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엔 단편을 좀 자세히 읽으려고 한다. 아무래도 여자작가들부터 시작할까 싶다. 내가 여자니까 그렇고 아무래도 여자들의 심성과 그 속내가 더 잘 공감되기도 할 것 같고, 어떻게 그걸 형상화시키고 펼쳐보일지 기대가 되기도 해서다. 오랫동안(몇 년 간) 한국문학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자고 하면 또 끝이 없게 책이 쌓이겠지만 나는 내가 못할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다. 애초에 내가 읽을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미련을 두지 않으련다. 그러지 않으면 이작가 저작가에게 마음이 부대끼고 스스로 힘들게 되고 말 테니까.... 그래서 나처럼 좁은 사람도 드물겠지만, 나는 내 생긴대로 살아야 할 팔자라는 걸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다. 억지로 황새가 되려다간 뱁새도 되지 못하고 산통이 다 깨지고 만다. 뱁새에겐 뱁새의 길이 있다. 뱁새가 되기로 작정하면 마음도 편하고 몸도 견딜만 하다.

 그렇게 뱁새걸음으로 상반기에 대충 몇 여자작가를 탐구하고 나서(주로 단편으로) 하반기엔 남자작가들을 물색해야겠다. 근데 남자작가들은 더 모르겠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가도 없다. 문학을 기웃거린다는 사람치고 너무나 무지한 편이다. 

 

 그러고보니 올 한해의 계획이 이것이다 싶다. 한국작가들의 단편의 세계로.... 그렇다고 여기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자유로운, 불성실한 나의 '마이 웨이'...


 

 

그럼 그 첫 작가이신 권여선의 세 단편소설부터,


<약콩이 끓는 동안>

2007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중 147p~179P


1.윤서영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 문장: 여우들은 영험하게도 죽을 때를 찾아든다고, 윤서영은 그렇게 들었다고 여긴다. 서영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잔디밭에 누워있다(사고였다). 


 서영은 박 조교의 부탁으로(일견 호의와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도) 김교수의 집으로 다니게 된다. 김교수는 휠체어에 의지해 학생들의 논문을 봐주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서영이 그 일을 돕게 된 것. 서영은 타인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폐쇄적이고 두려움 많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그녀의 과거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는 가정부 여자가 "내가 저분을 입으로 빨아서 그려" 라고 했을 때 저분을 김교수로 생각했고 가정부가 김교수의 신체 중 특정부위를 입으로 빠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나 가정부의 저분은 젓가락을 말하는 것이고 김교수는 그만큼 결벽한 성격임을 말하는 것인데 전혀 다른 의미를 부과한다. 김교수가 자기중심적이고 교활하며 치졸한 만큼 그녀 또한 포용력 없고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면에서 상통하고 있다. 

 

2. 김교수의 시점으로 이동: 그는 퇴임을 일 년여 앞두고 사고를 당해 반신불구가 되었다. 일상은 이제 자신의 뜻이 아닌, 대학의 뜻, 가정부의 뜻, 아들 둘, 조교 윤서영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는 이들 때문에 평온한 일상을 누릴 수 없다. 그는 그들 모두가 못마땅하고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받을 마음도, 소통할 마음도 없다. 


3. 서영의 시점: 김교수는 밑줄 친 부분을 문제삼아 서영을 인격적으로 모욕한다. 

 

 또 문단을 한참 띄어내려와 모욕을 당하고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서영을 붙잡은 둘째아들 상욱은(취해있다) 제 형에게서 들은 형의 친구의 수술얘기(불알 두쪽을 떼어낸)를 한다. 서영은 귀를 막고 짙은 나무그림자를 벗어나 환한 가로등 불빛쪽으로 한 발 내디디다 사고를 당해 날아오른다. 그렇게 그녀는 잔디밭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번에도 세상의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거나 늦게 알아들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았다."


