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22학번
구하비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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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비 님의 [하버드 22학번]을 읽었다. 지금은 공교육과 더불어 사교육 또한 합법적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과외를 비롯한 사교육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성적을 더 올리고 싶었던 있는 집 자식들은 몰래 과외를 받다가 걸려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드러내며 과외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학원을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부모도 자녀들도 시간과 돈을 허비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모두가 학원을 가지 않는다면, 아니 입시를 위한 학원만 사라진다면 요즘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흙장난을 하게 될까? 학원은 물론 요즘은 결석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예전에는 마치 헬스클럽에서 할인되는 몇 개월짜리 정기권을 끊어놓고도 일주일에 한 번 갈까말까 하는 곳이기도 했다. 부모 돈이 썩어나가는지도 모르고 학원 정기권을 끊어놓고 자유의 시간을 만끽한 이들이 꽤 많았고 그러다보니 학원 주위에는 공부를 하러 오는 애들 만큼이나 놀러오는 애들도 많았다. 학원비에 학원에서 요구하는 학습지에 저녁을 사먹고 중간에 간식도 먹어야 하니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예전에도 꽤나 큰 지출을 필요로 했다. 그래도 과거에 다행이었던 것은 학원을 다니지 않고 학교 정규과정만 밟아도 본인만 열심히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미 대다수의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해온 것을 학교 선생님들도 알고 있기도 하고 학교 공부만으로는 성적을 올리리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학벌지상주의의 만연과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아주 옛말이 되어버린 재물과 계급의 세습화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어느 아파트에 사는 것을 구분할 정도로 팽배해졌다. 마치 경력직만을 요구하는 구인광고를 보고 초짜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면 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뒷배가 없다면 출세를 하고 가세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희망이 사라진 세대에게 성실함과 정직함은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고 어떻게든 불법에 해당되지 않는 방법으로라도 돈을 벌거나 성공하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렸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란 노랫말이 담긴 유행가가 인기를 누릴 때 군생활을 했던 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인 이들에게 자신들이 보낸 기간의 반밖에 안되는 기간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월급을 받는 환경을 비교하며 ‘뭐가 힘드냐고’ 따지듯이 묻곤 한다. 이건 꼭 꼰대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것과 지금을 비교하면 누구나 그런 얄팍한 보상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고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지금의 세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에게는 과거의 세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월급을 아무리 많아 받아도 군복무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어도 생면부지의 남과 함께 의무적으로 보내는 기간은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대를 살던 분들은 지금처럼 배부른 시대의 젊은이들이 보이는 나태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굶어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1차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부르다고 행복하지 않는다. 집에서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가까운 친구가 SNS에 올린 인싸들이 다니는 카페에 가지 못해서 신경질이 난다. 또 신상백을 들고 해외의 멋진 휴양지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면 나만 불행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지금의 세대에게 이런 것들을 완전히 외면하고 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향을 받고 싶지 않지만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관종과 자기과시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류에 들지 못하면 그동안 내가 쌓아놓은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핵심적인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으면 좋겠고 남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마치 적선하듯이 하나씩 알려줄 때 남모를 쾌감을 느낀다. 당연히 정보를 먼저 캐치하는 자는 권력자의 근방에 머물 수 있는 허가를 받았음을 으스대며 자신에게 줄 댈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계급사회에서 역시나 정직함과 성실함은 무기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다. 약은 청지기처럼 제 때에 줄 것을 주고 속일 만큼 속이며 제 것을 챙기면 오히려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로 인해 우직하게 한 길만 걷는 이가 외면 당할 때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일지만 되돌릴 길은 전무하다. 그냥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혐오했던 모습을 뒤따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소설 속의 구하비가 자퇴서를 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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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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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편혜영 [포도밭 묘지], 김연수 [진주의 결말], 김애란 [홈 파티],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이렇게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번 수상집에도 근래에 읽었던 장편소설의 저자들이 많아서 반가웠고, 작가들의 개성이 듬뿍 담긴 다양한 필체의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짧은 단편들이 끝나면 저자들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몇 페이지가 걸쳐 이어지고 소설을 읽는 동안에 이해되지 않거나 의문을 가졌던 부분들이 평론가들과 소설가들의 리뷰로 어느 정도 해소되며 뭔가 한과목의 어려운 과제를 마무리하는 것 같은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대상을 받은 [포도밭 묘지]는 상고를 졸업한 4명의 여고 동창들의 이야기이다. 한오라는 잘난 척, 아는 척 하는 친구의 이야기부터 시작되어 수영과 윤주 그리고 화자인 ‘나’까지 이렇게 4명이 대학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졸업하자마자 또는 졸업하기 전부터 각자의 직장생활을 하며 나중에 한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봉안당을 방문하는 도중에 이미 시들어버린 포도밭을 지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지금의 청년 세대가 특히 취업을 앞둔 20대 여성이 읽는다면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 밖에 없는 불합리한 시대적 정황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래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그런 학력에 대한 차별이 존재해왔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제는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장녀라는 이유로 부모들이 대학진학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을 갈 수 없는 형편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고, 스스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몸을 갈아넣을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 노력에 대한 응당한 박수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소설 속의 한오처럼 말이다. 한오의 부단한 노력에도 오전 근무를 마치고 안 좋은 컨디션으로 견디다 못해 휴게실에서 쓰러진 것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죽음에 이른 장면이 근래에 꽃다운 나이로 노동 현장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청년과 오버랩되어 못내 가슴이 아파온다. 


