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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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크리스마스 타일]을 읽었다. “은하의 밤”, “데이, 이브닝, 나이트”, “월계동 옥주”, “하바나 눈사람 클럽”, “첫눈으로”,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크리스마스에는” 이렇게 7편이 단편이 실린 연작소설집이다. 연작소설의 특징처럼 각 단편의 주인공의 주변인물로 등장한 조연들이 다른 단편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마치 우리 인생을 한쪽의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명징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성시켜준다. 특히나 모든 이야기가 크리스마스라는 북반부의 겨울을 보내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맞이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즌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뭔가 아쉽기도 서운하기도 정리도 해야 하기도 떠나보내야 하기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떠오르게도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크리스마스는 뭔가 축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조금은 설레기도 하지만 도저히 그 축제의 한자락에도 마음을 기입할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도리어 우울과 짜증을 자아내기도 하는 딜레마의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내 어릴적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들은 항상 내맘속에 남았는데~~”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이승환의 ‘크리스마스에는’이라는 노래는 마치 오래된 장독에서 진귀한 맛을 무한정 만들어내는 시원적 장맛의 기원처럼, 내게 있어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없어서는 안될 백뮤직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성당을 다녀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곧 성탄절이고, 성탄절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밤늦게까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긴 미사를 참여해야 하고, 그 긴 미사 이전에 주일학교 아이들의 재롱잔치가 있어 몇 주 전부터 성당에서 살다시피 연습에 매진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대놓고 외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성탄절 밤미사가 끝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끊기고 자연스레 성당에서 걸어갈 수 있는 친구네 집에서 올나이트를 할 수 있었다. "Raro Unus, Nunquam Duo, Semper Tres"라는 라틴어 격언을 ‘Semper Duo, Raro tres’로 바꾸어 항상 붙어 다니던 죽마고우와 잦은 이사로 매번 함께하지 못했던 또 다른 친구까지 셋이 밤을 지새우며 추억을 쌓곤 했다. 


벌써 1년이 되어가는데, 작년 이맘때 연락이 끊겼던 그 다른 친구가 어찌어찌하여 나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듣는 순간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십몇 년 만에 연결된 통화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을 토하며 어머니의 부음을 전하며 멀지만 빈소에 꼭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휑덩그렁한 빈소를 보니 나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긴 시간 동안의 고독이 느껴지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오랫만의 해후치고는 짧은 인사와 근황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때 그 시절 항상 함께 했지만 지금은 잘 연락하지 않는 죽마고우에게 부고를 전했다. 내일이면 항상 밤을 세우던 크리스마스 전날이기에 더욱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부고가 아니었다면 이렇데 다시 연결되어 얼굴을 마주하고 그간의 삶을 전해들을 수 있었을까? 그 때 그 시절 그렇게 1년에 하루라도 밤을 지세우며 별로 쓰잘머리 없는 얘기를 지쳐 잠들때까지 나눌 수 있었던 누군가가 있었기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사춘기의 격한 감정의 파고를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작업을 해나가면서 성당에 나가 주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마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작을 동네 성당에는 내가 그간 한번도 보지 못한 수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분들의 나직한 기도와 읊조림과 느린 발걸음 속에서 계절을 보내는 동안 때로 나는 너무 젊게 느껴졌고 때로 마치 백지처럼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채워나가야 할 아주 많은 수의 조각들을 알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308)"라는 작가의 말을 통해 마지막 두 단편을 묶은 소제목인 '하늘 높은 데서는'이라는 구절은 대영광송의 첫 기도말에서 착안하지 않았을까 싶다. 겨울에 필요한 마음을 되짚어보는 작가의 인사말처럼 눈이 내리고 손발이 꽁꽁 얼어붙고 어깨가 움추러드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의 변화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생과 사의 종착점을 연상하게 만든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다가올텐데' 라는 찰나의 고민은 분주한 일상 덕분에 연기처럼 흩어지지만, 어디선가 들려온 타인의 부고와 덕분에 피어오르는 더는 마주할 수 없는 그리운 사람과의 추억으로 인해 그동안 악착같이 손에 쥐려했던 모든 것들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그 '하늘 높은 곳에는'는 지금은 온갖 자잘한 이유를 대며 해소하지 못한 아주 작은 갈등과 잘못과 실수까지도 상세히 소명하며 화해할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이다. 


