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가즈오 이시구로, 이 이름은 이제 나의 시기와 동경의 대상이 될 작가의 이미지로 남을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불필요한 문장 하나 없이 완결미를 갖출 수 있을까. 어찌하여 소리치지 않고 조곤조곤 설명하는 투의 문체로 독자를 완전히 몰입하여 숨죽이고 책장을 넘기다 한숨을 토해내게 만들까. 작가가 되기 위해 전생부터 준비하고 태어난 사람같다.

 <남아있는 나날>로 이시구로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삼백 페이지 정도로써 읽기에 부담 없는 길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게 잘  읽히는 편이다. 그렇다고 술술 읽힐 정도의 속도감이 나지는 않는다. 아마 이시구로는 글을 쓸 때도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차분히 앉아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로 잰 듯 작업하는 작가일 것 같다. 글이 언제나 반듯하고 깔끔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비슷한 문장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 작품마다 타작이 없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일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은 일인칭 시점의 회고적 고백기이며 일종의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달링턴 가의 집사였던 나,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저택을 팔은 후에 그대로 인수인계되듯 새 미국인 주인인 패러데이의 집사로서의 생활을 앞두고 있다. 새로 주인이 된 패러데이는 고용직원들을 넷으로 줄이고 달링턴 시대와는 다른 소박하고 간소한 저택생활을 할 작정이다. 그러나 넓은 저택에서 갑자기 줄어든 인원으로 최대한의 품위를 유지하며 새 주인을 모시자니 점점 난점이 드러난다.

 이런 시점에서 오래전 달링턴 시절에 총무직을 수행했던 미스 켄턴에게서 온 편지가 스티븐스에게 어떤 희망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켄턴은 20년전(1936년) 달링턴 가를 떠나 결혼했으며 그 동안 몇 번인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최근 보내온 편지에서 그녀는 왠지 결혼생활이 불행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며 지나간 달링턴 시절 스티븐스와 함께 일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투를 담고 있다. 스티븐스는 어쩌면 그녀의 결혼생활이 파탄이 났을지도 모르며 그러면 그녀가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와 총무직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거기에 주인 패러데이는 미국에 5주간 갔다올 테니 그동안 여행을 다녀오라며 포드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스티븐스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는데, 그는 켄턴을 찾아가 다시 저택의 총무직을 맡아달라고 청해볼 생각이다.

 이 여행은 오직 집사로서 대저택 안에서 주인을 모시고 저택을 관리하며 수하의 직원들만을 챙기던 그에게 두렵고도 생기있는 일종의 모험이 된다. 여행하면서 그는 날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과 생각들을 기록하는데(나레이션) 이 복합적인 여행기가 바로 이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는 포드를 운전하며 점점 켄턴을 만날 도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면서 그녀와 이십년 전 함께 일할 때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는데, 그것은 결국 독자들에게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러나 문제는 나, 스티븐스는 케턴과의 관계가 사랑이었다는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그녀를 함께 일하는 동지 이상으로 보지 않았으며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 속 자신의 감정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시구로는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스티븐스를 통해 독자들을 점점 안타까움과 답답함으로 몰아간다. 켄턴은 얼마나 여러번 스티븐스에게 자신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알렸던가. 묵묵부답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오직 집사로만 처신하는 그에게 그녀는 끝내 이렇게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스티븐스 씨, 최소한 오늘밤 제 지인과 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정도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청혼을 수락하고 그 남자를 따라 달링턴 가를 떠나고 만다. 그녀가 그렇게도 스티븐스가 자신에게 진심을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 어깃장을 놓았어도 그는 그녀를 스르르 보내버린 꼴이었다.

 또 그에겐 켄턴과의 관계만이 아닌 주인나리인 달링턴 경과의 관계가 있었다. 달링턴 경은 순수하고 점잖은, 품위있는 신사였다. 그는 주인을 믿었고 주인이 유럽의 평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달링턴 저택이 수많은 인사들의 모임장소가 될 때마다 자부심과 극도의 조심성과 성실성으로 그 모임이 완전한 목적을 이루기를 소망하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여행하면서 평범한 시민들을 만나본 스티븐스는 너무나 당혹스러운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영국의 시민들은 오래 전 행해진 달링턴 경의 이적행위을 비난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양심에도 제대로 된 처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믿고 그저 충성했던 달링턴 경은 히틀러의 선전선동을 위해 이용되고 거기에 놀아난 반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수치를 느끼고 자괴감에 곤혹스럽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옛 주인 달링턴 경을 옹호하고 비난할 마음을 갖지 못한다. 자신 또한 집사로서의 생을 최대한 성심껏 수행했을 뿐, 주인의 비난받을 행적은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한다.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성실했고 사적인 존재로서보다 공적인 존재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자신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독자가 보기에 안타깝지만 한심스러운 인간에 속한다. 그에게 진실이 완전히 봉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의 대자인 카디널 경은 어느 밤, 비밀리에 모임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를 불러 진실을 모두 말해주었었다. 카디널 경은 대부인 달링턴 경의 어리석은 모임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 당신 주인 달링턴 경은 지금 히틀러의 수하들에게 이용당하고 속고 있다, 당신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가. 그걸 주인에게 말해줘야한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여러 번 카디널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저는 나리의 훌륭한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스티븐스는 로즈호텔 휴게실에서 켄턴과 재회한다. 그녀는 사실 남편과의 사소한 불화로 집을 떠났던 짧은 시기에 그 편지를 부쳤으며 지금 자신은 집으로 돌아갔으며 결혼한 딸이 곧 아기를 낳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제 자신은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남아있는 나날', 그 날이 이제 스티븐스에게 얼마나 무력하고 광채 없는 시간이 될까. 그래서 내게는 이 제목이 합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스티븐스에게 남아있는 나날은 이제 스러지는 삶 그 자체일 뿐이라고.....

 스티븐스는 켄턴과 작별하고 홀로 부둣가에 앉아 달링턴 저택에 돌아가면 패러데이 새 주인이 좋아하고 즐기는 농담을 배우고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고 켄턴에게 마지막 고백조차도 안했으니(못했겠지만) 그의 남은 삶이 어떻게 광휘를 얻을 수 있을까. 이제는 중년에 이른 켄턴의 눈물어린 마지막 얼굴, 작별을 하고 버스에 탄 그녀의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스티븐스처럼 살고 있다고 여겨진다. 경험이 부족했던 시절, 사고가 짧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운용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몰랐던 시절, 사랑을, 진실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뒷걸음질쳐 도망나온 시절들, 앞가림에 어두워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도 수치인지 몰랐던 그 시절, 오랜 후에서야 그것을 간신히 깨우치고 회한에 젖는 사람들....

 나의 지난 날 또한 스티븐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를 떠나보내고 스스로 떠나왔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기 위해 어리석은 만남을 갖고 어리석은 행동들을 했다.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수치와 자괴와 슬픔이 간혹 떠오른다. 진실 앞에서 도망치고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대충 안일을 택했던 수많은 날들.

 '남아있는 날들'은 남아있는 날이 많지 않음을, 내가 남은 날들을 주도적으로 살아야 함을 성찰해준다.

 

 

***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인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에서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악을 돕고 악에 이용당하는 범인들의 삶, 그 소름끼치는 관성의 폐해에 대해 말한다.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다면, 아히히만은 좋은 아버지, 자상한 남편, 성실한 직업인이었다.

계급과 편견과 차별에 길들여져 있었던 근대인의 조건은 고려해야겠지만, 결국 인간은 자신의 더듬이로 길을 가고 그 여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작품해설 306쪽, 그대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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