[진주의 결말]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다 기나긴 병간호와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인생에 회의감을 느낀 딸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설상가상으로 불까지 지른 유진주에 대한 방송국의 다큐프로그램과 그 프로그램에 조언을 해주는 범죄심리학자와의 이야기이다. 이미 범죄자의 정황이 밝혀진 유진주에 대한 방송은 좀 더 자극적인 내용을 추가하기 위해 화자인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미 경찰의 조사에 따라 범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방송이후 유진주에게 메일을 받게 된다. 존경해온 그가 방송에서 유진주 자신을 언급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지만 ‘나’가 추정한 내용들은 틀릴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같은 달을 보더라도 달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가지 때문이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달에 가려고 선택한 길이 처음부터 틀렸기 때문에 이어지는 추정들도 틀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는 유진주가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기 위한 메일이라고 생각하며 방송국 PD가 유진주와의 제주에서의 만남을 거부하지만 얼마 후 경찰에서 밝힌 사건의 전개는 유진주의 범행이 아님이 드러난다. 


[홈 파티]는 연극배우 이연이 후배 성민의 제안으로 오대표의 집에 모이는 사적인 모임에 초대받아 식사하는 도중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이미 사회적 성공과 부를 이룬 오대표, 서, 박, 김은 이름 없이 성으로만 불린다.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그들과 친분을 쌓은 성민은 실제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의 낯부끄러운 일은 밝히지 않고 오대표를 비롯한 이들과의 사적인 모임이 자신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이연과 성민은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오대표를 비롯한 모임의 다른 이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저자의 다른 소설에서 나온 표현들을 예로 든 리뷰에서 말하듯이 현대의 새로운 계급은 명품가방이나 옷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피부와 치아를 통해 드런난다는 것처럼 연극배우 이연 앞에서 박과 김은 아주 오래 전에 연극 동아리를 했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희곡 보이체크의 한 부분을 언급한다. 이연은 그들이 자신의 직업을 깍아내리지는 않지만 틀린 부분을 지적하지 못하며 애써 이사직의 역할을 연습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오대표가 고아원에서 만18세가 되어 시설에서 나갈 때 주어진 오백만원의 자립정착금으로 아이들이 명품가방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연은 이사직을 맡은 역할을 내려놓고 이연과 성민과도 같은 입장의 이들을 대변하게 된다. 배고픈 거야 어디서든 혼자 대충 때우며 가난을 숨길 수 있겠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것인 명품 가방으로나마 가장 쉽게 가난을 감추고 싶은 것이 아니었냐고 말이다. 