"현우는 집에 가면 환자를 돌봐야 한다며 내내 커피를 고집했다. 나는 아버지가 아픈가.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당시 수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는 누나가. 환자가 집안에 있는 건 슬픈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근저당이 잡히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채무자가 언제 들이닥쳐 일상을 뒤흔들지 몰랐다. 그게 자신의 죽음이라면 의식이 꺼졌을 때 자연스레 종료되겠지만, 타인이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채무 상태에 놓이게 된다. 기억이 있으니까, 타인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채무로, 우리를 조여온다. 수년 전 엄마를 떠나보내며 느낀 것이었다.(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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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은 사양할게요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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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 작가의 [커튼콜은 사양할게요]를 읽었다. 올봄에 [돌보는 마음] 소설집을 통해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도 너무 잘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장편을 통해서 또 한 명의 빼어난 페이지터너를 만난 것 같다. 시끄럽고 분주한 상황에서도 급속도의 몰입감을 자아내는 스토리와 주인공 연희의 마음에 대한 묘사는 마치 독자가 바로 옆에서 연희의 회사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저자의 청춘 3부작의 완결편이라는 문구가 자랑하는 것처럼 사회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이 공감할 요소가 너무나도 많지만, 주인공 연희와 장미의 이야기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기성 세대에게 청춘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고 청춘이라서 너무나도 힘들고 그 꽃다운 청춘이 이리도 허망하게 지나간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주인공 조연희는 26살의 사회초년생으로 대학시절 내내 연극동아리 활동에 매진하다 취업에 보탬이 될만한 스펙을 전혀 쌓지 못한 채 아동서적 편집부에 들어가게 된다.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이제는 사대주의라는 말로 부정되지도 않는 외래어 범람의 영향으로 아동출판 편집부의 이름이 키즈콘텐츠미디어본부로 바뀌게 된다. 연희는 키즈콘텐츠1팀의 막내로 입사한지 반년이 되어간다. 키즈콘텐츠1팀에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워커홀릭이자 독설과 분노를 쉴세없이 내뱉는 천미진 팀장과 다른 부서에서 무능력함으로 밀려나 신입사원 연희보다도 제대로 일처리를 못하지만 입에 발린 말과 눈치로 팀장의 마음을 사로잡는 뱀 같은 성대리까지 세 명이 이 있다. 연희의 책상이 있는 사무실은 키즈콘텐츠1팀 구성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파티션으로 나눠진 다른 여러 팀까지 있기에 소설에 나온 것처럼 연희의 제안이나 의견에 천팀장이 내뱉는 ‘야, 이 돌대가리야’와 같은 욕설을 그 사무실에 있는 다른 팀원들 모두의 귀에도 들리게 될테니, 아무리 사무실 막내인 신입사원이라도 연희의 자존감은 바닥을 칠 것이 뻔할텐데 그 기나긴 하루의 연속을 어떻게 버티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예전에는 어떤 일에 능통하거나 전문적인 능력을 갖게 된 사람은 꼭 그 일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고 쉽게 일자리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러한 대접을 받는 위치에 오르고 보니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아무리 잘해낸다 해도 오로지 지금 주어진 일에만 해당된 것이지 다른 종류의 일에는 소위 잼뱅이일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하다 못해 못을 박거나 톱질을 하는 겉으로 보아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일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간단하지 않다.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것처럼 한 분야에 수십년간 공을 들인 사람의 능숙함은 눈이부실 정도로 놀랍다. 아니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신기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일의 영역에 대해서 함부로 폄하하거나 가소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옹졸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대학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으로 클레르와 솔랑주의 역할을 맡았던 장미와 연희의 언쟁은 우리가 오랜시간 고민해온 꿈을 쫓는 이상과 현실에 안주하는 일상의 간극을 보여준다. 


