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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평점 :
김현진 작가의 [녹즙 배달원 강정민]을 읽었다. 제목만 보고 강정민이라는 젊은 청년이 녹즙 배달을 하며 겪는 삶의 노고와 성장을 그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런데 막상 첫 시작은 주인공 정민이 얼마나 술을 사랑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와 알콩중독자로 불릴 만큼 술을 마시게 된 연유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결핍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갓난애 때부터 갖고 있다. 처음에 그것은 조그만 구멍이지만,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게 될수록 점차 커지고, 그렇게 되면 찬 바람이 몰아칠 때 너무 시리기 때문에 모두 그것을 막을 무언가를 바삐 구하러 다니게 된다.(11)"
정민은 알코올 중독자 혹은 알코올의존증을 치료받기 위해 외래진료를 다니고 있다. 담당의 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하는 과정 속에 그녀가 왜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이 하나 둘 씩 펼쳐진다. 웹툰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정민은 교수님의 추천으로 게임 스타트업 회사에 취직하게 되고 그곳에서 원치 않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금 자료를 가져다 주며 섹시한 표현을 강요당하는 시간은 정민이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게 된다. 그러던 중 회식 중에 성추행을 당하며 홧김에 술병을 휘둘러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정민은 "술을 끊고 싶다, 그렇지만 두렵다. 술을 끊으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끊고 싶으면서도 끊고 싶지 않다. 끊고 싶다. 그렇지만 끊고 싶지 않다.(41)"는 양가감정을 느끼며 재취업을 준비하는 도중 녹즙 배달을 하게 된다.
보통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중년 쯤 되는 여성들의 일로 여겨진 건강음료 배달일에 젊은 아가씨가 뛰어들었으니 정민은 녹즙을 배달하는 도중 여기 저기서 '젊은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 '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등등 주제넘은 소리를 듣게 된다. 또한 녹즙 배달이 단순히 신청한 사람에게 배달만 하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새로운 고객을 유치해야 하고 경쟁사이 다른 녹즙 배달원 여사님과 유제품 음료 여사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고난이도의 사회생활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주인공이 30대 초반 여성이기에 겪어야만 했던 차별과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왕왕 얼굴이 화끈거렸다. 읽는 내내 나도 어디선가 이런 꼰대짓을 하지 않았을까?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이 차별을 당연시해왔던 사고에 익숙한 것은 아닐까? 란 자성을 하게 된다.
특히나 정민의 술친구 민주가 겪게 되는 데이트 폭력은 물리적 힘이 약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이 겪는 최악의 일이 아닐까 싶어, 지금의 젊은이들이 남초니, 여초니, 한남이니, 여혐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난 단초가 된듯 하다. 30대 여성이 취업 면접에서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어 없어도 곧 생기면 결혼도 하고 아이가 생길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며 업무상의 단절을 우려하는 기색을 표하기에 그럴일은 없다고 결혼도 아이도 낳을 생각이 없다는 정민의 답에 지금같은 저출산 시대에 비혼이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가르치려하는 면접관의 이중적인 잣대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실마리 조차 찾기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정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준희의 등장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구멍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준희의 헌신과 관심으로 정민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2리터 짜리 와인병을 과감하게 박살낼 수 있게 된다.
<"사람들 다 비둘기 싫어하지 않아요? 먹이 준다고 막 뭐가 그럴 수도 있는데."
할머니는 한 번 과자를 뿌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다 살겠다고 그러는데, 얼마나 이뻐. 살겠다고 하는 것들은 다 이뻐...."
이후로도 나는 사는 게 팍팍하다고 생각이 들 때면 그때 과자를 뿌리던 할머니 모습을 생각했다.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뻐. 물론 잘 살겠다고 악에 바친 사람들은 무섭지만 그저 살겠다는 것들은 이쁘다. 그리고 이제 함부로 비둘기가 징그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