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수록 산책 -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도대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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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작가의 [그럴수록 산책]을 읽었다. 부제는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이다. 오래전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연재하던 네 컷 만화처럼 도대체 작가 특유의 몽실몽실한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어 숲길을 산책하며 얻게된 소소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네 컷의 만화는 주인공이 걷고 마주하는 동물과 식물과 사람들을 함께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그래도 뭔가 더 채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저자의 솔직 담백한 글로 보충해준다.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지나쳐왔을 세상이 미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들에게 특별한 존재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이야기들은 산책이 주는 신비로운 치유의 힘을 증명해주는 것만 같다. 

걷기 하면 [걷는 사람 , 하정우]를 통해서 이 정도는 걸어줘야 어디 가서도 ‘나 좀 걷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데 그렇게는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도대체 작가의 책을 통해 나 같은 사람도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저도 좀 걷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Ambulare’는 ‘산책하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이다. 라틴어를 공부할 때 무한반복을 통해서 쉽게 입에 붙지 않고 잘 외워지지 않던 수많은 동사들 중에서도 유독 ‘산책하다’라는 단어는 단번에 머릿속에 박혔다. 아마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 교정을 수없이 거닐면서 그나마 감금된 생활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소소한 이야기까지 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보장된 시간이 바로 산책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혼자 걷는 시간이 많은 요즘은 그토록 지겹게만 느껴졌던 진입로의 반복된 길이 그리워지곤 한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금방 웃을 수 있었고, 같은 일에 분개하고 슬퍼하고 아쉬워했던 지금 나의 상태를 감출 필요도 괜찮은 척할 필요도 없었던 산책길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러고보니 그립다며 꼽은 곳들이 오히려 가장 힘들었던 시기들에 이었군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때의 저는 그 시간들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 몰랐습니다. 몇 년 후의 저는 현재의 어떤 장소와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까요? 미리 알 수 있다면 더 자주 찾아가고, 더 많이 추억을 쌓아놓으련만 말이죠.(93)” 

“동네 어느 집에서 담장 높이 허수아비를 달아놓았습니다. 도심 주택가의 허수아비는 흔치 않아서 이런저런 상상을 했는데, ‘뭐지, 주술적 의미라도 있는걸까?’ 알고 보니 바로 옆에 감나무가 있더라고요. 허수아비는 무언가를 지키려고 세우는거란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사람의 허세도 허수아비 같은 게 아닐까요? 진자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을 허수아비처럼 내세우는 것이죠. 요란한 허수아비를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지키지 못할까봐 두려운 건지도요.(102-103)”

“호기심이 생긴 저는 꿩에 대해서 찾아보았는데, ‘먹을 것을 찾아 산 아래로 내려왔다가도 오후 네 시가 되면 숲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꿩들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귀엽기도 했고요. 일하다가 과로하는 건가 싶을 때면 ‘꿩도 오후 네 시면 쉬는데...’ 생각하며 꿩 핑계를 대고 쉬기도 했답니다. 인간이 오후 네 시면 일을 접고 쉬기는 힘든 노릇이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는 꿩을 떠올려보세요! 먹을 것을 찾다가 ‘오후 네 시네? 돌아가자!’ 하고 총총걸음으로 숲으로 돌아가는 꿩 무리를 상상하다 보며 귀여운 마음과 함께 나도 좀 쉬자는 생각이 들 테니까요.(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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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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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작가의 [녹즙 배달원 강정민]을 읽었다. 제목만 보고 강정민이라는 젊은 청년이 녹즙 배달을 하며 겪는 삶의 노고와 성장을 그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런데 막상 첫 시작은 주인공 정민이 얼마나 술을 사랑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와 알콩중독자로 불릴 만큼 술을 마시게 된 연유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결핍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갓난애 때부터 갖고 있다. 처음에 그것은 조그만 구멍이지만,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게 될수록 점차 커지고, 그렇게 되면 찬 바람이 몰아칠 때 너무 시리기 때문에 모두 그것을 막을 무언가를 바삐 구하러 다니게 된다.(11)"


정민은 알코올 중독자 혹은 알코올의존증을 치료받기 위해 외래진료를 다니고 있다. 담당의 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하는 과정 속에 그녀가 왜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이 하나 둘 씩 펼쳐진다. 웹툰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정민은 교수님의 추천으로 게임 스타트업 회사에 취직하게 되고 그곳에서 원치 않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금 자료를 가져다 주며 섹시한 표현을 강요당하는 시간은 정민이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게 된다. 그러던 중 회식 중에 성추행을 당하며 홧김에 술병을 휘둘러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정민은 "술을 끊고 싶다, 그렇지만 두렵다. 술을 끊으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끊고 싶으면서도 끊고 싶지 않다. 끊고 싶다. 그렇지만 끊고 싶지 않다.(41)"는 양가감정을 느끼며 재취업을 준비하는 도중 녹즙 배달을 하게 된다. 