연희의 고된 직장생활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허구헌날 팀장에게 깨지고 성대리의 교묘한 일넘기기로 인해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사회초년생의 험난한 일상을 보여준다. 이렇게만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그냥 직장인의 사회적응기로 끝날 수 있었겠지만 연희에게는 연극의 추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연희가 연극의 그림자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연희의 현실을 자극하며 충동하는 장미가 있기에 회사생활을 하나의 연극무대처럼 생각하며 역할에 몰입하려는 연희를 방해한다. 연희가 어떤 배역이든 그 역할에 녹아드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면, 장미는 어떤 역할이든 장미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재능으로 둘 다 그 동아리에서 꽤나 인정을 받는 배우였다. 장미는 부모님의 반대로 연극영화과를 지원하지 못한 대신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연극배우를 선망하며 동아리를 지원했다면, 연희는 얼떨결에 동아리와 들어와 자신도 모르던 재능을 발견한 경우였다. 동아리에 들어온 이유가 선명하게 달랐기 때문일까, 연희는 학교를 졸업하고 현실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장미는 극단을 전전하며 작은 배역이라도 따내기 위해 진력한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연희와 장미의 언쟁은 언제나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든 상황을 알아달라고 말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마치 연희의 입장에서는 장미는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겪는 어려움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고, 장미 입장에서는 직장생활을 해본적이 없기도 하지만 연희가 꿈을 버리고 비겁하게 현실에 안주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연희의 직장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연희의 업무에 대한 이야기에서 회의주의자의 하루라는 부분은 정말로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단시간에 미치게 만들 수 있는지 너무나도 리얼하게 보여준다. 본부장이라는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켜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지리멸렬한 회의의, 회의의 시간을 반복해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차라리 내 생각은 이렇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면 편할텐데, 자신은 결코 생각과 결정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미명하에 회의로 팀원들을 괴롭힌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회사원들이 이런 상사 밑에서 일을 할 것이며, 부하직원일 때에는 나는 절대로 저런 상사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비슷한 부류의 상사가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불변의 법칙인 것일까? 어딜가나 조직안에서 존경받는 어른과 상사를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도 휘귀한 일이 되어 버린 것 또한 인간이 가진 나약함의 정체인 것일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와 부조리를 견디는 것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입을 모아 씹어대는 뒷담화 덕분일지도 모르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나보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벌어진 장미의 비극적인 결말은 독자의 마음을 너무나도 무겁게 만들고 연희가 마주한 슬픔에  공감되어 후회와 자책의 응어리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만 같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눈 코 뜰 세 없이 바쁘더라도 장미를 돌봐야했었는데, 몇 시간 못자더라도 장미의 술취한 전화를 끊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는 자책을 얼마나 수없이 반복하게 될까? 그럼에도 우리 삶의 현실은 장미의 비극을 같이 애도하지 못하는 소연 선배의 선택을 쉽게 비방할 수 없다. 살아내는 자로서 더 이상 창구업무를 지속할 수 없기에 반드시 승진시험을 보기 위해 발인날에도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선택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연희가 한동안은 소연 언니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으로 만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연희의 상처와 아픔이 조금이라도 옅어지는 순간 소연 언니의 미안한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옅어지지라도 않는다면 우리는 또 한 명의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테니 말이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계속하다보며 말이야, 내가 예전에 알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말 하면 좀 웃길지도 모르겠는데, 어제의 내가 다르고 오늘의 내가 달라. 아마 내일의 나도 다른 모습이겠지. 단순히 늙는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야. 그냥 어느 순간 느껴져. 내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구나. 너무 달라져서 다시 돌아가 수도 없겠구나, 그런 생각 말이야.(106)”


“난해하기 짝이 없는 부조리극을 준비하느라 짜증, 다툼, 질투, 갈등으로 점철되었던 스무살의 여름이 지금에 와서 찬란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때 당시 느꼈던 피로와 고단함이 현재의 삶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명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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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기다리기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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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작가의 [햇빛 기다리기]를 읽었다. "남아 있는 마음", "사랑의 미래", "겨울의 끝", "우리 시대의 사랑", "결혼식 가는 길", "햇빛 기다리기", "이 세상의 것"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또 다른 퀴어 문학의 선두 주자가 나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소수자의 사랑을 다각도에서 바라보며 세밀한 감정묘사가 독보적이었다. 