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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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경청]을 읽었다. 주인공 임해수 상담가는 센터에서 일하며 TV프로그램에도 나오는 유명한 박사님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방송에서 어떤 배우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내뱉은 두달 후에 그 배우가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여 그녀의 삶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누리꾼들은 주인공이 그 배우를 죽였다고 선동하며 악플을 단다. 설상가상으로 센터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는 악의적인 증언을 하고 남편 태주와도 이별하게 된다. 홀로 남겨진 해수는 가장 친한 친구 주연의 위로와 조언을 마다하다가 결국 주연과도 소원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해수는 그 배우의 죽음 이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지내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황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해수는 매일 매일 변호사에게, 센터 소장에게, 친구 주연에게, 배우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행여나 자신을 알아보는 이웃을 만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길을 나서다 길고양이 순무와 까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길고양이를 지켜보던 가운데 초등학생 황세이를 만나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임해수가 어떤 말을 방송에서 했기에 배우를 자살에 이르기까지 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이후 주인공을 살인자로 매도하며 이미 얼굴까지 알려졌기에 그녀의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까지 이르고 길고양이 순무를 매개로 가까워진 초등학생 세이와의 만남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이다. 특별한 반전이나 놀란만한 전개도 없이 그저 한 계절을 지나는 동안에 해수와 길고양이 순무는 동일시되며 그들을 치유하는 것은 어떤 기적이나 놀라운 수술의 힘이 아니라 그저 단지 그들의 삶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봐주는 경청임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은 참 이상한 존재이다.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막상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 또한 힘들어한다.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담되고 불편하면서도 막상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산다. 언젠가 어떤 연예인이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서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진행자들은 그 연예인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웃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기PR의 시대가 도래한지 한참되었고 이제는 관종이라는 말까지 생겨나서 대놓고 SNS에 자신의 일상을 공개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일하고 쉬는 것까지 힙하고 센스넘치고 스웩이 담긴 컷을 만들기 위해서 작위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단편적인 한컷을 만든다고 해서 실제 자신이 변하는 것은 아님에도, 때로는 아무런 수익이 생기지 않음에도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결국은 제발 나좀 바라봐 달라는 구애의 손짓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문제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컷과 뭔과 기괴하고 유별난 아이디어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단 1초 이상도 관심을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고양이 순무의 앞발이 퉁퉁 부어오르고 몰골이 점첨 흉측해져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아니 차라리 안쓰러운 표정이라도 한 번 지으면 나을텐데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흔히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짐승은 본능에 따르는 행동을 할 뿐 인간처럼 의도적인 흉악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짐승의 행동은 생존을 위한 자연적인 순리의 하나일 뿐이다. 당연히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의 삶과 견주게 되었을 때는 저급한 단계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짐승의 본능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해수의 말실수와 길고양이 순무의 경계심은 어떻게 견줄 수 있을까? 


해수의 무력한 나날 속에 등장한 초등학생 세이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피구 연습을 하며 폭언과 폭력에 매번 상처를 받으면서도 세이는 해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리어 학교에서 피구 연습을 하는 세이를 보러온 해수에게 학교에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상담가로서의 이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때문인지 해수는 세이를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순무의 구조를 위해서 세이와 함께 할 뿐이다. 피구 대회가 열리는 날 해수는 세이의 경기를 보기 위해 학교에 가고 그곳에서 세이를 괴롭히는 아이의 엄마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피구 경기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세이는 그동안의 울분을 토로하듯이 괴롭히던 아이와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해수는 개입하지 않는다. 생과 사를 오가는 순무가 체력을 되찾고 수술을 받아 세이의 품에 다시 안기도록 해수는 묵묵히 세이의 고백을 기다려준다. 그리고 해수는 세이와 함께 순무를 구조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상담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고 첫 내담자로 세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나이와 직업과 상황 그리고 심지어 종이 다른 인간과 동물을 떠나 상처받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끝이 없는 기다림의 관심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기나긴 기다림의 완성은 과거의 멀쩡한 시간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사건이 있기 전과 그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임을 해수와 세이 그리고 순무를 통해 알려준다. 


