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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 - 삶을 회복하는 힘,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
목수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목수정 작가의 [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를 읽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가 1일 생활권이 되었고 언제 어디서든 정보를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산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닥친 일이 언제든 제일 우선시되며, 지금 나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항상 따라붙는 적절한 핑계가 되는 말은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언제 다 신경쓰고 사느냐’이다. 사실 그렇다. 정말로 먹고 살기가 바쁜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내고 그런 정보에 관심도 여유도 없는 이들에게 전해주어야만 한다. 인터넷의 발달은 전세계의 실상을 다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나라 언론이 전해주는 내용을 통해서 걸러듣게 된다. 우리나라 언론은 그 나라 언론이 게재한 내용을 그대로 담거나 때로는 우리 입맛에 맛게 변형하기도 한다. 다른 사정 뿐만 아니라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상황 조차도 해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팩트만을 전달하겠다는 뉴스 보도도 한정된 시간안에 보도할 내용을 전달해야 하기에 때로는 정말로 대중들이 알아야할 내용들이 쏙 빠진 채 엉뚱한 내용이 보도되기도 한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너무 많은 정보가 범람하다 보니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가장 신뢰를 심어주어야 할 국가기관과 국제기구들마저 자본주의의 논리에 휩쓸려 상식적이지 않은 행보를 걷는 것이 드러날 때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속고 사는 게 맘편하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런 냉소적인 무관심은 결국 작금의 사태에 이르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버린다.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의 이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편재하지 않게큼 양심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사회적 구조를 바꿔나가야만 한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히어로가 나오는 판타지 영화 속에서 아무런 특별한 힘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괴수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린치를 당하는 것처럼, 국가와 민간기업을 이끄는 이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너무 순진한 말이지만, 아니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이토록 계획적으로 저지르는 것일까?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보화 사회에서 자기들의 기만적인 행동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뻔뻔한 거짓말을 일삼는다.
‘1부 접점을 만든다’에서는 이미 멀티플렉스에 점령당한 우리나라 극장가의 현실을 더 비관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멜리에스 공공영화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영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마치 천만 영화를 만들어주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멀티플렉스에서도 영화 하나만 상영할 때가 있다. 당연히 영화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상업성을 가진 영화만 살아남게 된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비교 또한 대형인터넷 서점과 동네 독립서점과 관련되어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부동산 투기와 아파트 공화국에 되어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2부 발언한다’에서는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가장 큰 화두 중의 하나인 출산율에 대한 내용이다. 밀레니엄이 도래하기 전만 해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현상을 서구화되는 과정 중의 하나로 인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선진국이 되어 먹고 살만해지면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유럽에서 출산대국에 이르렀고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출산율이 높다. 해마다 정부에서는 각종 출산장려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미 헬조선이 시작된지 한참 지난 시기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선택은 마치 모험을 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출산 정책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아이를 낳기 싫은 것이 아니라 못 낳은 상황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된다.
‘3부 거리로 나선다’에서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노란 조끼’ 투쟁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가끔씩 전해지는 뉴스를 통해 프랑스 국민들이 지금의 대통령 마크롱을 규탄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내막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명백한 거짓말과 일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앞장선 이가 어떻게 재선에 성공했는지 의아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으니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특정한 리더 없이 수년 동안 지속된 ‘노란 조끼’ 투쟁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다.
‘4부 고발한다’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로 팬데믹 전체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실려있다. 점점 뒤로 갈수록 분노게이지가 상승하고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를 이렇게 농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경악스러웠다. 팬데믹 초기에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WHO의 결정사항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뉴스에서는 명확한 팩트체크를 하지 않았지만 간혹가다 WHO 사무총장의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이나, 어디선가 압력을 받아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을 내비췄다. 당시만 해도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하자, 그것을 쇄신하기 위한 중국의 압력이 WHO에 가해진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도 미국도 아닌 거대한 재벌과 제약회사의 어마어마한 로비의 결과로 국제기구와 대부분 힘있는 국가의 정부마저 WHO의 팬데믹 선언을 받아들이며 국민들을 공포로 선동하고 세계대전을 발발케 한 전체주의의 부활을 도모하여 수십조원의 이익을 거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특히나 많은 논란이 가중시킨 코로나 19 바이러스 치료제와 백신 개발과 백신 접종의 강요와 백신 패스 등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줄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악인들의 집합체가 이렇게 교묘하고 촘촘하게 엮여 전세계 사람들을 기만했다니 차라리 그냥 이런 주장이 소수의견에 불과하다면 다행일텐데라는 생각마저 든다. 자선 재단을 설립하여 국제보건기구에 엄청난 금액을 기부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철하는 선두 주자처럼 포장된 빌 게이츠는 마치 유전자 조작 종자와 제초약으로 쓰이는 몬산토 기업에 투자해 얻은 배당금으로 자선 기부를 해온 것이다. 코로나 백신 개발이 시작될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많은 국가의 수장들에게 직접 기부를 종용하며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백신을 팔아 엄청난 이득을 취하게 된다. 책에서 거론된 ‘자선 자본주의’는 이렇다.
“기부사업은 세계화된 경제계에서 가장 번창하는 산업이라고, 게이츠의 마르지 않는 곳간의 비밀을 설명한다. 이들의 기부는 교육, 농업, 보건 분야의 정책 영역에서 억만장자들이 전대 미문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데 직접 기여하고, 상위 1퍼센트 부자들은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준 구조를 더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정부와 달리 국회의 논의를 거칠 필요도, 감사를 받을 필요도 없다. ‘내 돈 내가 쓰고 싶은 곳에 폼나게 쓴다’는 기부란 이름의 자유로운 행위는 그 모든 귀찮은 절차를 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영역의 질서를 개편하게 해주는 도구다. 정치인들처럼 시시때때로 표를 구걸할 필요도, 가진 권력을 하루아침에 잃을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는 그들은 유아독존의 존재다. 현명하게도 게이츠 재단은 학계와 주류 언론, NGO에도 넉넉하게 선의를 베풀어 온 덕에 웬만한 잡음들을 소거할 수 있었다.(295)”
마치 이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지난 팬데믹 시기를 반면교사 삼아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가 널리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래본다.
“진지한 하루의 일과인 듯, 마당을 공유하는 네 마리의 이웃집 고양이들은 오늘도 담장과 마당, 지붕 위를 빠짐없이 두루 산책하고 마당을 뒹굴며 뛰어논다. 메마른 나뭇가지들을 분주히 오가며 먹이를 찾던 새들도 종종 가지 위에 나란힌 앉아 다정한 스킨쉽을 나눈다. 이들에겐 마스크도, 거리두기도, 백신도, 모임 제한 같은 우스운 지침도 필요치 않다. 그들에겐 그들의 신체에 대해 결정하는 WHO도, 공포를 전달하는 TV도, 방역규칙을 결정하는 질본도 없으니, 하늘을 날고 담을 넘기 위해 그 어떤 패스도 필요치 않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분명 같은 바이러스들과 공존하지만, 그들의 삶은 2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가 타고난 지혜라는 제 안의 버튼을 끄고 자본과 권력의 스피커인 주류 언론에 귀 기울이는 동안, 현생 인류는 사피엔스라는 학명게 걸맞지 않게, 심각하게, 매우 심각하게 퇴화하고 있다.(3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