보통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중년 쯤 되는 여성들의 일로 여겨진 건강음료 배달일에 젊은 아가씨가 뛰어들었으니 정민은 녹즙을 배달하는 도중 여기 저기서 '젊은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 '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등등 주제넘은 소리를 듣게 된다. 또한 녹즙 배달이 단순히 신청한 사람에게 배달만 하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새로운 고객을 유치해야 하고 경쟁사이 다른 녹즙 배달원 여사님과 유제품 음료 여사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고난이도의 사회생활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주인공이 30대 초반 여성이기에 겪어야만 했던 차별과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왕왕 얼굴이 화끈거렸다. 읽는 내내 나도 어디선가 이런 꼰대짓을 하지 않았을까?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이 차별을 당연시해왔던 사고에 익숙한 것은 아닐까? 란 자성을 하게 된다. 


특히나 정민의 술친구 민주가 겪게 되는 데이트 폭력은 물리적 힘이 약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이 겪는 최악의 일이 아닐까 싶어, 지금의 젊은이들이 남초니, 여초니, 한남이니, 여혐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난 단초가 된듯 하다. 30대 여성이 취업 면접에서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어 없어도 곧 생기면 결혼도 하고 아이가 생길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며 업무상의 단절을 우려하는 기색을 표하기에 그럴일은 없다고 결혼도 아이도 낳을 생각이 없다는 정민의 답에 지금같은 저출산 시대에 비혼이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가르치려하는 면접관의 이중적인 잣대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실마리 조차 찾기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정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준희의 등장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구멍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준희의 헌신과 관심으로 정민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2리터 짜리 와인병을 과감하게 박살낼 수 있게 된다. 


<"사람들 다 비둘기 싫어하지 않아요? 먹이 준다고 막 뭐가 그럴 수도 있는데."

할머니는 한 번 과자를 뿌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다 살겠다고 그러는데, 얼마나 이뻐. 살겠다고 하는 것들은 다 이뻐...."

이후로도 나는 사는 게 팍팍하다고 생각이 들 때면 그때 과자를 뿌리던 할머니 모습을 생각했다.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뻐. 물론 잘 살겠다고 악에 바친 사람들은 무섭지만 그저 살겠다는 것들은 이쁘다. 그리고 이제 함부로 비둘기가 징그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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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화가들 -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아주 특별한 미술 수업
정우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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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철 도슨트의 [내가 사랑한 화가들]을 읽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명화들을 남기고 떠난 화가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알폰스 무하, 프리다 칼로, 구스타프 클림트, 툴루즈 로트레크, 케테 콜비츠, 폴 고갱, 베르나르 뷔페, 에곤 실레 등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그리고 그림만 봐도 누구의 작품인지 알려진 화가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와 그들의 사랑 이야기와 생의 마지막 모습도 그려진다. 생전에 유명세를 얻고 그림이 잘 팔려 생활고를 겪지 않은 화가도 있지만 대부분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시대를 앞서간 화풍으로 인해 비평가들의 신랄한 비판을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한 작가들도 많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현재의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낯선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창조적인 이들은 대부분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사람들은 음악과 미술과 책 등에서 기존의 틀을 벗어난 시도를 선보이는 새로움을 원하지만 막상 그렇게 몹시도 낯설고 익숙하지 않고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과 마주하게 되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 간주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활용하며 난도질을 서슴치 않곤 한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게 되면 그 낯선 것들이 주는 신선함에 사람들은 매료되어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만약 이 화가들이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는 그림만 그리며 편안한 일상을 살아가고자 했다면 아마도 지금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들어보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이들이 생전에 그림을 그리며 불과 100년 후에 자신의 그림이 이렇게 엄청난 가격으로 매매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은 오래된 고전들을 작품에 대한 저작권도 자유로워져 다양한 출판사와 다른 번역가의 출판도 가능하고 원하기만 한다며 불후의 명작들을 누구나 손쉽게 집에서 읽을 수 있는 데 반해, 미술 작품들은 미술관처럼 공공 전시가 되는 작품들을 제외한 개인 소장한 작품들은 어쩌면 그 소장가가 죽을 때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기도 한다. 분명 명화를 그린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져 화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책으로 프린팅된 흐릿한 화질로나마 명화를 접할 수 있고 화가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싶다. 특히나 모딜라이니가 열네 살의 연하 잔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는 감동을 더해 준다. 모딜리아니가 잔의 초상을 그릴 때에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그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겠다고(78)”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에는 예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눈동자가 선명하다. 이 작품을 보고 잔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83)” 

