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엔리케스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왜 이 작가에 대한 서두로 독후감을 시작하는지, 왜 이 작가의 작품에 주목해야하는지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 누구나 머리를 내두르며 이해할 것이다. 바로 아르헨티나의 현실, 나아가 중남미 국가들의 열악한 환경과 그로 인한 인권의 부재, 인간이, 특히나 아이들이나 여자들이 폭력 앞에 희생되고 제물이 된다는 점에서 끔찍하게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작가는 이런 현실적인 상황을 비켜가지 않고 그것을 작품으로 오롯이 옮겨 놓은 것이다. 참으로 용기백배하고 대담한 예술가이다. 그 용기와 의지와 치열함이 존경스럽고 부럽다.
이 작품집에는 열세 편이나 되는 단편이 들어있다. 마지막 장이 344 쪽이고 저자후기와 작품해설까지 합치면 380쪽 정도 된다. 열세 편의 작품들은 비슷한 길이의 단편들이 아니고 아주 짧은, 단일한 사건이나 단상에 가까운 것들도 있고 보통의 길이를 갖춘 소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유로운 단편의 길이(량)는 문학적 완결을 이루어내기가 더 효용적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놀라운 감동이나 충격을 주기 안성맞춤이다. 우리 문단도 단편소설의 분량을 너무 틀에 박힌 관습으로 지키지 않았으면 싶다. 소설이란 감동과 문학성이 첫째 조건이니까.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더러운 아이' '마약에 취한 세월' '아델라의 집' '거미줄' '검은 물속'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등... 그러고보니 거의 대부분이 너무나 인상 깊었고 놀라웠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중남미의 부정적인 현실을 보고 싶고 체험하고 싶다면 이 작품의 일독을 권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다 읽고 느낀 점은 너무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빈층과 그들의 삶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정말 인간들은 끔찍하게 기괴하고 추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증하게 증명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잊을 수 없는 작품집이지만 독후의 감은 생략해야겠다. 사실 읽은지 한 달이 훨씬 넘어가는데 이제야 이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명을 하자면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도 오래 내 뇌에 남아있을 게 분명하므로 독후감을 쓰지 않아도 될, 각인된 작품들이니까 생략해도 되겠다는 이야기이다. 뭐가 그리 바쁜지, 하긴 이 이후에도 구병모(읽는 중)와 왕웨이롄을 읽었고 거지같은 작품을 쓰느라 지지부진하면서 한숨만 쉬어진 두어 달의 시간이었다. 나의 무능함에 지치고 지지부진한 삶에 지치고 있다. 그런데도 죽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으니 아주 오래 살 팔자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