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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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를 읽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들이 무덤을 잠시 쉬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로마인들이 불렀던, ‘죽은 자들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네크로폴리(Necropoli)’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있었다.(405)”

부활을 앞둔 사순시기 어느 날 저녁 Don Maino는 내게 어디를 가자고 제안했다. 더듬더듬 그의 질문을 되새겨보니 무슨 연주회를 가자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방문한 San Zeno 성당은 한 눈에 봐도 정말 오래 되어보였다. 그 성당의 내부 구조가 보통 성당과 다른 모습이었는데, 입구 들어서서 보면 약간 복층 구조였다. 제대를 향할 수록 가운데는 밑으로 움푹 파여 있고 양쪽 가장자리는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 놓여 있었다. 연주회는 계단 위에서 했는데, 그게 2층 같지 않은 2층이라 성당이 신기하게 지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연주를 감상하다 밑으로 내려와 움푹 파인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펴보니 ‘cimitero’라는 생소한 단어가 씌어 있었다. 바로 체메테리움이라는 라틴어 단어의 이탈리어였다. 그리고 그 움푹 파인 곳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성당 이름이 제노였던 것은 그 무덤의 주인이 바로 베로나의 첫 주교였던 제노 성인이기 때문이다. 제단 밑에 성인의 유해를 묻는 것은 익숙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에 확연히 보이도록 성인의 유해가 놓인 것은 처음 보았기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유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죽은 자들의 묘지는 되도록이면 살아 있는 자들의 거처와 먼 곳에 놓았던 우리내 관습과는 정반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은 ‘체메테리움’의 뜻을 받아들여 성인을 그들 삶의 거처에 두고자 했다. 

소설의 가공할 장소 천산 수도원의 벽서는 높은 산 꼭대기에 세워진 곳에 세상을 등지고 형제로만 살아갈 것을 다짐한 이들이 그들의 체메테리움에 남긴 성경 말씀이다. 천산벽서에 대한 신비로움을 소재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 수도원의 구성원이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며 전혀 다른 인물일 것 같은 어린 소년 ‘후’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연희를 짝사랑하는 박중위의 이야기를 거쳐 후가 천산 수도원에 머물게 되는 고리가 맞춰진다. 어느 날 천산 수도원의 비밀을 죽기 전에 토해내듯 알려준 군인 장이 윗선의 명령을 받아 수도자 반을 밖으로 내몰고 되고, 그 이유는 우리나라 군부 독재 장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조력자 한정효가 더 이상 잘못된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자 그를 가둬두기 위한 장소로 선택된 것이었다. 이후 또 다른 독재자는 천산 수도원에 머물고 있는 수도자가 된 한정효를 꺼림칙하게 여기게 되고 그곳의 모든 수도자를 지하 방 한곳에 가둬 몰살시키게 된다. 수도원에서 나가게 된 후는 사촌누나 연희를 찾기 위해 도시의 미용실을 뒤지고 다니다 그가 미용사가 되어 안기부 사모의 도움으로 누나를 찾게 된다. 하지만 누나는 후가 모르던 진실을 알려주게 되고 후는 박중위를 증오하며 그를 칼로 찔렀던 미움의 대상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천산 수도원, 후, 한정효, 연희, 박중위, 독재자, 장, 강영호, 강상호, 차동연 등의 인물들이 치밀하게 연결된 추리물을 연상시키지만,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인 분석은 인간에게 윤리가 가진 당위성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나간다. 

“사람의 정신이 행동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의 지배를 받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사람의 행동이 정신에 의해 부여된 의미의 지배를 받는 일 역시 가능하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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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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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었다.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 바라보다’라는 뜻이 담긴 시선을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내용은 ‘심시선’이라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워낙에 등장인물들이 여러 명 나오다보니 친절하게 맨 앞에 심시선 가계도도 나와 있어 이름이 헷갈리면 맨 앞 장을 열어 다시 확인하며 읽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나라 이름이다보니 금방 적응이 되지만, 외국 이름이 이렇게 여러명 나오면 정말 지친다 지쳐~ 도스토에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조금만 쉬웠더라면, 그리고 친절히 가계도를 그려주었더라면 아마 눈꼽만큼은 읽기가 용이해지지 않았을까나. 아무튼 심시선은 참으로 독특한 인물이다. 매 챕터의 시작마다 가공의 인물 심시선이 살아생전에 발표한 책과 인터뷰 등을 인용하며 실존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심시선의 유언을 잘 받아들이던 자녀들이 십년 만에 첫 제사를 드리러 하와이에 가게 된다. 

