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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리커버 에디션)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절판
권여선 작가의 [각각의 계절]을 읽었다.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수상작품집에서 몇 달 전에 읽었던 터라 대강의 내용이 기억났지만, ‘실버들 천만사’ 또한 수상작품집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과 3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망각의 자리를 마련한다니, 어쩌면 다시 몇 년이 지나서 이 소설집을 다시 읽는다면 분명 또 다른 새로움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놀라운 가독성과 더불어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화자의 입장에 순식간에 몰입이 되어, 마치 나 자신이 주인공에 빙의라도 된 듯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도 무작정 응원하고 동의하는 만드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지만, 어떻게 이토록 한 사람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람을 금치 못하게 된다. 특히나 주인공이 겉으로 내뱉지 못하는 감정의 흐름을, 때로는 본인 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내면의 변화를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낱낱이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재앙과도 같은 불운이 연속된 비참한 운명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딱히 주인공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의무론을 대두시키는 상황 설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인 것처럼 안타깝고 답답하고 무력하게 느껴지곤 했다. 섣부른 결론일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모진 내면의 고통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에 안쓰럽지 않은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란 인류애가 조금씩 싹트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여러 단편에서 저자의 연령대와 비슷한 중년을 넘긴 여성이 등장한다. 옛날 같으면 환갑 잔치를 성대하고 치르고 여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이겠지만 이제는 환갑이 넘긴 사람을 아무도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회적인 노동의 주역으로서는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때이지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길고도 길다. 어쩌면 그 시기가 배우자와 자녀와 좀 더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한 때가 아닌가 싶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자녀 양육을 위해 정신없는 시간을 견디느라, 사회적 노동을 통해 자아 실현하고 분투하느라 가족임에도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력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긴 시간을 그렇게 혈연으로 얽힌 범주의 힘만 믿고 방치한 후폭풍은 예상외로 강력하다.
‘실버들 천만사’에서 엄마 반희와 딸 채운은 둘 만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채운은 엄마에게 여행하는 내내 서로 반희씨, 채운씨라는 호칭으로 부를 것을 약속한다. 반희씨는 딸의 제안에 반색하며 마치 서로를 존중하는 친밀한 직장동료와 티티카카를 나누는 것처럼 여행을 즐긴다. 소설에는 반희씨가 채운이 고2 때 왜 이혼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채운이 어릴 때 엄마의 하루 동안의 가출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가올 엄마의 부재를 두려워 하게 되는 미래완료에 대한 거부감의 증세를 드러나게 된다. 딸과의 즐거운 여행길에 채운의 이상 증세를 눈치 챈 반희씨는 일평생을 눈치보며 살아왔던 자신의 습관적인 행동을 딸에게 물려준 것을 안타까워하며 딸이 더 이상 자신의 부재로 다가올 미래완료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고자 이렇게 다짐한다.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78-79)”
‘기억의 왈츠’에서 화자인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을 갔다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30년이나 지나버린 어쩌면 화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살기를 선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를 아주 잠깐 동안의 만남에 대한 기억이다. 그렇게 머나먼 과거의 일이 불현듯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을 때 마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듯이 하나의 일련된 필름들이 돌아가듯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화자는 대학원생 시절 만났던 경서와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경서와 어떻게 가까워지게 되었는지, 경서와 이 숲속 식당에 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서와 왜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경서를 만나는 대학원 시절의 화자는 막말로 되는대로 살아보자는 삶에 대한 희망이나 미련이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그 나이대의 허세와 만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경서가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나중에 10년 동안 써온 자신의 일기를 보낸 것으로 보아 정반대가 아니었나 싶다. 경서가 보낸 일기를 읽지 않은 화자의 모습에 화가 난 경서는 화자의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엄마와 오빠와 의절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연락이 끊기게 된다. 화자의 기억 속에 자리한 경서와의 추억은 철없던 자신의 과거을 잊고자 했던 부단한 노력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게 하지만, 이내 숲속 식당의 방문으로 인해 떠오르게 된 경서의 기억이 경서가 보낸 편지에 담겨 있던 숨겨진 의미의 뜻을 일깨워준다. 30년이나 지나버린 이 시점에서 경서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그때는 내가 편지를 너무나도 늦게 읽어서 라는 구차한 변명을 해야하지 않을까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운이 좋다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이 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 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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