7개의 단편이지만 화자는 모두 '나'로 설정되었고 비슷한 연배의 젊은 남자가 연인을 만나 헤어지고 만남을 이어가는 내용이어서 마치 동일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이 꾸며낸 허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 그리고 경험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상당부분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낯선 일들조차도 작가의 담담한 고백을 통해서 감정이입이 가능해지고 '아 나라면 이때 어떻게 행동했을까'란 반응을 자아내는 것은 허구의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수자라는 말에 담긴 약함을 생각한다. 아니 어떤 영역에서는 소수자들이 고유한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태생부터 그런 소수의 행운을 누리는 이들도 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소수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도 있다.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소수의 자리는 누구나 선망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금수저니 흙수저라는 수저론까지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랑의 영역에서 소수의 선택은 너무나도 지탄받기 쉽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부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보편성을 벗어난 소수의 선택은 일상성을 위협하는 도전처럼 다가온다. 그들의 선택이 나와 무관하더라도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거나 이상한 질병을 가진 사람으로 바라본다거나 아님 그냥 꼴배기가 싫어서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들이 많다. 제도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싫거나 거부하거나 외면하거나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심도있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인간의 역사 안에서 성소수자가 지속되어 온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와 권력을 지니지 않은 약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소설 속의 주인공 '나'는 동성 연인과의 사랑을 지속하지만 때로는 용기있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애써 감추며 수치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회의 배타적인 시선과 가족들의 완강한 거부를 당당하게 지속적으로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숨기며 아닌척 몰래 비밀리에 사랑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평범한 연인들처럼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주인공의 마음은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 올리기까지 수만번의 번뇌의 시간을 보낸 흔적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한 사진 한 장 올리지 못한단 말인가의 고민에 지친 주인공은 용기있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말한다.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좋아요'라는 하트 하나 뿐이라고. SNS를 통해서 자신의 일상을 정성들여 드러낸다고 해서 딱히 대단한 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경우는 아주 유명한 셀럽 외에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친들의 '좋아요' 또는 짧은 댓글을 통해 소소한 만족감을 얻는다. 


또 다른 단편의 주인공 '나'는 동성연인과의 만남을 가족에게도 공개했지만, 그 연인이 HIV 감염자임을 차마 말하지 못한다. 의학적 관심이 없는 이들조차도 대부분 에이즈라는 병명에 대한 뜨악한 반응을 알고 있기에 동성관계를 넘어서는 연인의 병력은 주인공의 사랑에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코로나 검사소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행여나 그 주변을 지나치는 이들이 경계와 긴장의 눈빛을 내비치는 것을 보며 '나'의 동성연인은 HIV 감염자를 바라볼 때 같다며 서글픈 말을 내뱉는다. 감염 통보를 받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연인이 오톨도톨한 손목의 흔적을 매만지며 주인공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갑작스런 폭우에 바닷길을 걷지 못해도 이 사람을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아니 그것은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고, 그냥 지금의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겠다는 다짐을 마주잡은 손의 온기로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성소수자의 일상은 이와 같이 촘촘하게 규율되고 수치심은 신체에 깊숙이 새겨진다. '수치심'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수치심이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상대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수치심은 '소속감'과 연결되어 있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집단 또는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았다'거나 거절당했다는 기분과 관련되며,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결함이 있고 불결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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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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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경청]을 읽었다. 주인공 임해수 상담가는 센터에서 일하며 TV프로그램에도 나오는 유명한 박사님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방송에서 어떤 배우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내뱉은 두달 후에 그 배우가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여 그녀의 삶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누리꾼들은 주인공이 그 배우를 죽였다고 선동하며 악플을 단다. 설상가상으로 센터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는 악의적인 증언을 하고 남편 태주와도 이별하게 된다. 