명혜, 명은, 명준, 경아 이렇게 네 명은 심시선의 아들, 딸이다. 이 중 경아는 시선의 재혼으로 만나게 된 딸인데, 흔히 새엄마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딸의 심술이나 계모의 악랄함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시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듯이 경아는 새엄마 시선을 진짜 엄마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명혜와 명은 또한 경아를 친동생처럼 아껴준다. 결말에 명혜의 남편 태호가 제사라는 이벤트를 앞두고 가장 큰 어른으로서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말에 명혜가 자신이 가장 큰 어른이라고 말하자, 태호는 내가 세 살 더 많은데 라고 답하고, 명혜는 우리집은 모계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태호는 바로 수긍해버리는 참으로 현실 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성정을 가진 이들의 모습이다.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가진 가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직장내 염산 테러 이후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상에 아이를 데려올 수 없다는 화수의 마음과, 하와이에서 만난 체이스가 칠레 해안가의 기름 유출로 새와 펭귄이 기름을 뒤짚어 써서 닦으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에 집으로 가는 비행을 변경한 지수의 따뜻함과, 새를 사랑하는 마음에 무채색의 옷만 입고 다니며 칠레에 함께 가지 못하자 울어버리는 해림의 고결함이 아마도 시선으로부터 이어진 놀라운 전승이리라.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288-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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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이자벨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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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의 [오후의 이자벨]을 읽었다.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가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누군가를 원하게 되는 것은 어떤 배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냥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본능적인 욕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배고픔은 채워지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하지만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1차적 욕구에 해당되는 것들보다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 욕구들에는 윤리적인 판단이 더욱 깊이 요구된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고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의 보호를 받는 결정은 크나큰 책임을 요구한다. 그런데 사랑은 마치 ‘생물’과 같아서 살아 숨쉬기 위한 여타의 조건들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 쉽게 변질되거나 아예 소멸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랑의 감정을 연장하려는 억지스러운 노력들은 꽤나 많은 감정적인 소모를 유발하고 결국은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불행한 계약관계가 되어버리곤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주인공 샘처럼 인간은 언제나 사랑에 대한 문이 열려있기를 원하고 다치고 상처받고 치유되는 과정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전통적 윤리주의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고방식과 권태, 냉소와 무관심이 만연한 관계속에서는 행복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탈출구를 통해 기존의 결혼 관념을 탈피하려는 시도의 맞섬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특히나 주인공 샘을 비롯한 이자벨과 레베카, 시오반, 피비 등의 등장인물들의 자유로운 성관계의 묘사는 육체적 사랑이 얼마나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해 본 이들에게는 오히려 반감을 일으킬 수 있는, 그리고 이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주인공 샘이 뇌수막염으로 청각장애를 갖게 된 아들 이던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사랑과 헌신은 사랑이 변질되어 잊고 싶은 기억만 남겼다 하더라도 자녀를 통해 짓물러진 사랑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단지 샘의 직업이 상위 1%의 소득이 가능한 유능한 변호사라는 설정이었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긍정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항상 안정을 추구하며 살았어. 내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했지. 그래서 내가 불행한 걸까? 내 주변의 용감하고 활달한 몇몇 지인들처럼 60개국을 여행했어야 행복할까? 나는 한정된 삶을 사는 사람이야.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 내 인생은 이렇게 결정됐어. 이렇게 되도록 결정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야. 이렇게 말하는 내 심정이 슬프냐고? 당연히 슬퍼. 내가 선택한 삶인데 슬프냐고? 그런 것 같아. 내 슬픔은 안정적인 삶을 바란 내 약점을 빨아먹고 자랐을까? 틀림없이 그래. 내가 약점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게 있냐고? 당신에 대한사랑 빼고는 없어. 전혀.(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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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판사
정재민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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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 작가의 [혼밥 판사]를 읽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 판사로 지내다 이제는 다른 일을 하며 글을 쓴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다가왔다. 사실 음식점이든 카페이든 혼자서 뭘 먹는다는 것은 참 멀쭘한 일이었다. 어디 식당에 들어가던지 제일 처음 묻는 말이 몇 명이냐는 질문이다. 한 명이라는 말은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서 ‘혼자요’라는 말과 더불어 손가락 하나를 들어 ‘혼밥’임을 강조한다. 요즘은 혼밥, 혼술, 혼행이 유행이다 보니 혼자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래도 역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혼자 여러 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식당의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며 처량해 할 것 같아서 급하게 밥을 먹다 체하기가 일쑤다. 그리고 혼자 가면 화려한 식사를 하기 힘들다.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스테이크를 썰기도 그렇구, 혼자 비싼 고기를 구워 먹기도 좀 그렇다. 그리고 혼자 먹는 뻘줌함을 이겨내기 위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다 보면 밥을 먹는 건지, 배를 채우는 건지 모르게 입맛이 떨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어쨌든 살기 위해서는 혼밥도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내게 있어 가장 힘들었던 혼밥의 시간은 당연히 유학생 때가 아닌가 싶다. 그것도 외국말을 처음 배우는 곳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초중고 학생들의 급식을 먹어야 했는데, 그때 참 힘들고 외로웠던 것 같다. 그것도 아직 입에 맞지 않는 파스타를 매일 먹어야 하니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애기 같은 초딩들도 엄청 맛있게 먹는데, 나는 매번 다 먹지 못하고 남은 파스타를 버리곤 했다. 그리고 나 홀로 외국인이자 동양인 이었기에 흘끔흘끔 아이들이 쳐다볼 때면 ‘뭘 봐’라고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점점 구석진 곳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지겨웠던 파스타를 이제는 맛집을 찾아서 먹으러 다닌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음식과 법의 닮은 점을 여러 번 피력한다. 하기야 음식을 만들고 팔고 먹는 것의 가장 큰 목적은 살기 위해서이고, 법정에서 피고와 원고가 다투며 최대한 잘못을 피해가려고 하는 것 또한 더 잘 살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의 발로이다. 법정에서 일어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정을 심정적으로는 헤아리면서도 어쩔 수 없는 판결을 내려야만 하는 판사들의 고충도 알게 되었다. 저자의 폭넓은 음식에 대한 정보 전달로 전혀 알지 못했던 음식들의 기원(도시락, 샌드위치, 짜장면, 짬뽕 등)이 흥미롭게 전해져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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