"이런 대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가 한동안 경험하지 못했고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장벽 없는 소통.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장애물이 없다.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드럽게 방향을 틀고 서로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말들이 완강하게 닫힌 내면의 문을 열고, 서로의 내면 깊숙이 진입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꼭 닮은 말을 길어 올린다. 

꾸밈이 없는 말,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걸치지 않은 말. 의도도, 저의도, 악의도 없는 말.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말. 아무런 빛깔도 모양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말들.(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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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
도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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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리 작가의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를 읽었다. 부제는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이다. 갓생, 배민맛, 방꾸미기, 랜선 사수, 중고 거래, 안읽씹, 사주 풀이, 데이트 앱, #좋아요, 이렇게 9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현대인이 중독된 주제들이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지금 시대의 가장 핫한 이슈들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이슈라는 것이 뉴스메인을 도배하는 그럴듯한 화제가 아니라 그냥 한 개인인 나에게 있어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될 무엇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이 중에 어느 것에 중독되어 있나 따져보니 아예 한 번도 안해본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개인적인 감상을 표출하거나 격력한 공감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요즘엔 “SNS를 하는 사람이 관종이 아니라, 안 하는 사람이 오히려 별종(202)” 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렇게 많은 중독 주제 중에 내게 해당되는 내용이 없다는 게 어쩌면 나도 별종이거나 이미 상 꼰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중에서 하나라도 하지 않는다면 술이나 커피나 담배 중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 사람이 귀엽거나 예쁘거나 잘생겼거나 말발이 좋거나 직업이 특이하다면 대단한 금욕주의자처럼 보인다. ‘아, 아깝다. 저 정도면 팔로워 5만 명에 좋아요 100개쯤은 금방 땡길 텐데.’(202-203)”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싸이월드 세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그때에 관종이 되고자 하는 열정을 다 써버린 것인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시시한 일상을 드러내는 것이 점점 싫어지는 것인지? 50대 중반 이후의 어머니들 사진첩에는 온통 꽃 사진만 잔뜩이라고 하던데, 사람보다 자연이 더 예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에 다가오는 깨달음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뭔 자신감으로 그렇게 대놓고 셀카 사진도 올리고 그랬는지. 지금보면 쥐구멍이 들어가고 싶어지는 사진과 감성 오지게 터지는 글들을 보면 한 때 나도 이런 젊음을 드러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더불어 피싱 같은 범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도 아직 2G폰을 쓰고 있던 터라 부모님이 스마트폰으로 변경한다는 얘기를 듣고 괜히 이상한 문자가 왔을 때 눌러서 사기 당하지 않게 그냥 구형 폰을 쓰는게 어떻겠냐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적이 있었다. 내딴에는 괜히 억울한 일을 당하실까 걱정되 한 말이었는데, 나의 대답이 얼마나 서운하셨는지 한동안 전화조차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행동과 말이 참으로 어리석고 이기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한 살이라도 더 젊으실 때 새로운 것들을 보여드리고 잘 적응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할 텐데, 어찌보면 노년의 삶에 대한 무미건조함이 내 생각의 일부이지 않았나 싶다. 나의 어리석었던 행동에 질타를 가하는 일들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일어난다. 노약자석에 앉으신 어르신들이 거의 대부분 스마트폰을 들고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뉴스 기사를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번 손에 쥐었다 하면 쉽사리 놓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샤워할 때에도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 시청이 가능하도록 방수기능까지 강화되었으니, 이제 스마트폰을 떠나는 시간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인터넷 뱅킹은 PC로 하는 것이 더 수월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은행들이 모바일 버전의 보안을 강화해서 그런지 앱을 구동하면 몇 번 클릭으로 손쉽게 이체가 가능해졌다. 사실 가장 최신형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도 자주 사용하는 앱은 몇개 되지 않는다. 안읽씹의 내용에 나오는 것처럼 전국민이 사용하는 깨톡의 경우 앱 상당에 빨간 숫자가 써 있으면 뭔가 맘이 편치가 않다. 광고든 단톡방이든 어서 빨리 대화방을 열어서 그 숫자를 없애고만 싶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 숫자를 없애는 강박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앱에도 아직 읽지 않음을 표시하는 숫자가 표기되어 있으면 마치 남겨진 숙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앱에 떠 있는 숫자는 내게 딴짓하지 말고 어서 빨리 숙제를 하라고 다그치는 것만 같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생긴 이상한 증상이다. 