[일시적인 일탈]은 개구리 공포증이 있는 ‘나’가 K라는 준서 엄마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준서 엄마는 대학 강사이자 작가로서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다보니 준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고 ‘나’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화자는 준서 엄마의 작업실을 평일이 함께 쓸 수 있도록 제안 받고 캘리그래피를 연습하게 된다. 그곳에서 화자는 준서 엄마가 쓰다만 소설과 글을 읽게 되고 나중에는 그녀가 남긴 책들을 읽기 시작한다. 준서 엄마의 갑작스러우 죽음 이후 화자가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남편에게 캘리그래피 교실을 열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과연 준서 엄마라는 존재가 화자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진다. 준서 엄마의 작업실은 화자가 빌린 곳이었고 그곳에서 화자는 개구리 공포증을 극복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화자인 ‘나’가 우연히 일본인 친구 아야를 만나면서 우연과 확률의 계산으로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며 나눈 대화와 소설과 논문을 소재인 성수대교 붕괴를 빗댄 이야기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의 역사를 안다면 더욱 재미가 느껴질 조지 워싱턴 브리지에 대한 내용과 화자와 아야와의 만남은 성수대교와 대조적인 재난 사건에 대한 아야의 언급으로 이어진다. 성수대교는 무너지고 난 후 8차선 도로로 확장되어 재건되었을 뿐 과거의 뼈아픈 역사와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자리는 없다. 그에 비해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그라운드 제로와 프리덤 타워가 갖는 격차는 화자가 준비하는 논문에서 준비한 제목이 아니라 지도교수로부터 제안받은 ‘균열은 어디에나 있다’는 제목으로 좁아진다. 아야를 만나지 않았다면 800페이지가 넘는 논문같은 소설을 조지 워싱턴 브리지 위에서 강 아래로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날 평소처럼 버스를 타지 않고 사람들이 많던 지하철을 타 지각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야라는 일본 이름을 아플 때 내는 소리가 맞냐고 묻는 친구에게 한국어 강사답게 그건 모음의 첫 발음이라고 알려주는 화자는 재난의 주인공이 될 뻔했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소설과 논문에 적절히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을 던져 버리지 않고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아주 환한 날들]은 평생 억척스럽게 과일가게를 운영하다 남편의 사별 이후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는 ‘나’의 이야기이다. 평생교육원 매주 수요일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참석하며 일상을 이어하는 화자는 수필 쓰기 수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수강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 오는 것을 보며 자신도 뭔가 써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미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위는 아이들을 위한 앵무새를 샀다가 갑자기 아이들이 앵무새를 무서워하게 되어 장모님께 한 달만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딸은 다른 핑계로 함께 오지 않고 사위만 덩그러니 혼자 온 것은 화자와 딸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지난 날의 과거를 통해 드러난다. 과일 배달을 하지만 가산을 늘리는데 무관심한 남편과는 달리 억척스럽게 장사를 해온 화자는 딸과의 몇 가지 사건으로 소원해지게 된다. 딸의 서운한 기억을 떠올리던 화자는 얼떨결에 앵무새를 맡아 키우게 되고, 집안을 더럽히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앵무새를 냉대하다가 기운이 없어진 상태를 보고 겁이나 동물병원의 조언을 청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앵무새를 돌보며 화자는 애정을 갖게 된다. 제목인 아주 환한 날들이 의미하듯이 어쩌면 과일가게를 접고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규칙적으로 해온 엄마인 화자는 딸과의 소원한 상태를 아쉬워했고, 손주들을 시어머니에게만 맡기는 딸에게 서운함마저 드러낼 수 없었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아쉬워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낙심했던 화자에게 앵무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은 그녀에게 다시금 환한 날들을 되돌려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과 작가노트의 내용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띠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236)”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너무 무섭고 고통스럽다. 소설을 쓸 때마다 달아나고픈 충동에 휩싸이는 건 소설을 쓰는 일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옥미는 결국 해냈고 그걸 생각하면 아주 작은 불빛이 켜진 것처럼 내게도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를 등불 삼아 컴컴한 강물 속 물풀처럼 자라나 있는 슬픔과 고통, 시기심과 비겁함, 자기모순과 기만 따위를 헤치며 또다시 조금씩 앞으로 헤어쳐나간다. 그 길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어코 환한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이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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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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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의 [이국에서]를 읽었다. 보보민주공화국이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국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름을 갖고 있지만, 소설 속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과 보보민주공화국에 대한 묘사는 터무니 없는 상상의 나래에서 비롯된 썰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지만 실제로 벌어진 과거와 현재진행형인 일들을 반영하고 있다. 주인공 황선호는 중견 기업의 대리로 일하다가 자신이 모시던 상사가 정치인이 되면서 캠프에 들어가게 된다. 회사원과 어느 정치인의 당선을 위한 캠프에서 일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비슷한 면도 있겠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향을 요구할 것이다. 소설에서 묘사하듯이 황선호는 캠프에 들어온 이후로 당선을 위해서라면 응당 해야 할 온갖 업무들을 접하게 된다. 누군가에 무엇을 주고 받거나 정보를 캐내거나 흘리거나 협박은 아니라도 회유와 설득을 오가는 작업을 반복하게 된다. 어떤 것은 은밀하게 또 어떤 것은 은근히 드러나도록 설계된 마치 공장과도 같은 기린팀의 소속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정치판에서 진실을 중요한 것이 아닌게 되어버렸다. 불법비자금을 받았느냐 안받았느냐, 성추행이나 성희롱같은 언행이 있었느냐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물타기라는 말이 속된 말로 변질된 것처럼 언론을 통해 분위기가 형성되고 민심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건의 진위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선거가 마무리되고 당락이 결정되고 나면 선거 전에는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던 찬반진위 논쟁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러들고 언론을 통해서도 결과를 찾아보기 힘들다. 소설의 황선호는 우리나라 정치계에서도 흔히 불거질 수 있는 시장 선거에서의 뇌물수수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하나의 시나리오를 제안한다. 그 자신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될지 모르면서. 황선호가 제안한 시나리오의 핵심은 뇌물수수의 의혹이 되는 시장이 아닌 부하직원이 모든 책임을 안고 완벽하게 잠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벽한 잠적의 공간으로 보보민주공화국을 제안한다. 


