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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록 산책 -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도대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평점 :
품절
도대체 작가의 [그럴수록 산책]을 읽었다. 부제는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이다. 오래전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연재하던 네 컷 만화처럼 도대체 작가 특유의 몽실몽실한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어 숲길을 산책하며 얻게된 소소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네 컷의 만화는 주인공이 걷고 마주하는 동물과 식물과 사람들을 함께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그래도 뭔가 더 채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저자의 솔직 담백한 글로 보충해준다.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지나쳐왔을 세상이 미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들에게 특별한 존재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이야기들은 산책이 주는 신비로운 치유의 힘을 증명해주는 것만 같다.
걷기 하면 [걷는 사람 , 하정우]를 통해서 이 정도는 걸어줘야 어디 가서도 ‘나 좀 걷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데 그렇게는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도대체 작가의 책을 통해 나 같은 사람도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저도 좀 걷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Ambulare’는 ‘산책하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이다. 라틴어를 공부할 때 무한반복을 통해서 쉽게 입에 붙지 않고 잘 외워지지 않던 수많은 동사들 중에서도 유독 ‘산책하다’라는 단어는 단번에 머릿속에 박혔다. 아마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 교정을 수없이 거닐면서 그나마 감금된 생활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소소한 이야기까지 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보장된 시간이 바로 산책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혼자 걷는 시간이 많은 요즘은 그토록 지겹게만 느껴졌던 진입로의 반복된 길이 그리워지곤 한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금방 웃을 수 있었고, 같은 일에 분개하고 슬퍼하고 아쉬워했던 지금 나의 상태를 감출 필요도 괜찮은 척할 필요도 없었던 산책길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러고보니 그립다며 꼽은 곳들이 오히려 가장 힘들었던 시기들에 이었군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때의 저는 그 시간들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 몰랐습니다. 몇 년 후의 저는 현재의 어떤 장소와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까요? 미리 알 수 있다면 더 자주 찾아가고, 더 많이 추억을 쌓아놓으련만 말이죠.(93)”
“동네 어느 집에서 담장 높이 허수아비를 달아놓았습니다. 도심 주택가의 허수아비는 흔치 않아서 이런저런 상상을 했는데, ‘뭐지, 주술적 의미라도 있는걸까?’ 알고 보니 바로 옆에 감나무가 있더라고요. 허수아비는 무언가를 지키려고 세우는거란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사람의 허세도 허수아비 같은 게 아닐까요? 진자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을 허수아비처럼 내세우는 것이죠. 요란한 허수아비를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지키지 못할까봐 두려운 건지도요.(102-103)”
“호기심이 생긴 저는 꿩에 대해서 찾아보았는데, ‘먹을 것을 찾아 산 아래로 내려왔다가도 오후 네 시가 되면 숲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꿩들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귀엽기도 했고요. 일하다가 과로하는 건가 싶을 때면 ‘꿩도 오후 네 시면 쉬는데...’ 생각하며 꿩 핑계를 대고 쉬기도 했답니다. 인간이 오후 네 시면 일을 접고 쉬기는 힘든 노릇이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는 꿩을 떠올려보세요! 먹을 것을 찾다가 ‘오후 네 시네? 돌아가자!’ 하고 총총걸음으로 숲으로 돌아가는 꿩 무리를 상상하다 보며 귀여운 마음과 함께 나도 좀 쉬자는 생각이 들 테니까요.(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