“임원이나 고용주에게 대체 불가 노동자란 결국 프리미엄이 붙은 부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부품으로서의 노동자는 마모(번아웃)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성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만, 임원과 고용주를 능가하는 순간 임원과 고용주의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인간이 비인간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호감도도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를 자극하게 될 것이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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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총을 쏴라 - 제8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김경순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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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작가의 [장미총을 쏴라]를 읽었다. 제8회 황산벌청년문학사 수상작이다. 우리나라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다른 나라 소식은 아마도 미국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뉴스 보도 중에 마치 주기적으로 우리의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비극적인 소식은 총기난사이다. 사상자가 많은 사건만 보도되서 그렇지 실제로 거의 매일 총기사고가 난다고 한다. 도대체 그런 살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된 곳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막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룰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거의 대다수가 군복무 기간 중에 총기를 다뤄봤기 때문에 총이 가진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실탄이 지급되지 않는 평소에는 짐처럼 느껴지는 총기가 실사격시 얼마나 큰 긴장감을 조성하는지 모른다. 헐리우드 액션과 홍콩 르와르 영화처럼 자유자재로 총을 다루기는 쉽지 않다. 생각보다 반동이 꽤 커서 제대로 견착하지 않으면 과녁을 맞추기는 커녕 엄한 곳에 발사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마무시한 총을 사람을 향해 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제정신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주인공 한옥인은 언론고시에 도전한 삼수조차 떨어지자 울며겨자먹기로 ‘건’이라는 잡지사에 지원하게 된다. 건강의 건도 건축의 건도 아닌 건은 ‘GUN’을 뜻한다는 것을 면접을 통해 알게 된 옥인은 석달 동안의 인턴 기간을 진명유와 함께 보내게 된다. 옥인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현은 재소자와의 면담을 통해 추리소설의 소재를 얻곤 했기에 옥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처럼 평범해 보이는 여자가 어떻게 두 명이나 총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옥인은 자신이 두 명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으로 자해를 시도하기도 하고 현에게 사건의 정황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기도 한다. 현이 전해주는 옥인의 이야기는 옥인이 취준생으로 간신히 입사한 비밀스러운 잡지회사 건에서 사장과 부장과 차장의 은밀한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총기 밀매의 중개자로 이용당하고 종국에는 길 고양이를 목표물로 한 건 배틀에서 장미총을 겨두다 실수로 과녘 가까이에 다가온 사장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발사고가 났으며 그로 인해 차장이 옥인을 밀매한 신형 K2로 겨누자 정당방위로 차장에게 총을 발사하 것으로 이해한다. 


국선변호사 또한 옥인의 억울한 사정에 동감하며 백방으로 형량을 낮추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건 배틀 현장에 있었던 부장과 진명유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단독주택을 사무실로 사용한 건 잡지사도 하루아침에 개인 소유로 변경되었고, 특히나 건 잡지사 시절 지하창고에 도서관처럼 진열되어 있던 많은 자료들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무엇보다도 옥인이 사장과 차장을 죽인 장미총이 발견되지 않아 옥인은 1심에서 20년 형을 언도 받는다. 현은 옥인이 고의로 사장과 차장을 죽이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국선변호사에게 옥인이 건 잡지사를 다녔던 흔적과 건 배틀이 열리기까지의 정황들을 보낸다. 재심에서 옥인은 정황증거가 채택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고 현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며 외국으로 떠난다. 