어디에 붙어있는지 지도를 보고도 찾기 힘든 낯선 이국인 보보민주공화국을 제안한 황선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나라를 "하늘은 투명하고 태양빛은 순수하다"는 말로 설명한다. 마치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은연중에 튀어나온 보보민주공화국에 대한 황선호의 설명은 그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누구가가 보낸 편지에 있던 구절이 떠오른 것이다.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기린팀의 준비로 황선호는 그가 제안한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어 이국으로 떠나게 된다. 보보민주공화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황선호는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말을 되뇌인다. "네가 원하는 일인지 생각해라. 너를 위한 일인지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38)" 


기린팀에 속했던 곳의 흔적을 지우고 보보민주공화국에 도착한 황선호는 호텔방에서 두문분출하며 술독에 빠져 괴로워한다. 선거가 남은 6개월 동안 완전한 잠적을 위해서 황선호의 보스와 그가 낯선 곳에 온 것을 아는 송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기로 약속 한 후, 황선호가 떠난 고국에서의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뻔히 예상되기에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자 술에 취한 무의식이 나날이 이어졌다. 호텔 매니저와 소설가를 꿈꾸는 직원 류에 의해서 생사를 확인받은 황선호는 병원에 실려가 체력을 회복하고 그가 도착한 이국의 땅을 거닐게 된다. 그리고 이국을 거닐며 그가 도피처로 왜 보보민주공화국을 선택했는지, 그곳은 황선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바로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들었던 자전거로 전세계를 누비며 편지를 보낸 김선호라는 사람의 글이 자신을 부른 것이다. 


엄마의 죽음 이후 유품을 정리하다 김선호의 편지 꾸러미를 발견하지만 자세히 읽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보보민주공화국을 떠나기 전에 그 편지들을 모두 읽고 그가 보보민주공화국에서 보낸 편지들에 나온 '친구들의 집'을 찾아 나선다. 호텔 직원 류를 통해 그 집의 소재를 묻다가 펍 주인 필을 만나게 되고 필을 통해 쟝을 알게 되고 비로소 김선호가 머물렀던 '친구들의 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강진이란 가명으로 이국에서 머물던 황선호는 불안정한 치안과 공화국 주변의 국가들이 빗장을 걸고 외부인의 입국을 막자 그들에게 다가온 불행과 가난과 혼란스러움의 모든 이유를 외부인에게 덧씌우게 된다. 황선호도 호텔에 숙박하며 공화국에 머물 체류허가증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쟝을 따라 동굴에 머무는 외부인들의 공동체를 알게 되고 그곳에서 오래전 친구들의 집이 사라지고 그곳에 머물렀던 공동체의 흔적을 쫓게 된다. 


