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은 사양할게요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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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 작가의 [커튼콜은 사양할게요]를 읽었다. 올봄에 [돌보는 마음] 소설집을 통해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도 너무 잘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장편을 통해서 또 한 명의 빼어난 페이지터너를 만난 것 같다. 시끄럽고 분주한 상황에서도 급속도의 몰입감을 자아내는 스토리와 주인공 연희의 마음에 대한 묘사는 마치 독자가 바로 옆에서 연희의 회사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저자의 청춘 3부작의 완결편이라는 문구가 자랑하는 것처럼 사회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이 공감할 요소가 너무나도 많지만, 주인공 연희와 장미의 이야기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기성 세대에게 청춘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고 청춘이라서 너무나도 힘들고 그 꽃다운 청춘이 이리도 허망하게 지나간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주인공 조연희는 26살의 사회초년생으로 대학시절 내내 연극동아리 활동에 매진하다 취업에 보탬이 될만한 스펙을 전혀 쌓지 못한 채 아동서적 편집부에 들어가게 된다.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이제는 사대주의라는 말로 부정되지도 않는 외래어 범람의 영향으로 아동출판 편집부의 이름이 키즈콘텐츠미디어본부로 바뀌게 된다. 연희는 키즈콘텐츠1팀의 막내로 입사한지 반년이 되어간다. 키즈콘텐츠1팀에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워커홀릭이자 독설과 분노를 쉴세없이 내뱉는 천미진 팀장과 다른 부서에서 무능력함으로 밀려나 신입사원 연희보다도 제대로 일처리를 못하지만 입에 발린 말과 눈치로 팀장의 마음을 사로잡는 뱀 같은 성대리까지 세 명이 이 있다. 연희의 책상이 있는 사무실은 키즈콘텐츠1팀 구성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파티션으로 나눠진 다른 여러 팀까지 있기에 소설에 나온 것처럼 연희의 제안이나 의견에 천팀장이 내뱉는 ‘야, 이 돌대가리야’와 같은 욕설을 그 사무실에 있는 다른 팀원들 모두의 귀에도 들리게 될테니, 아무리 사무실 막내인 신입사원이라도 연희의 자존감은 바닥을 칠 것이 뻔할텐데 그 기나긴 하루의 연속을 어떻게 버티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예전에는 어떤 일에 능통하거나 전문적인 능력을 갖게 된 사람은 꼭 그 일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고 쉽게 일자리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러한 대접을 받는 위치에 오르고 보니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아무리 잘해낸다 해도 오로지 지금 주어진 일에만 해당된 것이지 다른 종류의 일에는 소위 잼뱅이일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하다 못해 못을 박거나 톱질을 하는 겉으로 보아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일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간단하지 않다.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것처럼 한 분야에 수십년간 공을 들인 사람의 능숙함은 눈이부실 정도로 놀랍다. 아니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신기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일의 영역에 대해서 함부로 폄하하거나 가소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옹졸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대학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으로 클레르와 솔랑주의 역할을 맡았던 장미와 연희의 언쟁은 우리가 오랜시간 고민해온 꿈을 쫓는 이상과 현실에 안주하는 일상의 간극을 보여준다. 


연희의 고된 직장생활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허구헌날 팀장에게 깨지고 성대리의 교묘한 일넘기기로 인해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사회초년생의 험난한 일상을 보여준다. 이렇게만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그냥 직장인의 사회적응기로 끝날 수 있었겠지만 연희에게는 연극의 추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연희가 연극의 그림자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연희의 현실을 자극하며 충동하는 장미가 있기에 회사생활을 하나의 연극무대처럼 생각하며 역할에 몰입하려는 연희를 방해한다. 연희가 어떤 배역이든 그 역할에 녹아드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면, 장미는 어떤 역할이든 장미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재능으로 둘 다 그 동아리에서 꽤나 인정을 받는 배우였다. 장미는 부모님의 반대로 연극영화과를 지원하지 못한 대신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연극배우를 선망하며 동아리를 지원했다면, 연희는 얼떨결에 동아리와 들어와 자신도 모르던 재능을 발견한 경우였다. 동아리에 들어온 이유가 선명하게 달랐기 때문일까, 연희는 학교를 졸업하고 현실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장미는 극단을 전전하며 작은 배역이라도 따내기 위해 진력한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연희와 장미의 언쟁은 언제나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든 상황을 알아달라고 말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마치 연희의 입장에서는 장미는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겪는 어려움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고, 장미 입장에서는 직장생활을 해본적이 없기도 하지만 연희가 꿈을 버리고 비겁하게 현실에 안주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연희의 직장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연희의 업무에 대한 이야기에서 회의주의자의 하루라는 부분은 정말로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단시간에 미치게 만들 수 있는지 너무나도 리얼하게 보여준다. 본부장이라는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켜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지리멸렬한 회의의, 회의의 시간을 반복해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차라리 내 생각은 이렇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면 편할텐데, 자신은 결코 생각과 결정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미명하에 회의로 팀원들을 괴롭힌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회사원들이 이런 상사 밑에서 일을 할 것이며, 부하직원일 때에는 나는 절대로 저런 상사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비슷한 부류의 상사가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불변의 법칙인 것일까? 어딜가나 조직안에서 존경받는 어른과 상사를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도 휘귀한 일이 되어 버린 것 또한 인간이 가진 나약함의 정체인 것일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와 부조리를 견디는 것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입을 모아 씹어대는 뒷담화 덕분일지도 모르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나보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벌어진 장미의 비극적인 결말은 독자의 마음을 너무나도 무겁게 만들고 연희가 마주한 슬픔에  공감되어 후회와 자책의 응어리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만 같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눈 코 뜰 세 없이 바쁘더라도 장미를 돌봐야했었는데, 몇 시간 못자더라도 장미의 술취한 전화를 끊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는 자책을 얼마나 수없이 반복하게 될까? 그럼에도 우리 삶의 현실은 장미의 비극을 같이 애도하지 못하는 소연 선배의 선택을 쉽게 비방할 수 없다. 살아내는 자로서 더 이상 창구업무를 지속할 수 없기에 반드시 승진시험을 보기 위해 발인날에도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선택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연희가 한동안은 소연 언니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으로 만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연희의 상처와 아픔이 조금이라도 옅어지는 순간 소연 언니의 미안한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옅어지지라도 않는다면 우리는 또 한 명의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테니 말이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계속하다보며 말이야, 내가 예전에 알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말 하면 좀 웃길지도 모르겠는데, 어제의 내가 다르고 오늘의 내가 달라. 아마 내일의 나도 다른 모습이겠지. 단순히 늙는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야. 그냥 어느 순간 느껴져. 내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구나. 너무 달라져서 다시 돌아가 수도 없겠구나, 그런 생각 말이야.(106)”


“난해하기 짝이 없는 부조리극을 준비하느라 짜증, 다툼, 질투, 갈등으로 점철되었던 스무살의 여름이 지금에 와서 찬란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때 당시 느꼈던 피로와 고단함이 현재의 삶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명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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