또한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난 판화가 케테 콜비츠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유화가 아닌 판화를 선택하여 대량 생산을 하고 대중들이 미술을 쉽게 접하도록 한다. 콜비츠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판화로 만들고 전쟁의 비극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투사가 된다. 콜비치의 아들 그리고 손자가 전쟁에 참여하여 죽게 되는 비참한 일을 겪게 되고 나치에 맞서 평생을 투쟁하게 된다. 
“만약 그냐가 살아 있어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그 밖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녀의 작품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의지를 다질 수 있을까요?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감상이 존재하겠지만 ‘자신의 삶과 재능으로 그저 개인의 만족만 추구해도 괜찮은 걸까?’ 라는 한 가지 질문만큼은 모두가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질문에 이미 힌트를 주었던 콜비치의 말로 모범 답안을 대신해볼까 합니다. ‘나는 이 시대에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싶다.’(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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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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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수록작에는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김지연 [사랑하는 일], 김혜진 [목화맨션],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서이제 [0%를 향하여], 한정현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이렇게 일곱 작품이다. 이번 작품들도 인간 성에 대하여, 퀴어와 차별에 대한 소재들이 많았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몇 년 째 비슷한 형태의 소재들이 반복되며 다양한 분야의 시도가 이어지는 이유는 새롭게 불거진 문제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부터 인간 삶 안에서 중요한 화두였다는 점이다. 심각하게 논의되고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게 뻔하고 행여나 감정만 상하는 논의가 되지 않을까 싶어 애써 멀리하며 애둘러 감춰왔던 고민들이 여기 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이제는 숨긴다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잊혀진다고 치부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허구임에도 어디선가 마주칠 나의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의 주인공 나와 연수는 대학교 2학년 때 수강했던 교양과목의 젊은 교수 장 피에르에게 푹 빠져 그가 유학했던 파리로 배낭여행을 떠나 흠모하는 교수와의 만남을 갖는다. 하지만 장 피에르는 나와 연수가 생각하듯이 애수에 가득찬 매력만점의 남자가 아니라 그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생운동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은 부모에 의해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험버트 험버트처럼 연수에게 보인 행동으로 나는 더 이상 장 피에르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고 훗날 비슷한 광경을 행정직원으로 일하는 연구소에서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장 피에르와 같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이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가정의 형태에 대한 고착된 생각을 주인공 나의 시선으로 철저히 부정하려 한다. “그들은 아침밥을 차려주는 전업주부 아내와 두 명의 자녀로 구성된 4인 ‘정상 가족’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여기는 2020년대의 희귀종이었다. 하얗고 천진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특권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인 양 여겼다.(12)” 

[나뭇잎이 마르고]에서 앙헬과 체는 대니를 중심으로 알게 된 사이다. 대학교 선후배이지만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학교 옥상에서 ‘마음씨’라는 이름으로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체는 어릴 때 할머니가 안고 있다가 떨어뜨려 한 쪽 다리가 짧은 장애와 부정확한 발음을 갖게 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때도 체는 상대의 속도에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85)” 라는 구절처럼 언제나 당당했다. 사실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짓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소설 속이 체가 조금 멋져 보였다. 체는 동성인 앙헬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앙헬은 체의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체와 지내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를 ‘힘의 우위’에서 찾는다. 

“타당한 이유없이 나무를 마르게 한 존재는, 마찬가지로 마땅한 이유 없이 병든 사람을 낫게 합니다. 그 이유의 공백 앞에서는 원인을 밝히려는 것, 이유를 찾으려는 것, 그걸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어쩌면 교만일 수 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소설을 쓰는 마음가짐과도 관련된 일입니다. 저에게 소설은 ‘왜’라는 질문의 소용돌이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세상의 틀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소설은 그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저에게 되돌려줍니다. 이유를 묻고 그 답을 찾으려는 간절함만큼이나 답을 모르고 사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답이 없다는 것의 기쁨을 배우라고 합니다.(112)”