'친구들의 집'은 자연발생적으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신체기관이 아주 서서히 변형되는 것처럼 보보민주공화국에 머물던 사람들이 구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리더도 없이 스스로의 의식주를 해결하며 공생하는 매우 이상적인 공동체의 형태를 띠게 된다. 마치 수도원처럼 하지만 어떤 규칙이나 위계질서에 의한 차이도 없이 그저 모두가 명상과 공부와 운동과 노동을 의무적 권고로 받아들이며 지내는 것이다.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게 된 자전거 여행자 김경호는 그곳에 매료되어 정주하게 되고 자전거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 자연주의 개더링 그룹에게 모임을 할 장소를 소개하고 그들의 모임은 보보민주공화국의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살육의 현장이 되고 만다. 필은 김경호가 개더링에 모인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잊고 지냈던, 그가 고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묵은 상처의 덩어리가 통채로 튀어올라는 것을 느끼며 '친구들의 집'을 지키고자 한다. 


필의 이야기를 통해서 황선호는 자전거 여행자 김경호가 엄마에게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내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친부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김경호가 엄마와 사랑했음에도 고국을 떠나 방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개더링의 현장에서 보았던 무고한 이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김경호는 친구들의 집에 머물며 이루려 했던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고국에 머물 때에는 외부인이 아니었지만 외부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쓰라린 고통의 순간들을 치유받았고, 친구들의 집에 머물 때 그는 더 이상 보보민주공화국의 외부인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황선호의 잠적은 결과적으로 필과 쟝과 동굴에 머물던 외부인들에게 다시금 '친구들의 집'과 같은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고, 외부인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이들은 과거의 친구들의 집 구성원들처럼 구속과 규정과 계급이 없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된다. 


소설 속의 유토피아 같은 '친구들의 집'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력적인 요소가 전무하기에 언제든 그들을 지켜보는 보보민주공화국의 부패한 정권에게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마음 먹기만 한다면 친구들의 집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외부인들은 3일치의 양식만으로 바다에 던져진 채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친구들의 집 구성원들은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아낸다. 마치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쉽게 부서질 수 있기에 감히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처럼, 작금의 현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황선호가 떠난 우연치 않게 아버지 김경호의 흔적을 따라간 길은 비록 이국이지만 고국보다 자신을 외부인이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우리의 인종, 피부 색깔, 문화, 경제적 차이는 서로를 배타적으로 만드는 외부적 요소일 뿐, 그것을 뛰어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국의 모습이 아닐까.


"그리움은 그리워하는 상태가 해소되기를 원치 않는 이상한 감정이라고, 그리움이 성취되는 순간 그리워하는 상태가 해소되어버리므로, 그리움의 상태가 해소되면 그리워할 수 없으므로 계속 그리워하기 위해서는 그 성취를 미래의 상태로 남겨둬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몹시 쓸쓸해 보였다.(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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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 - 삶을 회복하는 힘,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
목수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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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 작가의 [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를 읽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가 1일 생활권이 되었고 언제 어디서든 정보를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산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닥친 일이 언제든 제일 우선시되며, 지금 나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항상 따라붙는 적절한 핑계가 되는 말은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언제 다 신경쓰고 사느냐’이다. 사실 그렇다. 정말로  먹고 살기가 바쁜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내고 그런 정보에 관심도 여유도 없는 이들에게 전해주어야만 한다. 인터넷의 발달은 전세계의 실상을 다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나라 언론이 전해주는 내용을 통해서 걸러듣게 된다. 우리나라 언론은 그 나라 언론이 게재한 내용을 그대로 담거나 때로는 우리 입맛에 맛게 변형하기도 한다. 다른 사정 뿐만 아니라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상황 조차도 해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팩트만을 전달하겠다는 뉴스 보도도 한정된 시간안에 보도할 내용을 전달해야 하기에 때로는 정말로 대중들이 알아야할 내용들이 쏙 빠진 채 엉뚱한 내용이 보도되기도 한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너무 많은 정보가 범람하다 보니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가장 신뢰를 심어주어야 할 국가기관과 국제기구들마저 자본주의의 논리에 휩쓸려 상식적이지 않은 행보를 걷는 것이 드러날 때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속고 사는 게 맘편하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런 냉소적인 무관심은 결국 작금의 사태에 이르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버린다.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의 이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편재하지 않게큼 양심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사회적 구조를 바꿔나가야만 한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히어로가 나오는 판타지 영화 속에서 아무런 특별한 힘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괴수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린치를 당하는 것처럼, 국가와 민간기업을 이끄는 이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너무 순진한 말이지만, 아니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이토록 계획적으로 저지르는 것일까?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보화 사회에서 자기들의 기만적인 행동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뻔뻔한 거짓말을 일삼는다. 