4. 상욱의 시점: 아버지를 바라보는 상욱의 관점--보보크를 떠올린다. 형 상섭과의 툭하면 벌어지는 싸움, 사고가 난 서영 대신에 다른 남학생이 김교수를 찾아온다. 그 남학생은 김교수에게 한없이 약하게 자신을 낮추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쓴다. 서영이 당한 사고는 상욱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5. 김교수의 시점: 서영이 오지 않자 두 아들은 집을 나간다. 가정부 순천댁은 점점 김교수에게 어떤 불쾌한 정념을 일으킨다. 그는 "왜 인간들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걸까?"라고 짜증을 낸다. 

 

 문단을 한참 띄어내려 순천댁의 시점으로 이동: 약콩을 삶으며 순천댁은 서영을 자꾸 생각한다. 왜 자신은 서영에게 "밥 먹고 가라고 한 번 붙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영험시런 여우는 죽을 때가 들면 죽을 데를 딱 찾아든다등마. 그래 그랬으까, 으째 그랬으까?"


 


******



 주인공이 윤서영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시점은 계속 변하고 이야기는 자기편에서 자기식으로 진행된다. 철저한 단절이 연이어 하나씩의 장을 만들어 나간다.

 아직 젊은 서영의 사고(어쩌면 그녀는 반신불구가 될 수도 있다)는 어떤 인생의 공평하지 못하면서도 공평함과는 비교되지 않는 숙명적인 운명(또는 비극적인 인생사) 같은 걸 보여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친척집을 전전하며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과 제대로 소통하는 법을 모르고 어울리는 법을 모른다. 남들의 말을 오해하고 제대로 들을 줄 모른다. 김교수에게 속된 처신을 해야하지만 그녀는 뻣뻣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어 김교수의 치졸한 분노를 받게 된다. 

 김교수는 혼자 있을 땐 지팡이를 내던지고 울음을 터뜨리지만(그는 사실 외롭고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 막상 누가 곁으로 다가오면 화를 내고 까칠하게 군다.

 김교수의 두 아들은 진실한 대화를 할 줄 모르고 자기 말만 한다. 형제의 대화는 언제나 싸움으로 끝난다.

 가정부 순천댁은 열심히 콩을 삶아 김교수의 병증을 약화시키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서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에게 친절하지 못했던 점을 뒤늦게 자꾸 되새기고 있다. 


 총체적인 소통부재인 세계, 또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김교수라는 한 사람과 그의 공간인 아파트에서 스치듯 만났다 제각각 뿔뿔히 흩어진다. 서영은 중상을 입고 김교수처럼 평생 못 일어날 수도 있다. 두 아들은 어떤 누구와도 진지한 관계를 할 수 없고, 하릴없이 부랑아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순천댁은 이 집안 식구들 누구와도 속있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서영이 후에 이 집에 드나드는 남학생만은 조금 다르다. 그는 김교수에게 납작 엎드릴 줄 알고(일견 처세에 능한 것 같지만, 매사에 존대를 붙이는 걸 보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스스럼없이 남을 대한다. 그러니까 순천댁이 그에게는 밥을 먹고 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순천댁의 사투리가 작품을 살아있게, 돋보이게 만든다. 


 *보보크에 대한 상욱의 관점, 서영에 대한 순천댁의 회한과 의구, 서영에게 닥친 가공할 불행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여우는 죽을 데를 알고 찾아든다는 말, 과연 서영에게 합당한, 맥락있는 격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을 데'를 '즉을 때'라고 들었다는 서영의 잔디밭에 누워서의 기억은 숙명에 관해 해도 될만한 회한일까. 

 이 부분은 다시 읽어야겠다. 오늘 밤에...


저녁 준비해야겠기에 두 개의 단편은 이따 밤이나 내일 낮에 쓰기로 하고 이만...  

  

p.s

보보크가 무언지 방금 전 찾아냈다. 기가 막히게도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 중의 하나란다. 이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좀비 소설이란다. 참으로 재미있다. 하필 도스토예프스키.... 지금은 1월 22일 12:36 , 시간 너무 빠르다. 벌써 새해 한 달이 다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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