현은 옳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옥인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다가 수년 전에 사용된 건 잡지사 영수증에 쓰인 필체와 옥인의 노트에 쓰인 필체가 같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현이 옥인의 필체를 확인하는 장면은 마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가 다리를 절다가 갑자기 똑바로 걷는 것과 '식스센스'의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유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견줄만큼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반전을 보여준다. 책의 띠지에 "우리 소설사는 강력한 반전(反戰) 소설과 정교한 반전(反轉)소설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라고 씌어 있는데, 옥인이 복수를 행하고도 무사히 풀려나기 위한 반전의 시나리오를 갖고 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속였다는 것과 우리나라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총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강력한 무기 소유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적절히 융화시키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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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22학번
구하비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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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비 님의 [하버드 22학번]을 읽었다. 지금은 공교육과 더불어 사교육 또한 합법적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과외를 비롯한 사교육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성적을 더 올리고 싶었던 있는 집 자식들은 몰래 과외를 받다가 걸려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드러내며 과외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학원을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부모도 자녀들도 시간과 돈을 허비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모두가 학원을 가지 않는다면, 아니 입시를 위한 학원만 사라진다면 요즘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흙장난을 하게 될까? 학원은 물론 요즘은 결석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예전에는 마치 헬스클럽에서 할인되는 몇 개월짜리 정기권을 끊어놓고도 일주일에 한 번 갈까말까 하는 곳이기도 했다. 부모 돈이 썩어나가는지도 모르고 학원 정기권을 끊어놓고 자유의 시간을 만끽한 이들이 꽤 많았고 그러다보니 학원 주위에는 공부를 하러 오는 애들 만큼이나 놀러오는 애들도 많았다. 학원비에 학원에서 요구하는 학습지에 저녁을 사먹고 중간에 간식도 먹어야 하니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예전에도 꽤나 큰 지출을 필요로 했다. 그래도 과거에 다행이었던 것은 학원을 다니지 않고 학교 정규과정만 밟아도 본인만 열심히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미 대다수의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해온 것을 학교 선생님들도 알고 있기도 하고 학교 공부만으로는 성적을 올리리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학벌지상주의의 만연과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아주 옛말이 되어버린 재물과 계급의 세습화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어느 아파트에 사는 것을 구분할 정도로 팽배해졌다. 마치 경력직만을 요구하는 구인광고를 보고 초짜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면 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뒷배가 없다면 출세를 하고 가세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희망이 사라진 세대에게 성실함과 정직함은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고 어떻게든 불법에 해당되지 않는 방법으로라도 돈을 벌거나 성공하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렸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란 노랫말이 담긴 유행가가 인기를 누릴 때 군생활을 했던 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인 이들에게 자신들이 보낸 기간의 반밖에 안되는 기간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월급을 받는 환경을 비교하며 ‘뭐가 힘드냐고’ 따지듯이 묻곤 한다. 이건 꼭 꼰대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것과 지금을 비교하면 누구나 그런 얄팍한 보상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고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지금의 세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에게는 과거의 세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월급을 아무리 많아 받아도 군복무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어도 생면부지의 남과 함께 의무적으로 보내는 기간은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대를 살던 분들은 지금처럼 배부른 시대의 젊은이들이 보이는 나태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굶어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1차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부르다고 행복하지 않는다. 집에서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가까운 친구가 SNS에 올린 인싸들이 다니는 카페에 가지 못해서 신경질이 난다. 또 신상백을 들고 해외의 멋진 휴양지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면 나만 불행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지금의 세대에게 이런 것들을 완전히 외면하고 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향을 받고 싶지 않지만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관종과 자기과시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류에 들지 못하면 그동안 내가 쌓아놓은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핵심적인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으면 좋겠고 남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마치 적선하듯이 하나씩 알려줄 때 남모를 쾌감을 느낀다. 