‘1부 접점을 만든다’에서는 이미 멀티플렉스에 점령당한 우리나라 극장가의 현실을 더 비관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멜리에스 공공영화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영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마치 천만 영화를 만들어주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멀티플렉스에서도 영화 하나만 상영할 때가 있다. 당연히 영화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상업성을 가진 영화만 살아남게 된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비교 또한 대형인터넷 서점과 동네 독립서점과 관련되어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부동산 투기와 아파트 공화국에 되어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2부 발언한다’에서는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가장 큰 화두 중의 하나인 출산율에 대한 내용이다. 밀레니엄이 도래하기 전만 해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현상을 서구화되는 과정 중의 하나로 인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선진국이 되어 먹고 살만해지면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유럽에서 출산대국에 이르렀고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출산율이 높다. 해마다 정부에서는 각종 출산장려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미 헬조선이 시작된지 한참 지난 시기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선택은 마치 모험을 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출산 정책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아이를 낳기 싫은 것이 아니라 못 낳은 상황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된다.


‘3부 거리로 나선다’에서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노란 조끼’ 투쟁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가끔씩 전해지는 뉴스를 통해 프랑스 국민들이 지금의 대통령 마크롱을 규탄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내막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명백한 거짓말과 일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앞장선 이가 어떻게 재선에 성공했는지 의아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으니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특정한 리더 없이 수년 동안 지속된 ‘노란 조끼’ 투쟁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다. 


‘4부 고발한다’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로 팬데믹 전체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실려있다. 점점 뒤로 갈수록 분노게이지가 상승하고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를 이렇게 농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경악스러웠다. 팬데믹 초기에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WHO의 결정사항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뉴스에서는 명확한 팩트체크를 하지 않았지만 간혹가다 WHO 사무총장의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이나, 어디선가 압력을 받아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을 내비췄다. 당시만 해도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하자, 그것을 쇄신하기 위한 중국의 압력이 WHO에 가해진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도 미국도 아닌 거대한 재벌과 제약회사의 어마어마한 로비의 결과로 국제기구와 대부분 힘있는 국가의 정부마저 WHO의 팬데믹 선언을 받아들이며 국민들을 공포로 선동하고 세계대전을 발발케 한 전체주의의 부활을 도모하여 수십조원의 이익을 거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특히나 많은 논란이 가중시킨 코로나 19 바이러스 치료제와 백신 개발과 백신 접종의 강요와 백신 패스 등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줄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악인들의 집합체가 이렇게 교묘하고 촘촘하게 엮여 전세계 사람들을 기만했다니 차라리 그냥 이런 주장이 소수의견에 불과하다면 다행일텐데라는 생각마저 든다. 자선 재단을 설립하여 국제보건기구에 엄청난 금액을 기부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철하는 선두 주자처럼 포장된 빌 게이츠는 마치 유전자 조작 종자와 제초약으로 쓰이는 몬산토 기업에 투자해 얻은 배당금으로 자선 기부를 해온 것이다. 코로나 백신 개발이 시작될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많은 국가의 수장들에게 직접 기부를 종용하며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백신을 팔아 엄청난 이득을 취하게 된다. 책에서 거론된 ‘자선 자본주의’는 이렇다. 


“기부사업은 세계화된 경제계에서 가장 번창하는 산업이라고, 게이츠의 마르지 않는 곳간의 비밀을 설명한다. 이들의 기부는 교육, 농업, 보건 분야의 정책 영역에서 억만장자들이 전대 미문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데 직접 기여하고, 상위 1퍼센트 부자들은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준 구조를 더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정부와 달리 국회의 논의를 거칠 필요도, 감사를 받을 필요도 없다. ‘내 돈 내가 쓰고 싶은 곳에 폼나게 쓴다’는 기부란 이름의 자유로운 행위는 그 모든 귀찮은 절차를 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영역의 질서를 개편하게 해주는 도구다. 정치인들처럼 시시때때로 표를 구걸할 필요도, 가진 권력을 하루아침에 잃을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는 그들은 유아독존의 존재다. 현명하게도 게이츠 재단은 학계와 주류 언론, NGO에도 넉넉하게 선의를 베풀어 온 덕에 웬만한 잡음들을 소거할 수 있었다.(295)”


마치 이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지난 팬데믹 시기를 반면교사 삼아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가 널리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래본다. 


