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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었다. 프랑스의 콩쿠르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로맹 가리의 필명으로 발표된 소설이라는 사실이 사후에 알려져 더욱 유명해진 소설이기에 일러스트 버전을 사놓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펼쳐보게 되었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난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몰입감을 선사하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모모의 고백은 끝으로 갈수록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예고하며, 이 세상의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는 소회는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모모의 말이기에 커다란 울림을 주며 쉽게 페이지를 닫지 못하게 만든다.
얼마전 릴스에서 본 외국인 유튜버가 다짜고짜 이런 말을 시작한다. 한국은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고, 자기네 나라보다 몇 배는 비싼 것 같다고. 당연히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뭐가 비싸다는 건지 일부러 말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일텐데도 좀 더 지켜보게 된다. 한국이 유튜버인 튀르키에 자국보다 몇 배 비싼 제품은 데오드란트인데, 설명하길 아마도 한국 사람들은 데오드란트를 사도 꽤 오래 사용하지만, 자기네 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다 사용할 정도로 빈도수가 높기 때문에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게 아니냐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국뽕의 이상한 결론을...
그런데 사실 외국에 살다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채취가 유독 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왜 그렇게 서구 사회에 향수가 발달했는지는 여행을 떠나 한 여름에 사람이 가득한 대중교통을 타게 되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고, 그 존엄함을 무너뜨리는 가장 근원적인 시초가 채취가 아닌가랑 생각이 깊어진다. 간난아기때를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의 상태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기에게서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아기를 씻고 뽀송한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스스로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모모가 경멸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간의 몸에서는 악취가 발생되기 시작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성경 말씀이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삶의 척추를 가로지르고 있지 않나 싶다. 소설의 말미에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식물 상태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 지하에 마련된 유태인 동굴로 아줌마를 데리고 간다. 이스라엘의 친척이 로자 아줌자를 데리고 갔다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줌마의 시체와 기이한 동거를 유지한다. 그리고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 동행은 시신이 썩어가며 풍기는 악취로 인해 아파트 사람들의 신고로 발각되었을 것이다.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시신 옆에 누워 있는 모모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아이가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모모는 이미 숨을 거둬 창백해진 로자 아줌마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막기 위해 롤라 아줌마에게 받은 돈으로 향수를 사서 통째로 부어버린다. 그리고 아줌마의 창백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하고 서툰 솜씨로 마스카라를 그려넣는다. 아줌마와의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냥 바보가 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악취가 풍기는 육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가만히 옆에서 지켜본다. 모모는 아줌마가 병원에 실려가면 자신도 빈민구제소에 끌려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줌마와의 약속을 지키려 한 것은 아니었다. 로자 아줌마의 정신이 흐려져 쇼파에 앉은 채로 똥오줌을 싸도 모모는 아줌마를 끌어안고 아줌마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모가 어리기 때문에, 아직 사리분별이 명확치 않은 소년이기에 아줌마가 풍기는 악취를 견뎌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애써 어른처럼 싫은 티를 내지 않을 필요가 없기에 아무리 자신을 키워준 로자 아줌마라 해도 역한 냄새가 나면 멀리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안아주고 아줌마의 손을 놓지 않는다.
모모에게 도움을 주는 롤라 아줌마와 이삿짐을 나르는 형제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색인종으로 아마도 주류를 이루는 이들에게 배척받는 상태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로자 아줌마 또한 유태인으로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고 과거에는 창녀 생활을 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에는 창녀들의 자녀들을 돌보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좋지 않는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에 7층이나 되는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전개부터가 모모가 살고 있는 곳은 가난한 이들이 머무는 공간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모모의 주변인들은 소외와 멸시가 난무하는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이들이었다. 로자 아줌마의 상태가 어쨌든 비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모모가 살아갈 수 있도록 로자 아줌마를 씻겨주고 마지막 외출도 도와준다.
사람의 기분을 단숨에 좋게 만들어주는 아주 비싼 향수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고급 향수는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는 무관하게 비용만 지불할 수 있다면 언제든 구입해서 내 몸에서도 좋은 향기가 나도록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로자 아줌마처럼 너무나도 못생겨지고 머리털도 몇 가닥 남지 않았고 너무 뚱뚱해져서 목 아래부터 다리까지가 드럼통처럼 커진 상태로 똥오줌을 싸서 풍기는 역한 냄새에도 아무렇지 않게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은 살 수 없다. 그런 마음은 이 세상의 아주 소수에게만 허락된 사랑이다.
머리속으로는 이성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왔다. 하지만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온 어느 걸인이 풍기는 토할 것 같은 악취에 깜짝놀라 뒷걸음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모모가 보여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창년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의 아들이며 심지어 제 나이까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모모가 자신을 키워준 로자 아줌마의 비참한 말로를 외면하지 않고 용기내어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밀 할아버지, 카츠 의사선생님, 롤라 아줌마, 왈룸바 아저씨와 같은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지켜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 모두 소외된 변두리 인물이지만 로자 아줌마를 대하는 인격적인 모습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모모는 거리의 부랑아가 될 뻔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같이 거친 삶을 살아온 어른들의 도움으로 그 누구도 감히 행하지 못할 사랑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모모가 들려준 로자 아줌마와 보낸 몇 년의 시간이 자기 밖에 챙길 줄 몰랐던 지난 날을 부끄럽게 만든다. 모모가 전해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어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173)"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제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샤르메트 씨가 불쌍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돈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는 노인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말이다.(193)"
"로자 아줌마는요,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구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에요. 다행히 내가 같이 지내면서 돌봐주고 있어요.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으니까요.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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