당연히 정보를 먼저 캐치하는 자는 권력자의 근방에 머물 수 있는 허가를 받았음을 으스대며 자신에게 줄 댈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계급사회에서 역시나 정직함과 성실함은 무기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다. 약은 청지기처럼 제 때에 줄 것을 주고 속일 만큼 속이며 제 것을 챙기면 오히려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로 인해 우직하게 한 길만 걷는 이가 외면 당할 때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일지만 되돌릴 길은 전무하다. 그냥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혐오했던 모습을 뒤따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소설 속의 구하비가 자퇴서를 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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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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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편혜영 [포도밭 묘지], 김연수 [진주의 결말], 김애란 [홈 파티],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이렇게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번 수상집에도 근래에 읽었던 장편소설의 저자들이 많아서 반가웠고, 작가들의 개성이 듬뿍 담긴 다양한 필체의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짧은 단편들이 끝나면 저자들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몇 페이지가 걸쳐 이어지고 소설을 읽는 동안에 이해되지 않거나 의문을 가졌던 부분들이 평론가들과 소설가들의 리뷰로 어느 정도 해소되며 뭔가 한과목의 어려운 과제를 마무리하는 것 같은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대상을 받은 [포도밭 묘지]는 상고를 졸업한 4명의 여고 동창들의 이야기이다. 한오라는 잘난 척, 아는 척 하는 친구의 이야기부터 시작되어 수영과 윤주 그리고 화자인 ‘나’까지 이렇게 4명이 대학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졸업하자마자 또는 졸업하기 전부터 각자의 직장생활을 하며 나중에 한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봉안당을 방문하는 도중에 이미 시들어버린 포도밭을 지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지금의 청년 세대가 특히 취업을 앞둔 20대 여성이 읽는다면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 밖에 없는 불합리한 시대적 정황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래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그런 학력에 대한 차별이 존재해왔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제는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장녀라는 이유로 부모들이 대학진학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을 갈 수 없는 형편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고, 스스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몸을 갈아넣을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 노력에 대한 응당한 박수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소설 속의 한오처럼 말이다. 한오의 부단한 노력에도 오전 근무를 마치고 안 좋은 컨디션으로 견디다 못해 휴게실에서 쓰러진 것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죽음에 이른 장면이 근래에 꽃다운 나이로 노동 현장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청년과 오버랩되어 못내 가슴이 아파온다. 


[진주의 결말]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다 기나긴 병간호와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인생에 회의감을 느낀 딸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설상가상으로 불까지 지른 유진주에 대한 방송국의 다큐프로그램과 그 프로그램에 조언을 해주는 범죄심리학자와의 이야기이다. 이미 범죄자의 정황이 밝혀진 유진주에 대한 방송은 좀 더 자극적인 내용을 추가하기 위해 화자인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미 경찰의 조사에 따라 범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방송이후 유진주에게 메일을 받게 된다. 존경해온 그가 방송에서 유진주 자신을 언급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지만 ‘나’가 추정한 내용들은 틀릴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같은 달을 보더라도 달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가지 때문이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달에 가려고 선택한 길이 처음부터 틀렸기 때문에 이어지는 추정들도 틀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는 유진주가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기 위한 메일이라고 생각하며 방송국 PD가 유진주와의 제주에서의 만남을 거부하지만 얼마 후 경찰에서 밝힌 사건의 전개는 유진주의 범행이 아님이 드러난다. 


[홈 파티]는 연극배우 이연이 후배 성민의 제안으로 오대표의 집에 모이는 사적인 모임에 초대받아 식사하는 도중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이미 사회적 성공과 부를 이룬 오대표, 서, 박, 김은 이름 없이 성으로만 불린다.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그들과 친분을 쌓은 성민은 실제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의 낯부끄러운 일은 밝히지 않고 오대표를 비롯한 이들과의 사적인 모임이 자신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이연과 성민은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오대표를 비롯한 모임의 다른 이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저자의 다른 소설에서 나온 표현들을 예로 든 리뷰에서 말하듯이 현대의 새로운 계급은 명품가방이나 옷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피부와 치아를 통해 드런난다는 것처럼 연극배우 이연 앞에서 박과 김은 아주 오래 전에 연극 동아리를 했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희곡 보이체크의 한 부분을 언급한다. 이연은 그들이 자신의 직업을 깍아내리지는 않지만 틀린 부분을 지적하지 못하며 애써 이사직의 역할을 연습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오대표가 고아원에서 만18세가 되어 시설에서 나갈 때 주어진 오백만원의 자립정착금으로 아이들이 명품가방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연은 이사직을 맡은 역할을 내려놓고 이연과 성민과도 같은 입장의 이들을 대변하게 된다. 배고픈 거야 어디서든 혼자 대충 때우며 가난을 숨길 수 있겠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것인 명품 가방으로나마 가장 쉽게 가난을 감추고 싶은 것이 아니었냐고 말이다. 