홀로 남겨진 해수는 가장 친한 친구 주연의 위로와 조언을 마다하다가 결국 주연과도 소원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해수는 그 배우의 죽음 이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지내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황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해수는 매일 매일 변호사에게, 센터 소장에게, 친구 주연에게, 배우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행여나 자신을 알아보는 이웃을 만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길을 나서다 길고양이 순무와 까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길고양이를 지켜보던 가운데 초등학생 황세이를 만나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임해수가 어떤 말을 방송에서 했기에 배우를 자살에 이르기까지 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이후 주인공을 살인자로 매도하며 이미 얼굴까지 알려졌기에 그녀의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까지 이르고 길고양이 순무를 매개로 가까워진 초등학생 세이와의 만남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이다. 특별한 반전이나 놀란만한 전개도 없이 그저 한 계절을 지나는 동안에 해수와 길고양이 순무는 동일시되며 그들을 치유하는 것은 어떤 기적이나 놀라운 수술의 힘이 아니라 그저 단지 그들의 삶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봐주는 경청임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은 참 이상한 존재이다.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막상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 또한 힘들어한다.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담되고 불편하면서도 막상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산다. 언젠가 어떤 연예인이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서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진행자들은 그 연예인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웃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기PR의 시대가 도래한지 한참되었고 이제는 관종이라는 말까지 생겨나서 대놓고 SNS에 자신의 일상을 공개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일하고 쉬는 것까지 힙하고 센스넘치고 스웩이 담긴 컷을 만들기 위해서 작위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단편적인 한컷을 만든다고 해서 실제 자신이 변하는 것은 아님에도, 때로는 아무런 수익이 생기지 않음에도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결국은 제발 나좀 바라봐 달라는 구애의 손짓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문제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컷과 뭔과 기괴하고 유별난 아이디어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단 1초 이상도 관심을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고양이 순무의 앞발이 퉁퉁 부어오르고 몰골이 점첨 흉측해져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아니 차라리 안쓰러운 표정이라도 한 번 지으면 나을텐데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흔히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짐승은 본능에 따르는 행동을 할 뿐 인간처럼 의도적인 흉악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짐승의 행동은 생존을 위한 자연적인 순리의 하나일 뿐이다. 당연히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의 삶과 견주게 되었을 때는 저급한 단계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짐승의 본능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해수의 말실수와 길고양이 순무의 경계심은 어떻게 견줄 수 있을까? 


해수의 무력한 나날 속에 등장한 초등학생 세이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피구 연습을 하며 폭언과 폭력에 매번 상처를 받으면서도 세이는 해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리어 학교에서 피구 연습을 하는 세이를 보러온 해수에게 학교에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상담가로서의 이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때문인지 해수는 세이를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순무의 구조를 위해서 세이와 함께 할 뿐이다. 피구 대회가 열리는 날 해수는 세이의 경기를 보기 위해 학교에 가고 그곳에서 세이를 괴롭히는 아이의 엄마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피구 경기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세이는 그동안의 울분을 토로하듯이 괴롭히던 아이와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해수는 개입하지 않는다. 생과 사를 오가는 순무가 체력을 되찾고 수술을 받아 세이의 품에 다시 안기도록 해수는 묵묵히 세이의 고백을 기다려준다. 그리고 해수는 세이와 함께 순무를 구조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상담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고 첫 내담자로 세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나이와 직업과 상황 그리고 심지어 종이 다른 인간과 동물을 떠나 상처받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끝이 없는 기다림의 관심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기나긴 기다림의 완성은 과거의 멀쩡한 시간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사건이 있기 전과 그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임을 해수와 세이 그리고 순무를 통해 알려준다. 


"이런 대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가 한동안 경험하지 못했고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장벽 없는 소통.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장애물이 없다.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드럽게 방향을 틀고 서로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말들이 완강하게 닫힌 내면의 문을 열고, 서로의 내면 깊숙이 진입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꼭 닮은 말을 길어 올린다. 

