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있는 우리 신화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9월


부제: 우리 신들의 귀환을 위한 이야기 열두 마당



 우리 신화를 다룬 책을 일부러 사서 읽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 고유의 전승되는 설화들이 많다는 것은 아는 바이지만  그간 별 관심이 없었고 특별히 필요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제 이런 분야의 책도, 또 다른 분야의 책도 독서 대상이 되어야 한다. 힘들 필요 없이 천천히 읽기로 하자. 그냥 되는대로 하나씩 읽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그렇게 허랑허랑, 또는 꾸준히(그래도 꾸준히에 방점을 찍는다. 콱)


 열두 마당에는 장(마당)마다 소제목이 붙는데 그 첫째 장은 '세상이 처음 열리다'로 시작한다. 어디서나 창세신화는 비슷한 것 같다. '혼돈에서 개벽으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우주의, 아니 더 넓게는 은하계를 넘어 대우주의 탄생까지 알고 싶지만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은 게 세상이다. 그런데 우주는 너무 넓어서, 인간이 너무 작아서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하겠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이 작은, 같은 사람끼리의 마음 하나 알 수 없는 걸 보면, 인간은(혹시 나만?)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많이 안다해도 하나도 모른다해도 결국 진짜 중요한 건 대부분 모른다.



 가장 서사거리가 충만한 이야기만 추려보면 아무래도 유명한 '당금애기'와 '바리데기'를 빼놓을 수 없지만 이번에 새로이 알게된, 특별히 주목하게 된 신화의 여주인공은 내게 '자청비'와 '오늘이'였다. 자청비는 제주에서 전해지는 신화로 농경의 여신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요즘 내놓아도 이만한 페미니스트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주체적이고 진보적인 성격과 행로를 보인다. 그러나 진짜 페미니스트라면 자청비의 사랑은 어리석다 할지도 모르겠다. 사랑 때문에 시작된 자청비의 행로가 현시대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못마땅할테니 말이다(요즘의 페미니즘은 솔직히 조금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논리적이다. 외로움이나 사랑 같은 건 여자의 인권에 있어 아주 부수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이러다 누구에게 욕먹는 거 아닐까...). 

 

 어찌됐든 너무나 매력적인 자청비 얘기를 해보면, 그녀는 자신이 연모하는 하늘나라의 '문도령'과 자신을 사모하는 집안의 노비인 '정수남' 사이에서 계속 피곤하다. 문도령은 자청비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위해 맨발 벗고 뛸 생각이 없다. 흐리멍덩하고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다. 거기에 워낙 출신이 고귀해서인지 스스로 뭘 하려는 의지가 박약하다. 한마디로 샌님에, 귀족적인 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자청비는 문도령을 리드해야하는 신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너무나 총명하고 활달하다. 그녀의 지혜로운 처신은 사랑을 이루게 만든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완전한 사랑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이란 양쪽이 그것에 몰입하지 않는 한, 불완전한 것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녀는 결론적으로 사랑에 머물지 않고 농경의 신이 된다. 신화의 정확한 탄생시기를 모르니 자세한 건  따질 수 없겠지만 옛 시대에 이런 여성의 출현은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아무래도 제주도라는 지역의 성격 때문에 가능했을 신화라고도 한다. 

 그런데 정수남이 한편에 있다. 그는 자청비와 모종의 운명으로 얽힌 채 태어났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피치 못할 인연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는 자청비를 연모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기는 고사하고 강제로 사랑을 이루려다 자청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그러나 자청비는 마지막에 저승의 서천꽃밭에서 가져온 환생꽃으로 그를 살려준다. 그들의 모질고 거친 인연은 사랑이라기보다 어떤 동지적인 인연으로 승화된다. 문도령은 상세경으로, 자청비는 중세경으로, 정수남은 하세경으로, 농경신이 되어 서로를 아우른다.

 저자는 자청비가 실질적인 농경신이고 문도령은 지식전달차원의 신이며(농업에서의 과학적인 측면) 정수남은 실제적인 노동을 책임지는 신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정수남과의 운명적인 사랑이 의미있다고 한마디 덧붙여 놓았다. 

 자청비 신화는 만화나 로맨스 소설로 재탄생된 것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복잡하고 애틋한 사랑의 소재로써는 최고가 아닐까... 


 그리고 '오늘이'도 잊을 수 없는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오늘이' 또한  현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리메이크되는데, 순수하고 아름다운 서사가 어느 동화보다 소설보다 특별하게 아름답다. 

 "아득한 옛날, 적막한 들에 여자아이 하나가 나타났다."로 시작하는 신화. 아이는 하늘에서 날아온 학의 날개 밑에서 자고 학이 가져온 음식으로 산다. 그러다 사람들을 따라와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는데, 아이의 이름이 이때 '오늘이'로 지어진다. 

 오늘이는 자라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찾아 '원천강'(저승에 있다는 강)으로 여정을 나선다. 그 여정 중에 밤낮 글만 읽는 '장상이'를 만나고, 맨 윗 가지에만 꽃이 피고 다른 가지에는 꽃이 피지 않는 연꽃을 만나고, 여의주를 셋이나 물고도 용이 되지 못한 채 모래사장에서 뒹굴고 있는 뱀을 만나고, 하늘로부터 죄를 받아 매일 글을 읽게 된 '매일이'를 만나고, 우물물을 다 퍼야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선녀들을 도와주고, 그리고 이 선녀들의 도움으로 부모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오늘이는 부모를 만나고 그들을 떠나오는데, 오늘이가 말한다. 자신은 부모를 만났으니 소원을 이루었다고....  

 돌아오는 중에 오늘이는 매일이를 찾아가 같이 떠나온다. 바닷가에 이르러 뱀을 만나자 오늘이가 해결책을 알려준다. 여의주를 세 개나 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나만 물으면 용이 될 수 있다고... 

큭, 웃음이 속으로 터졌다. 아고, 겨우 그거였구나. 그니까 왜 여의주를, 하나면 될 것을 세 개나 물고서 씨름을 했냐구요? 어이없지만 그런 사람들도 꽤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쯤은 얼토당토않는 짓을 하면서 그걸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여의주는 하나만 물어도 족하답니다. 

 다음은 연꽃, 맨 윗가지에 핀 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주면 다른 가지에도 꽃이 핀다... 이 연꽃의 사연도 붙이자면 붙일 사연이 얼마나 많을까.

 오늘이는 매일이와 장상이를 만나게 해주고 둘의 행복을 빌어주며 자신이 살던 마을로 들어간다. 오늘이에게 부모님을 만나라고 길 떠나보냈던 백씨부인, 그녀는 어느새 어른이 된 오늘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 뒤, 오늘이는 옥황상제의 부름으로 선녀가 되어 원천강을 돌보며 사계절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단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순수해서 '빨강머리 앤'을 제치고 내 소녀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 같다. 


 이 밖에 신이 된 이들, 또는 태생부터 신이었던 주인공들 이름을 나열해보면,

 대별왕과 소별왕, 삼승할망과 저승할망, 당금애기, 명신손님, 별상신, 저승사자, 바리데기, 서천꽃밭 한락궁이, 저승의 용사 강림도령, 삼태성 삼형제, 궤네깃또, 양이목사, 감은장애기, 황유양씨 막막부인, 궁상이와 그 아내, 성조씨 안심국이, 한의 화신 광청아기, 거북이와 남생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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