[일시적인 일탈]은 개구리 공포증이 있는 ‘나’가 K라는 준서 엄마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준서 엄마는 대학 강사이자 작가로서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다보니 준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고 ‘나’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화자는 준서 엄마의 작업실을 평일이 함께 쓸 수 있도록 제안 받고 캘리그래피를 연습하게 된다. 그곳에서 화자는 준서 엄마가 쓰다만 소설과 글을 읽게 되고 나중에는 그녀가 남긴 책들을 읽기 시작한다. 준서 엄마의 갑작스러우 죽음 이후 화자가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남편에게 캘리그래피 교실을 열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과연 준서 엄마라는 존재가 화자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진다. 준서 엄마의 작업실은 화자가 빌린 곳이었고 그곳에서 화자는 개구리 공포증을 극복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화자인 ‘나’가 우연히 일본인 친구 아야를 만나면서 우연과 확률의 계산으로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며 나눈 대화와 소설과 논문을 소재인 성수대교 붕괴를 빗댄 이야기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의 역사를 안다면 더욱 재미가 느껴질 조지 워싱턴 브리지에 대한 내용과 화자와 아야와의 만남은 성수대교와 대조적인 재난 사건에 대한 아야의 언급으로 이어진다. 성수대교는 무너지고 난 후 8차선 도로로 확장되어 재건되었을 뿐 과거의 뼈아픈 역사와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자리는 없다. 그에 비해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그라운드 제로와 프리덤 타워가 갖는 격차는 화자가 준비하는 논문에서 준비한 제목이 아니라 지도교수로부터 제안받은 ‘균열은 어디에나 있다’는 제목으로 좁아진다. 아야를 만나지 않았다면 800페이지가 넘는 논문같은 소설을 조지 워싱턴 브리지 위에서 강 아래로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날 평소처럼 버스를 타지 않고 사람들이 많던 지하철을 타 지각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야라는 일본 이름을 아플 때 내는 소리가 맞냐고 묻는 친구에게 한국어 강사답게 그건 모음의 첫 발음이라고 알려주는 화자는 재난의 주인공이 될 뻔했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소설과 논문에 적절히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을 던져 버리지 않고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아주 환한 날들]은 평생 억척스럽게 과일가게를 운영하다 남편의 사별 이후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는 ‘나’의 이야기이다. 평생교육원 매주 수요일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참석하며 일상을 이어하는 화자는 수필 쓰기 수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수강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 오는 것을 보며 자신도 뭔가 써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미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위는 아이들을 위한 앵무새를 샀다가 갑자기 아이들이 앵무새를 무서워하게 되어 장모님께 한 달만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딸은 다른 핑계로 함께 오지 않고 사위만 덩그러니 혼자 온 것은 화자와 딸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지난 날의 과거를 통해 드러난다. 과일 배달을 하지만 가산을 늘리는데 무관심한 남편과는 달리 억척스럽게 장사를 해온 화자는 딸과의 몇 가지 사건으로 소원해지게 된다. 딸의 서운한 기억을 떠올리던 화자는 얼떨결에 앵무새를 맡아 키우게 되고, 집안을 더럽히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앵무새를 냉대하다가 기운이 없어진 상태를 보고 겁이나 동물병원의 조언을 청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앵무새를 돌보며 화자는 애정을 갖게 된다. 제목인 아주 환한 날들이 의미하듯이 어쩌면 과일가게를 접고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규칙적으로 해온 엄마인 화자는 딸과의 소원한 상태를 아쉬워했고, 손주들을 시어머니에게만 맡기는 딸에게 서운함마저 드러낼 수 없었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아쉬워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낙심했던 화자에게 앵무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은 그녀에게 다시금 환한 날들을 되돌려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과 작가노트의 내용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띠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236)”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너무 무섭고 고통스럽다. 소설을 쓸 때마다 달아나고픈 충동에 휩싸이는 건 소설을 쓰는 일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옥미는 결국 해냈고 그걸 생각하면 아주 작은 불빛이 켜진 것처럼 내게도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를 등불 삼아 컴컴한 강물 속 물풀처럼 자라나 있는 슬픔과 고통, 시기심과 비겁함, 자기모순과 기만 따위를 헤치며 또다시 조금씩 앞으로 헤어쳐나간다. 그 길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어코 환한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이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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