꾸밈이 없는 말,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걸치지 않은 말. 의도도, 저의도, 악의도 없는 말.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말. 아무런 빛깔도 모양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말들.(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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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
도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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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리 작가의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를 읽었다. 부제는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이다. 갓생, 배민맛, 방꾸미기, 랜선 사수, 중고 거래, 안읽씹, 사주 풀이, 데이트 앱, #좋아요, 이렇게 9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현대인이 중독된 주제들이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지금 시대의 가장 핫한 이슈들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이슈라는 것이 뉴스메인을 도배하는 그럴듯한 화제가 아니라 그냥 한 개인인 나에게 있어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될 무엇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이 중에 어느 것에 중독되어 있나 따져보니 아예 한 번도 안해본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개인적인 감상을 표출하거나 격력한 공감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요즘엔 “SNS를 하는 사람이 관종이 아니라, 안 하는 사람이 오히려 별종(202)” 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렇게 많은 중독 주제 중에 내게 해당되는 내용이 없다는 게 어쩌면 나도 별종이거나 이미 상 꼰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중에서 하나라도 하지 않는다면 술이나 커피나 담배 중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 사람이 귀엽거나 예쁘거나 잘생겼거나 말발이 좋거나 직업이 특이하다면 대단한 금욕주의자처럼 보인다. ‘아, 아깝다. 저 정도면 팔로워 5만 명에 좋아요 100개쯤은 금방 땡길 텐데.’(202-203)”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싸이월드 세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그때에 관종이 되고자 하는 열정을 다 써버린 것인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시시한 일상을 드러내는 것이 점점 싫어지는 것인지? 50대 중반 이후의 어머니들 사진첩에는 온통 꽃 사진만 잔뜩이라고 하던데, 사람보다 자연이 더 예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에 다가오는 깨달음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뭔 자신감으로 그렇게 대놓고 셀카 사진도 올리고 그랬는지. 지금보면 쥐구멍이 들어가고 싶어지는 사진과 감성 오지게 터지는 글들을 보면 한 때 나도 이런 젊음을 드러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더불어 피싱 같은 범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도 아직 2G폰을 쓰고 있던 터라 부모님이 스마트폰으로 변경한다는 얘기를 듣고 괜히 이상한 문자가 왔을 때 눌러서 사기 당하지 않게 그냥 구형 폰을 쓰는게 어떻겠냐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적이 있었다. 내딴에는 괜히 억울한 일을 당하실까 걱정되 한 말이었는데, 나의 대답이 얼마나 서운하셨는지 한동안 전화조차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행동과 말이 참으로 어리석고 이기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한 살이라도 더 젊으실 때 새로운 것들을 보여드리고 잘 적응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할 텐데, 어찌보면 노년의 삶에 대한 무미건조함이 내 생각의 일부이지 않았나 싶다. 나의 어리석었던 행동에 질타를 가하는 일들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일어난다. 노약자석에 앉으신 어르신들이 거의 대부분 스마트폰을 들고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뉴스 기사를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번 손에 쥐었다 하면 쉽사리 놓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샤워할 때에도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 시청이 가능하도록 방수기능까지 강화되었으니, 이제 스마트폰을 떠나는 시간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인터넷 뱅킹은 PC로 하는 것이 더 수월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은행들이 모바일 버전의 보안을 강화해서 그런지 앱을 구동하면 몇 번 클릭으로 손쉽게 이체가 가능해졌다. 사실 가장 최신형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도 자주 사용하는 앱은 몇개 되지 않는다. 안읽씹의 내용에 나오는 것처럼 전국민이 사용하는 깨톡의 경우 앱 상당에 빨간 숫자가 써 있으면 뭔가 맘이 편치가 않다. 광고든 단톡방이든 어서 빨리 대화방을 열어서 그 숫자를 없애고만 싶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 숫자를 없애는 강박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앱에도 아직 읽지 않음을 표시하는 숫자가 표기되어 있으면 마치 남겨진 숙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앱에 떠 있는 숫자는 내게 딴짓하지 말고 어서 빨리 숙제를 하라고 다그치는 것만 같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생긴 이상한 증상이다. 


“임원이나 고용주에게 대체 불가 노동자란 결국 프리미엄이 붙은 부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부품으로서의 노동자는 마모(번아웃)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성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만, 임원과 고용주를 능가하는 순간 임원과 고용주의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인간이 비인간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호감도도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를 자극하게 될 것이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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