책이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그는 아주 길고 복잡한 서사를 주로 쓴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언니가 말한 걸 텀을 좀 두고 있다가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독서를 생활화한 사람들은 책을 분류할 줄 알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할 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예선언니가 나를 어느 정도 파악한 것처럼 나도 나를 파악하게 되었다. 나는 명작을 다 좋아하고 동경하지만(나는 유난히 설레발을 치며 이러는 편이다) 특히나 이런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 동경한다는 것이다.
앞서 썼듯 다자이 오사무와 베른하르트,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번에 한꺼번에 내 안에 각인되었다. 나는 이런 작가들을 흥모한다. 이 작가들은 여느 작가들보다 사변적인데도 흥미롭고 개성적이며 서사가 뚜렷하지 않아도 줄줄이 고치에서 실이 나오듯 흘러넘치는 통찰과 사유의 문장으로 독자들을 경외감에 빠트린다. 내 안에 이 작가들의 문장이 하나하나 쌓여가기를 간신히 바랄뿐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얼마간의 상속을 받게 된 공무원인 '나'가 주인공이다. 그는 매일 방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할일없이 그나마 사이가 어색하지 않았던 상사의 집에 간혹 찾아다니고 학교 때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외톨이이고 출세와 세속에 물들지 못해 무척이나 고독하다. 그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자의식에 괴로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속으로는 경멸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런 사람들을 그럼에도 필요로 하고 그들과 어울려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모순 때문에 그는 이랬다저랬다 혼자서 변덕을 부리며 괴롭고 외롭고 자신이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처럼 세상에서 즐거움을 구하고 세상의 통속적이고 유치한 삶을 살아가면 될텐데 그렇게는 또 안되는 것이 바로 그라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못난이라고 생각하고 더없이 속된 인간들을 속으로는 경멸하면서도 그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까지 그들 무리에 끼이려한다. 이 모순의 욕구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친구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한다.
책은 1,2부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는 자신의 그런 모순적인 사고와 의식 때문에 괴로운 자신을 저주하고 2부에서는 실제로 그가 겪었던 더없이 수치스럽고 한스러운 이야기를 고백한다.
주인공 나는 친구를 찾아간다. 그 친구는 그가 찾아가면 맞아들이기는 하지만 썩 반기지는 않는데 친구가 없는 나는 그 친구 외엔 친구가 없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느날 친구는 다른, 학교때 친구들을 내일 만날 거라 하고 그는 한번도 친한 적이 없던 친구들의 모임에 자신도 가겠다고 한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괜한 짓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임에 가서 친구들과 어떤 만남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네 친구는 그를 반기지 않고 떠나주기를 바라는데 그는 바보같이 그들에게 어이없는 소리를 하고 그들을 화나게 하고는 그들 곁을 떠나면 안된다고 여기면서 그들이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끼워주지 않는데도 그곳을 서성거린다. 한편으로는 한심하고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이상한 자존심 대결을 펼치지만 친구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몇 시간을 그렇게 진을 빼다가 결국은 그들에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한다. 친구들은 어이없어하면서 자기네들끼리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데 그는 또 그들을 뒤따라간다. 이런 알 수 없고 한심한 짓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것을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을 수 없으니 얼마나 기막힌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지, 그는 알면서 그 수모를 당하기를 자초한다. 이상한 자존심, 이상한 굴욕에 대한 쾌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친구들을 따라간 곳에서 그는(그곳은 일종의 룸싸롱 같은 데였나보다)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창녀라기엔 아직 어리고 순수한 일면을 지닌 여자인데, 그는 그녀에게 걱정과 위로가 담긴 길고긴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그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녀가 다시는 그를 찾아올 수 없게 만드는 말들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그는 또 멍청하게 자신의 마음과는 반댓말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속으로는 얼핏 깨닫고 있다. 그녀에게 보여주어서는 안될 추레한 생활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읽으면서 꼭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그 인물들이 꼭 나인 것만 같다.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병든 인간, 너무나 외롭고 괴로워서 쓸데없는 짓을 일삼는 이들을 이다지도 잘 묘사하는지, 한 모순투성이의 인간을 이토록 잘 묘파하는지.....
요즘들어 페이퍼 쓰는 일이 자꾸 숙제가 된다. 이것도 일종의 루틴이다. 앞으로는 책을 읽으면 제까닥 써버릇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