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필사를 하고 싶은 소설들이 꽤 많다. 시간만 된다면 전경린이나 이승우, 카프카 등등... 이런 작가들의 책을 다시 읽고 필사마저 하고 싶지만, 그 정도의 시간은 없다. 평생,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상황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자유는 내 것이지만 시간은 내 것이 아니다. 시간은 너무 적고, 그 적은 시간마저 더 큰 시간이 철컥철컥 휩쓸어 데려가기 때문에... 그러니 더 확장해보면 자유조차 자유롭게 내 것이 아니다. 자유 또한 시간 안에 갇혀 버리고 마니까. 시간은 가장 냉정하고 정확한 정의이다. 이 정의 앞에서는 어떤 전략도 술수도 통하지 않는다. 가장 단순한 성실과 겸손만이 오히려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유년의 뜰'은 제목은 잊히지 않는데 내용이 생각 나지 않아 다시 읽었다. 좋은 문장 몇 개만 옮겨 적는다.
그리고 더 멀리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초등학교의 창을, 점점이 붉은 빛이 묻어나는 새털구름들을 바라보며 이유가 분명치 않은 조바심으로 어머니와 오빠 사이의, 은밀히 조성되어가는 팽팽한 공기를 지켜보았다.
벽에 버티어놓은 거울에, 등지고 앉은 오빠의 몸이 고집스럽게 담겨 있었다.
대신 거친 손짓으로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 낡고 눅눅해진 종이가 힘들게 찢겨지는 소리가 났다. 오빠의, 긴장으로 경직된 등이 제풀에 움찔했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낯설게 만나지는 자신에게 경원과 면구스러움을 느껴 옆으로 슬쩍 비켜서거나 남의 얼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거울은 기울여놓기에 따라 우리의 모습을 작게도 크게도 길게도 짧게도 자유자재로 바꾸어 비추었다.
....언니의 몸쯤이야 납작 엎드리지 않고도 쉽게 숨길 수 있었건만 언니는, 개울의 다리 위로 저무는 햇빛을 하얗게 튕겨내며 자전거가 달려올 즈음이면, 지레 땅바닥에 엎드렸다.
할머니는 과장된 노기로 목청을 높였다. 할머니의 어머니에 대한 말투에는 언제나 면목없어하는 듯한 아첨기가 있었고, 어머니 역시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우물은 깊었다. 둥그렇게 내려앉은 어두운 하늘은 두레박줄을 한없이 한없이 빨아들이고 방심하고 있던 어느 순간 마침내 철버덕 수천 조각으로 깨어져 흐트러졌다.
부네의 죽음은 소나무 속살의 희디흰 향기로 남아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집의 새 주인은 삿자리를 걷어내고 방바닥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나는 사내의 힘찬 삽질에 의해 점차 깊어지는 방 가운데의 구덩이를 보며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서러움으로 눈물이 돌았다. 새 주인의 삽질에 의해 뜰의 어느 구석에서인가 재 묻은 닭털이 끌려나오고 부서진 거울 조각들이 흙과 뒤섞일 것이다.
햇빛이 교장 선생님의 안경을 가로지르고 그 뒤 흑판에 아아아아아아 떨며 금을 긋고 있었다.
어두운 똥통 속으로 어디선가 한 줄기 햇빛이 스며들고 눈물이 어려 어룽어룽 퍼져 보이는 눈길에 부옇게 끓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무엇인가 빛 속에서 소리치며 일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