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지의 두 여자
강영숙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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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 작가의 [분지의 두 여자]를 읽었다. 십여년 전 쯤 생명윤리 강의를 준비하면서 ‘체외발생’이라는 낯선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인공수정이라는 포괄적 개념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좀 더 세분하게 구분되는 수정 방법과 왜 다른 방법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어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야 당연히 인공수정을 고려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외발생은 정말 낯설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체외인공수정을 위해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체취하고 수정란을 만들어 아기의 모태가 되는 자궁에 착상을 시켜야 하지만 체외발생에서는 인공자궁과 고도로 발달된 인큐베어터로 아예 여성이 몸이 아닌 인공적인 기구로 아기를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SF 장르소설에나 나올 법하 얘기인가 싶은데, 전문적인 학술서적에 버젓이 향후 인큐베이터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체외발생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물론 당연히 윤리적인 문제와 결부된 법적인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체외발생에 대한 설명을 읽는 순간 더 오래전에 보았던 ‘아일랜드’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 연장을 위해서 장기를 이식받고자 하는 소수의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해 비밀리에 인간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던 공장과도 같은 거대한 실험실에 체외발생의 이론을 현실화시킨듯한 수많은 인큐베이터에서 아기들이 탄생되고 양육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인공수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 중에서 일반적으로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다양한 경우의 수가 발생된다. 임신이 불가능한 불임부부들의 위한 획기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가장 먼저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체취함으로서 여성의 몸에 위해를 가하게 된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대체 언제부터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것인기에 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순간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인공수정은 불법을 넘어 살인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세계의 인공수정기술이 가능한 나라에서도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상태를 인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률을 적용시키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첨예한 논쟁은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킬 과학적 방법이 생겨나기 전에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던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윤리적인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될 것이다. 


저자의 소설에서 체외인공수정으로 발생될 문제 중에 대리모와 관련된 일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체외인공수정은 배우자 간에 이루어진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와 문제들이 발생되지만, 배우자가 아닌 비배우자의 정자와 난자를 이용하거나 그 가운데 대리모를 이용해 출산을 하게 될 경우에는 상당히 복잡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불임의 원인이 남자이냐, 여자이냐에 따라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익명의 누군가의 정자와 난자를 증여받아 체외인공수정을 하게 될 경우에 태어날 아기에게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적 아버지 혹은 생물학적 어머니와 사회적 어머니 이렇게 다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발생된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두 가지 수에 불과하지만, 어머니의 경우에는 소설에 나온 것처럼 희우가 익명의 난자를 공여받아 남편의 정자와 수정하고 진영의 몸을 통해 출산을 하려고 계획했기에, 그렇게 태어난 아기에게는 생물학적 어머니인 익명의 누군가, 출산을 한 어머니 진영, 그리고 사회적 어머니인 희우까지 세 명의 어머니가 생겨나게 된다. 나중에 아기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기원을 알고자 했을 때 생겨나는 혼란을 대체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려주지 못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샤우와 진영은 서로 다른 계기로 대리모가 되기로 결심을 했지만 결국 둘 다 아이를 낳는데에 실패하게 되고, 코디네이터를 통해 철저한 계약에 합의한 이들은 의뢰자가 원하는 충분한 조건을 이루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태어날 아기를 차갑게 외면하게 되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렇게 아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차라리 몰랐더라면, 과학의 발달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언젠가는 아니 어쩌면 벌써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한 대리모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리모라는 선택을 하게 된 샤오와 진영의 기구한 사연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고, 그러한 삶의 사연이 남의 이야기 일때와 나의 이야기 일때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선 애끓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온전히 그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벌처럼 남아있기 마련인데, 나의 삶 만큼은 무탈하게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일까. 아마도 오민준이 쓰레기 수거를 하다가 발견한 바구니에 담긴 갓난아기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집으로 데려간 것은 그렇게 아기를 버려도 되는 것처럼 여겨온 누군가의 오만함을 대신 속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쓰레기산이 생겨 오물과 악취의 한 가운데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함에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는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터무니없는 비율로 아주 소수의 누군가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이라고 시편 저자가 노래했는데 나는 그 중에 몇 시간이나 고통의 짐을 나눠지었을까 생각해본다. 


