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이상문학상작품집 대상 중 11~41쪽


권여선 <사랑을 믿다>


 오래전 읽었을 때와 느낌이 조금 달랐다. 당시의 나는 '사랑을 믿다'라는 제목에 끌려들어, 그래도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라는 명제에 골몰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제목에 굳이 끌려갈 필요는 없다. 사랑을 믿는다해도, 믿지 않는다해도 어쩌다 인생에서 몇 번 만나기 힘든 사랑에 빠지는 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러니 문제는 적극적으로 좋아서이든, 어쩔 수 없이 헤어날 수 없어 수렁에 빠지듯 사랑에 젖어들든, 시작지점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건 사랑이 영원하다는 뜻도, 사랑이 한 사람을 완전한 이상세계에 잠시라도 들여놓는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완벽하지 못한 사랑, 상처와 회한으로 남는사랑이라해도 분명히 존재했던 만큼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의미. 그리고 이 사랑은 서서히 퇴색하면서 그러나 쉽게 소멸되지 않고 삶의 태도가 달라지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흘려보낸다.

 그것은 사랑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믿지 못할 존재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을 담아낼 사람들의 현실적인 조건과 인간적인 어떤 결여 등으로 인해 불완전성을 지니게 되고, 그런 의미를 깨달은 인간은 남은 생에서 또다른 의미로 성장하고 변화되면서 쓸쓸함과 삶의 허무 또한 배우게 되리라는 것. 

 

 

 한 남자가 술집에서 오랜 지인이었던 여자를 추억한다. 그 여자와 그는 삼년 전, 그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남자는 실연을 했고 그 얘기를 건네는데 여자는 자신도 삼년 전에 누군가로부터 실연을 했다고 말한다. 남자는 헤어질 때야 깨닫게 된다. 그녀가 실연한 상대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 소설의 가장 재미있고 출중한 묘사는 바로 그녀가 우연찮게 자신의 실연을 치유하게 된(치유라기보다 한 단계를 뛰어넘어 어른이 되고 쓸쓸한 삶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을 남자에게 이야기해주는 부분이다. 

 그녀는 엄마의 심부름으로(그러나 본인의 필요도 더해진 시점에서) 큰고모댁을 찾아가는데, 우연히도 철학관으로 잘못 알고 들어온 여자들과 큰고모댁 거실에서 한참 동안 같이 앉아있게 된다. 칠순은 족히 넘은 희한한 질병을 가진 노파와 손주를 유괴당한 초로의 중년여자와 남편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그들의 얘기를 듣게 된다. 

 그러다 어느만치 시간이 흐른 뒤, 큰고모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철학관은 옥탑방으로 올라가야한다고 알려준다. 여자는 얼떨결에 엄마가 준 선물 보따리를 그대로 놔두고 건물을 나온다. 세 명의 여자들은 위층계단으로 올라가고, 그녀는 계단을 내려온다.

 

 이 우스꽝스러운 우연한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의 실연의 감정이 달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온 것뿐인데, 삼층 큰고모님 댁에 무거운 잼 단지만이 아니라 그녀를 그녀이게 만들었던 본성의 작은 칩마저 함께 두고 온 듯했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나중에 이해하게 된 남자는 이제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것들과 어떤 인연을 느낀다. 삼층 건물을 보면, 그녀의 큰고모가 뜨거운 물을 마시고 이내 죽게 된 것을 떠올리며 무슨 실수가 있게되면 '찬물을 먹었어야 했는데", 라는 식으로...

 3년 전에 남자는 실연한 이야기를 했고, 여자는 그보다 3년 전에 혼자(아무도 모르게) 실연해서 그걸 헤쳐나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고, 지금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며 혼자 술을 마신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맞다. 보잘것없어도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성찰을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를 바꾼다. 그리고 반대로 휘황찬란했던 사랑도 우리를 바꾼다. 휘황찬란한만큼 더 비참할 수도 있다. 또, 너무나 내밀해 영원히 발설해서는 안되는 사랑도 우리를 바꾼다. 그리고 사람은 늙고 쓸쓸해지고 현명해진다. 그래서 전혀 다른 뜻으로도 사랑은 믿을 만한 일이다. 




같은 책 45~76쪽


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다시 읽어도 정말 재미있다. 이거야말로 아슴푸레한 첫사랑 이야기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겨우 한 살 위였던 선배와 얽힌 사랑이었는지 아닌지, 하지만 분명 아직도 그가 궁금하고 그 시절 그가 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다시 짚어보는 여자.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내달리는 심야 택시의 묵시록적인 관통 속에서 휙 지나가듯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완성된 순간 비스듬히 금이 가버렸다."


 


** 두 단편을 읽으면서 작가(화자)의 마음 겹겹이 쌓여있던 꺼풀이 천천히 하나씩 드러나는 게 읽는 속도를 늦추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먼 심연 속을 헤치며 예전의 소중한, 잃어버렸던 귀중품을 찾는듯한 느낌이 좋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과 그 속에 가득 낀 먼지를 걷어내고 그 근원을 건져올려야 작가라 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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