“진지한 하루의 일과인 듯, 마당을 공유하는 네 마리의 이웃집 고양이들은 오늘도 담장과 마당, 지붕 위를 빠짐없이 두루 산책하고 마당을 뒹굴며 뛰어논다. 메마른 나뭇가지들을 분주히 오가며 먹이를 찾던 새들도 종종 가지 위에 나란힌 앉아 다정한 스킨쉽을 나눈다. 이들에겐 마스크도, 거리두기도, 백신도, 모임 제한 같은 우스운 지침도 필요치 않다. 그들에겐 그들의 신체에 대해 결정하는 WHO도, 공포를 전달하는 TV도, 방역규칙을 결정하는 질본도 없으니, 하늘을 날고 담을 넘기 위해 그 어떤 패스도 필요치 않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분명 같은 바이러스들과 공존하지만, 그들의 삶은 2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가 타고난 지혜라는 제 안의 버튼을 끄고 자본과 권력의 스피커인 주류 언론에 귀 기울이는 동안, 현생 인류는 사피엔스라는 학명게 걸맞지 않게, 심각하게, 매우 심각하게 퇴화하고 있다.(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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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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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었다. 그동안 '일간 이슬아'이라는 이름의 잡지가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얼핏 보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던 차에 저자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몇 페이지를 읽지도 않았는데, 왜 일간 이슬아가 화제성을 갖게 된 것인지 단박에 느낌이 왔다. 한 마디로 뭔가 특이하다. 아주 간결하고 쉽게 읽히고 뒤끝이 없이 세상 쿨할 것 같아 한 마디로 글에서 간지(일본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간지만의 맛깔스러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가 난다. 아니 왜 이제서야 처음 접하게 된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신선함이 마구마구 느껴졌다. 


저자의 이전 작품들을 전혀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부와 저자와의 관계가 마치 소설 속의 설정이 아니라 아주 오랜시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화감이 제로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그냥 에세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가장 이유는 가녀장이라는 가정이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출판사의 직원으로 딸을 상사로 모신다는 설정이 너무나도 센세이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녀장이라는 소설의 설정이 아주 희귀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가녀장들이 그리고 가족 기업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가녀장과 가족 기업은 실제로 많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온 것과 같은 관계는 본 적이 있는가? 


우선 가정집과 출판사가 한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그 같은 공간을 시간에 따라서 출판사와 보금자리라는 경계가 구분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부럽고 멋지게 보이는 것은 낮잠 출판사 사장인 슬아와 엄마인 복희와 아빠인 웅이가 일하는 관계 속에서는 철저하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부모가 아닌 모부라고 표현을 하니까 모부 자식 간에 일을 하며 더군다나 자식이 상사인 경우에 이렇게나 깍뜻한 경어의 사용이 가능할까? 부지불식간에 평소에 하던 말버릇이 튀어나오고 감정적으로 변하기 쉬운게 모부 자식 사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소설 속의 모부 자식 사이는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존중한다. 뭔가 딸 슬아가 상사이고 경제권을 갖고 있어서 엄마와 아빠가 이용당하는 것이 아닐까란 우려는 안방에서 부부가 내뱉는 말로 한 순간에 불식된다.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반복된 엄마와 아빠의 귓속말은 위트를 자아내며 소설 속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소설의 제목에 '가녀장'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 사이에 마치 종교와 신념처럼 달라붙은 가부장 시대의 부조리와 차별을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방법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소외토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 보자는 제안이 아닐까 싶다. 성역할과 성별 구분의 답습으로 결정된 사회적 요인들이 가부장제라는 이름으로 고착화되어 온 역사를 보기좋게 한 방 날리는 낮잠 출판사의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소설의 중간에 아빠 웅이가 동창회에서 딸을 상사로 모시는 것을 약간은 빈정대는 말이 오갈 때 '다 내가 맞춰 주는 것'이라고 응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도 시간이 흐름만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가사 노동의 신성함과 자녀가 모부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과 완전히 다른 객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견고한 틀을 부수는 이들의 생각과 말에 경청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생채기만 가중시킬 뿐이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요한 들 타인은 내 생각대로 살지 않는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기 위한 발판이 되는 배려이듯이, 소설 속의 슬아와 복희와 웅이가 부럽다면 나 또한 오늘 하루 누군가를 배려하는 습관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잔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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