“진영은 죽은 딸 때문에 대리모가 되는 사람이다. 아침에 집을 나간 아이가 저녁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과는 다르다. 살면서 도저히 겪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40)”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규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억울함도 애틋함도 결국은 시간이 다 잔인하게 뭉개버린다는 것을. 윤재는 돌아올 수 없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자는 동안만큼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납처럼 무거운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기억은 작동하기 시작한다.(147)”


“민준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어디서 왔든 어디로 가든,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우리가 태어난 이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늘 우리가 태어난 자리의 상식과 인식의 틀 안에 존재할 뿐이다.(222)”


#강영숙 #분지의두여자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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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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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가장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책의 원제를 보니 [All the Beauty in the World]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 번역본의 제목은 완전히 다르게 정한 것은 아무래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평이한 제목보다는 메트포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라는 말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저자의 범상치 않은 신상의 변화는 과연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일까란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미술관이라는 더군다나 가보지 않아서 규모가 짐작되지는 않지만 경비원만 해도 600명이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엄청난 크기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모나리자’와 같은 세계적으로 가장 알라진 명화를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명성을 갖춘 이들의 그림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미술관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유명한 단 하나의 그림을 너무 무방비 상태로 진열해 놓은 것이 아닐까란 염려이다. 경비원도 항상 주시하고 있고, 그림과 어느 정도 떨어져 감상할 수 있도록 안전띠와 같은 것이 놓여 있기는 하지만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작품을 손상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이다. 만일 모든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유리관 안에 넣어서 관람할 수 있도록 진열한다면 웬만큼 강력한 도구와 방법이 아니라면 작품을 손상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투명한 유리관에 넣어놓는다고해도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림의 제대로된 질감을 느낄 수 없고 작가가 의도한 바를 해석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 측에서는 과감하게 작품을 노출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바이올린이 완전 무결한 곳에 고이 모셔진 채 보관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조금씩 손상된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의해서 쉼없이 연주되는 것이 악기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아마도 미술관에 소장된 위대한 작품들을 그리고 만든 이들은 먼 훗날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 주목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꽤나 잘나가는 아주 젊은 뉴요커의 삶을 내려놓고 스스로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10년이란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의 친형이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믿고 의지하고 존경했던 형의 부제는 저자의 삶에 너무나도 큰 구멍을 만들었고, 형의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 중요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시는 치열하게 세상의 것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저자는 아주 오랜 시간 인류의 조상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예술작품의 세계로 자신의 몸을 던져 머물고자 결심한다. 

가족 중 누군가를 잃게 된 후 서서히 퍼지는 상실의 아픔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평소에 좋아하던 것이나 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상 받듯이 누리라는 권유나 슬픔을 잊지 위해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조언도 아주 잠깐 동안은 아픔을 치유하는 듯하지만, 혼자라는 고독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어김없이 심장의 한 복판에 어퍼컷을 날린다. 아직 잊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듯. 어쩌면 저자가 선택한 미술관 경비원의 시간은 이렇게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심연의 고통을 적절히 어루만질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그리고 일상적인 삶을 유지시킬 수 있는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중에 보낼수도, 동료들과 시답잖은 얘기를 끊임없이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원히 메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의 구멍을 조금씩 채워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매일 매일 위대한 걸작들을 건네는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수천 년에 걸친 삶의 흔적들을 막연히 상상하다보면 결국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기쁨, 슬픔, 고통이 반복되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거의 모두가 그렇게 하루를 살다가 흔적도 없이 떠나게 되는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누구나 머리속으로는 알고 있는 이 사실이 나에게도 당연히 해당됨을 받아들이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저자의 책을 읽으며 우리가 모두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마주하고 견뎌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딘가 나만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같은 곳을 찾으라는 권유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부를 내려놓는다 하더라도 가뿐하게 계단을 내려오고자 하는 기운을 되찾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테니 말이다. 