[사랑하는 일]에서는 동성커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과의 갈등이 그려진다. 빌라를 물려받기 위해 억지스레 아빠와와의 만남을 가진 은호와 영지는 술을 마시며 아빠를 발라버리려고 하지만 결국 터진 아빠의 잔소리와 현실을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그만 은호는 패륜아같은 독한 말을 내뱉으며 상처를 입게 된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하고 엄마는 이모가 있는 캐나다로 떠나며 은호와 영지에게 이곳에서 살기 힘들면 자신에게 오라는 말로 은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은호는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목화맨션]에 나온 만옥과 순미는 김혜진 작가의 주된 과제인 사회적 약자들의 대한 시선을 다시 한 번 집중시킨다. 어떻게 한 번 인생역전은 아니더라도 넉넉한 살림살이를 바라며 구입한 목화맨션 101호는 좀처럼 재건축 결정이 내려지지 않고 세입자 순미와의 재계약을 연장하고 종국에는 파기하며 가냘픈 이웃의 정 또한 끊어지고 만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환경을 가진 아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울고불며 때를 모습에 당신이 어린 시절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아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엄마의 간절함이 결국에는 아들의 경쟁자는 쨉도 안될 만큼의 게임실력을 얻게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 당신의 노력에도 엄마라는 단어가 사랑하는 아들의 세계에서는 욕으로 쓰이는 감당못할 현실을 마주하는 씁쓸한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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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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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T]를 읽었다. 그야말로 반은 글이고 반은 티셔츠 사진이 다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는 작가들이 이런 책을 낸다면 과연 얼마나 팔릴 수 있을 것인지란 생각이 먼저 들게 만드는.. 그럼에도 하루키니까 용서가 된다는, 그리고 하루키만이 이런 식의 에세이에서도 하루키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정반대의 생각도 들었다. 하루키스트들에게는 맹목적으로 그의 책을 구입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기에 앞 뒤 재지 않고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하루키의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무조건 주문을 누르게 되지 않나싶다. 그럼에도 본국에서는 어떻게 출판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하루키 신간이 나왔으니 뽕을 뽑듯이 양장커버에 두꺼운 고급 종이를 사용한 것은 오로지 티셔츠 사진을 잘 보이기 위함이려나? 양장본이기에 책장에 꽂아두면 그럴듯한 폼이 나기는 하지만 페이지 수에 걸맞게 문고본으로 간출하게 나왔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하루키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티셔츠를 모아놓을 생각을 했을까? 얼마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퀴즈에 나와서 2만권에 달하는 책과 그 외 수집품을 놓을 아카이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새로운 책을 구입해 책장에 꽂으려고 했는데 똑같은 책이 있음을 발견할 때의 아쉬움 또한 토로했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느 작가는 소장하고 있는 책이 너무 많아서 원하는 책을 찾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알고 그 책을 소장하고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책을 새로 사서 본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중독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부럽고 존경스럽다. 


하루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티셔츠 중에서 자동차, 음악, 술, 음식, 동물, 운동 그리고 책 등과 구분지어 분류하고 이야기를 전해준다. 하루키가 구입한 티셔츠의 상당 부분은 하이와 섬에서 1달라 정도의 값을 지불하고 산 것이라 전한다. 그가 소개한 티셔츠는 명품은 단 하나도 없고 어떤 행사의 기념품이나 단체티 같은 것들도 상당수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그가 한 번도 입지 못하고 그저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도 대다수이다. 하루키의 책 중에 다른 나라에서 출판된 기념으로 받게 된 그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는 하루키 자신이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몹시나 난처한 일이라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어디서든 그런 티셔츠를 하나 구입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다. 


책의 표지로 사용된 티셔츠의 문구는 "KEEP CALM AND READ MURAKAMI"라고 씌어 있다. 어디선가 하루키의 출판 기념회를 갖는 곳이 한적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싶어지는 최상의 환경 중의 하나는 의외로 에메랄든 빛 바다물결이 너무나도 투명해 육안으로도 작은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해안가의 모래사장 앞에 놓여진 썬베드에서 그늘진 오후가 아닐까 싶다. 또 하나의 그럴듯한 곳은 추적추적 비가 내려 어두컴컴해진 어느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빗물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페이지를 넘길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스탠드 불빛에만 의지해 오로지 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제일 좋기는 하다. 이러나 저러나 하루키가 마우이섬에서 1달러에 산 티셔츠에 새겨진 'TONY TAKITANI'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생각하다 소설을 쓰고 나중에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기이한 운명은 누구라도 그가 천상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위스키와 달리기를 좋아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하루키가 일흔이 넘도록 롱런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소피스티케이션(sophistication), 트와이스 업, 라프로익, 데포르메, 디거맨, 비벤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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