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이자벨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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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의 [오후의 이자벨]을 읽었다.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가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누군가를 원하게 되는 것은 어떤 배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냥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본능적인 욕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배고픔은 채워지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하지만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1차적 욕구에 해당되는 것들보다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 욕구들에는 윤리적인 판단이 더욱 깊이 요구된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고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의 보호를 받는 결정은 크나큰 책임을 요구한다. 그런데 사랑은 마치 ‘생물’과 같아서 살아 숨쉬기 위한 여타의 조건들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 쉽게 변질되거나 아예 소멸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랑의 감정을 연장하려는 억지스러운 노력들은 꽤나 많은 감정적인 소모를 유발하고 결국은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불행한 계약관계가 되어버리곤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주인공 샘처럼 인간은 언제나 사랑에 대한 문이 열려있기를 원하고 다치고 상처받고 치유되는 과정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전통적 윤리주의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고방식과 권태, 냉소와 무관심이 만연한 관계속에서는 행복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탈출구를 통해 기존의 결혼 관념을 탈피하려는 시도의 맞섬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특히나 주인공 샘을 비롯한 이자벨과 레베카, 시오반, 피비 등의 등장인물들의 자유로운 성관계의 묘사는 육체적 사랑이 얼마나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해 본 이들에게는 오히려 반감을 일으킬 수 있는, 그리고 이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주인공 샘이 뇌수막염으로 청각장애를 갖게 된 아들 이던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사랑과 헌신은 사랑이 변질되어 잊고 싶은 기억만 남겼다 하더라도 자녀를 통해 짓물러진 사랑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단지 샘의 직업이 상위 1%의 소득이 가능한 유능한 변호사라는 설정이었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긍정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항상 안정을 추구하며 살았어. 내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했지. 그래서 내가 불행한 걸까? 내 주변의 용감하고 활달한 몇몇 지인들처럼 60개국을 여행했어야 행복할까? 나는 한정된 삶을 사는 사람이야.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 내 인생은 이렇게 결정됐어. 이렇게 되도록 결정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야. 이렇게 말하는 내 심정이 슬프냐고? 당연히 슬퍼. 내가 선택한 삶인데 슬프냐고? 그런 것 같아. 내 슬픔은 안정적인 삶을 바란 내 약점을 빨아먹고 자랐을까? 틀림없이 그래. 내가 약점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게 있냐고? 당신에 대한사랑 빼고는 없어. 전혀.(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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