“하루가 끝난 후 86번가에서 지하철을 탄 나는 우물처럼 샘솟는 연민의 마음으로 동승자들을 둘러본다. 평범한 날이면 낯선 사람들을 힐끗 보며 그들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들이 나만큼이나 실존적이고 승리하고 또 고통받았으며 나처럼 힘들고 풍요롭고 짧은 삶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을. 입원해 있는 톰을 방문한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던 때를 기억한다. 누구라도 심술을 부리거나, 실수로 부딪힌 다른 승객에게 쏘아붙이면 그게 그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협하고 무지해 보였다. 우리 모두 그럴 때가 있는데도 말이다.(153)”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리얼리즘이다. W.H.오든의 시 <뮤제 데 보자르>에도 나와 있듯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319-320)”

#패트릭브링리 #나는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경비원입니다 #Allthebeautyintheworld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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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리커버 에디션)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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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의 [각각의 계절]을 읽었다.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수상작품집에서 몇 달 전에 읽었던 터라 대강의 내용이 기억났지만, ‘실버들 천만사’ 또한 수상작품집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과 3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망각의 자리를 마련한다니, 어쩌면 다시 몇 년이 지나서 이 소설집을 다시 읽는다면 분명 또 다른 새로움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놀라운 가독성과 더불어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화자의 입장에 순식간에 몰입이 되어, 마치 나 자신이 주인공에 빙의라도 된 듯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도 무작정 응원하고 동의하는 만드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지만, 어떻게 이토록 한 사람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람을 금치 못하게 된다. 특히나 주인공이 겉으로 내뱉지 못하는 감정의 흐름을, 때로는 본인 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내면의 변화를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낱낱이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재앙과도 같은 불운이 연속된 비참한 운명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딱히 주인공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의무론을 대두시키는 상황 설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인 것처럼 안타깝고 답답하고 무력하게 느껴지곤 했다. 섣부른 결론일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모진 내면의 고통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에 안쓰럽지 않은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란 인류애가 조금씩 싹트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여러 단편에서 저자의 연령대와 비슷한 중년을 넘긴 여성이 등장한다. 옛날 같으면 환갑 잔치를 성대하고 치르고 여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이겠지만 이제는 환갑이 넘긴 사람을 아무도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회적인 노동의 주역으로서는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때이지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길고도 길다. 어쩌면 그 시기가 배우자와 자녀와 좀 더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한 때가 아닌가 싶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자녀 양육을 위해 정신없는 시간을 견디느라, 사회적 노동을 통해 자아 실현하고 분투하느라 가족임에도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력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긴 시간을 그렇게 혈연으로 얽힌 범주의 힘만 믿고 방치한 후폭풍은 예상외로 강력하다. 

‘실버들 천만사’에서 엄마 반희와 딸 채운은 둘 만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채운은 엄마에게 여행하는 내내 서로 반희씨, 채운씨라는 호칭으로 부를 것을 약속한다. 반희씨는 딸의 제안에 반색하며 마치 서로를 존중하는 친밀한 직장동료와 티티카카를 나누는 것처럼 여행을 즐긴다. 소설에는 반희씨가 채운이 고2 때 왜 이혼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채운이 어릴 때 엄마의 하루 동안의 가출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가올 엄마의 부재를 두려워 하게 되는 미래완료에 대한 거부감의 증세를 드러나게 된다. 딸과의 즐거운 여행길에 채운의 이상 증세를 눈치 챈 반희씨는 일평생을 눈치보며 살아왔던 자신의 습관적인 행동을 딸에게 물려준 것을 안타까워하며 딸이 더 이상 자신의 부재로 다가올 미래완료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고자 이렇게 다짐한다.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78-79)”

‘기억의 왈츠’에서 화자인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을 갔다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30년이나 지나버린 어쩌면 화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살기를 선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를 아주 잠깐 동안의 만남에 대한 기억이다. 그렇게 머나먼 과거의 일이 불현듯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을 때 마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듯이 하나의 일련된 필름들이 돌아가듯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화자는 대학원생 시절 만났던 경서와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경서와 어떻게 가까워지게 되었는지, 경서와 이 숲속 식당에 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서와 왜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경서를 만나는 대학원 시절의 화자는 막말로 되는대로 살아보자는 삶에 대한 희망이나 미련이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그 나이대의 허세와 만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경서가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나중에 10년 동안 써온 자신의 일기를 보낸 것으로 보아 정반대가 아니었나 싶다. 경서가 보낸 일기를 읽지 않은 화자의 모습에 화가 난 경서는 화자의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엄마와 오빠와 의절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연락이 끊기게 된다. 화자의 기억 속에 자리한 경서와의 추억은 철없던 자신의 과거을 잊고자 했던 부단한 노력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게 하지만, 이내 숲속 식당의 방문으로 인해 떠오르게 된 경서의 기억이 경서가 보낸 편지에 담겨 있던 숨겨진 의미의 뜻을 일깨워준다. 30년이나 지나버린 이 시점에서 경서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그때는 내가 편지를 너무나도 늦게 읽어서 라는 구차한 변명을 해야하지 않을까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운이 좋다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이 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 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241)”

#권여선 #각각의계절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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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
김홍신 지음 / 해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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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작가의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를 읽었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 인간의 피부색깔로 구분하는 이름에 적인종이라는 낯선 구분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빨간색 인간이라니, 조금만 더 유추해보면 바로 아직도 부적절하게 남용되는 빨갱이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는 분명 빨갱이라는 말을 들으면 적지 않은 감정의 파고를 드러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의 경험이 몸속 깊이 새겨지게 되어, 마치 반작용처럼 반응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북한과 대치 중인 분단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에 공산주의적 이념에 대한 경계와 분노는 현재 진행형이다. 가끔은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며 빨갱이 프레임을 씌어 안보의 위협을 논하며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이 지긋지긋하기는 하지만, 언제쯤 우리나라는 평화를 이루어 맘 편히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소설의 주인공인 한서진은 어찌보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서슬 퍼런 시기에 철책을 지키는 소대장으로서 휴머니즘적인 행동으로 인해 국가보안법과 방공법의 희생양이 된 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권을 잡기 위해 북한의 위협적인 전략을 이용할 때가 많았으니, 군부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인 이념에 대한 강력한 법 적용이 유효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과 폭행을 당해 후유증에 평생을 고생하거나 연좌제의 수렁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본보기를 보여줘 두려움에 사로잡힌 대중들은 쉽사리 정의를 외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부당한 권력을 얻은 이들의 만행을 지켜볼 수 많은 없었던 이들이 총과 칼에 맨 몸으로 부딪혀 민주화를 이뤄냈고 그렇게 피흘린 이들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린 정의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어딘가에 한서진과 같은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이들이 있을 것이다. 사소한 실수가 억울한 누명이 되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면 불의한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거짓 증언을 내세워 영어의 몸을 만들고, 그 안에서 불법적으로 감행된 지속적인 폭력과 폭언은 온정한 정신을 말살시켜 한 사람의 모든 삶을 박살내고 말았을 것이다. 한서진의 비극적인 행로는 그의 사연을 들은 누구라도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심지어 아내의 배신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원수가 자신의 딸을 키우는 아비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방도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한서진이 철책을 지키는 소대장으로 적군을 사살하고 그의 명복을 빌어 준 후 포상과 훈장이 아니라 보안대에 끌려서 심문을 받는 대목에서 그의 유도리 없는 대답을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바보같이 느껴졌다.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보안을 유출하는 대답을 하는 장면 또한 누군가 파놓은 덫에 스스로 끌려가고 있다는 어리숙함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서진이 이렇게 인간의 순수함과 강직함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길 줄 아는 노련한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소설의 향방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으로 치달았을 것이고 저자가 한서진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저자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제를 잇는 것처럼 결국 한서진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서 그리고 친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가 남긴 유작을 발표하는 딸 자인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랑과 용서 없이는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은 먼지로 돌아갈 인간의 육신도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후대에게 각인시킬 사랑과 용서의 행위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작품이었다. 


#김홍신 #죽어나간시간을위한애도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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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이주혜 지음 / 에트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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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작가의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를 읽었다. 얼마 전 읽었던 저자의 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서도 느꼈지만,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한 번에 외워지지 않고 몇 번을 곱씹어 봐야 어느 정도 입에 붙는. 하지만 막상 페이지를 열게 되면 저자의 독특한 세계가 순식간에 눈에 들어와 놀라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나 이번 산문집은 저자가 마흔이 넘어서야 작가로서의 활동을 했다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대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야, 아니 문학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해야 이런 감상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들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노라면 가끔씩 한 편의 단행본을 출간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드러날 때가 있는데, 독자로서는 빠르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 정도면 다 읽게 되는 그 책 한 권을 위해서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송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노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느 소설의 대화에서 ’요즘 대체 책이란 걸 읽는 사람들이 있기나 하느냐’는 자조적인 한탄을 읽을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기 때문에 읽고 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기에 일상을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저작을 더욱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작가의 사후에도 언젠가 남겨진 책을 읽을 누군가가 그 작가의 생각을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잣대에 맞춰 자기 정신의 크기를 가늠하길 거부했던 앨리스. 오로지 모든 것에 다 맞는 하나의 크기를 가진 그의 정신은 고통 속에서도 끝내 펜을 내려놓지 않고 삶과 죽음을 사유했고 사후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상을 전하고 있다.(114)”


<1부 눈물은 떨어지지만 동시에 심어진다>에서는 저자의 자전적인 내용이 많이 언급된다. 뒤늦게 전업작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일부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음과 아들을 낳지 못해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던 어머니와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숙명일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고백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혈육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투사가 불가능할 수도 있고, 부모이기 때문에 죽음과도 같은 상흔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은 몹시도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 개인의 역사의 순수한 기록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투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공감할 수 있는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공통된 영적인 영역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가 겪게 되는 상실의 슬픔과 덧난 상처들을 통속적인 위로의 말과 감성팔이처럼 억지 눈물을 자아낼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굴하지 않도록 아주 아주 공을 들인 섬세한 손길로 독자를 어루만지며 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부 언어가 없는 곳에 빛을 비추는 사람>에서는 세계 각지의 유명한 소설에 대한 짧은 줄거리와 저자의 일생을 견주며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내용이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인 가부장적 남성주의 세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여성의 존재와 문화, 계급, 젠더의 차별로 희생양이 된 이들을 소재로 한 문학에 대해서 언급한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언급한 문학작품들 중에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니 나는 그동안 대체 무슨 책을 읽었던 말인가’란 생각과 동시에 ‘아니 대체 세상에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는 말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에 서너편의 영화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책 읽기를 좋아해도 하루에 서너권의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매일 매일 엄청난 양의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니 세상의 모든 작가들의 책을 섭렵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외국 작가들의 책을 그동안 너무 등한시했구라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덕분에 신간이 나올 때 제목만 눈여겨 봤었던 작가들의 책 제목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특히나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다른 책에서는 보기 힘든 저자의 일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그 작가의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작품은 곧 그 작가를 대변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저자가 소설의 간단한 줄거리에 이어 작가의 생애를 덧붙여 설명한 것은 허구의 일종인 소설이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진 허황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개개인이 영원히 공동체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야기의 힘 때문이고, 그 이야기는 문학이라는 옷을 입고 작가의 사후에도 영원히 지속되며 누군가의 삶이 전복될 사상을 전해주니, 문학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깨진 거울을 겁내는 우리에게 나는 오늘 화환처럼 무지개를 걸어주고 싶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내느라 오늘도 모진 애를 쓰고 있으므로, 어린 날의 낙하는 크느라 그런 거라지만 오늘 우리는 끝내 추락하지 않기 위해, 기어이 생존자가 되기 위해 낚시바늘 몇 개를 아래턱에 매달고도 숨을 쉬고 있지 않은가.(45)”


“돌봄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혜가 아니다. 아래에서 위로 치받고 올라가는 버거운 저항이어서도 안 된다. 당연하게 서로 의존해야 하고 의존한 ‘덩어리’로 자립해야 한다. 돌봄을 경시하는 태도는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에 내맡기는 살벌한 정글 수준으로 문명을 퇴보시키겠다는 것과 같다. 돌봄은 모든 인간의 존재 조건이어야 한다. 그 당연한 전제를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쓰고 알리는 것부터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미약한 시작이 커다란 원을 만들어 활기차게 순환할 때까지.(189)”


#이주혜 #눈물을심어본적있는당신에게 #에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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