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리커버 특별판)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6월
평점 :
품절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었다. 작품이 발표된지 50년이 지나서야 주목받기 시작했기에 아마도 저자는 생전에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 같다. 어쩌면 소설이 표명하는 주제이기도 한 남들이 생각하는 소설가로서의 성공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저자가 영문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며, 소설의 주인공 스토너처럼 만족스러운 평범한 삶을 살아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치 저자의 자전적 소설처럼 시작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기존의 소설과는 색다른 감동에 다다르게 된다. 스토너는 뭔가 우유부단하고 야망이 없어 주어진 운명에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을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열정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표면적인 것들을 중시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스토너란 소설 속 인물이 주목받기 시작하고, 그런 사람들이 더 없이 귀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그가 평생을 학생과 교수로 보내게 될 미주리 대학이 있는 컬럼비아에서 40마일 떨어진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한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가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기에 윌리엄 또한 아버지를 도와 농부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농업대학을 진학해 살림이 보탬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가 영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기존의 흐름대로라면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윌리엄에게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그따위 쓸데없는 문학을 공부해서 뭐하냐고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윌리엄의 진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윌리엄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학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사람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간은 괴짜나 이상한 사람으로 그려진 아처 슬론 교수였다. 아처 슬론 교수는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윌리엄의 내면에 숨겨진 교육자로서의 적당한 자질을 일찌감치 알아챈 것이다. 


윌리엄이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으며 강사로서의 삶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윌리엄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군입대를 앞두게 된다. 소설에 나온 배경으로 보아 강제징집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자발적으로 입대하여 미국의 위상을 드높이게 된다면 귀환 후에 받게 될 보상이나 명예가 꽤나 드높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반대로 입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별다른 신상의 변화는 없을지 모르지만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로 낙인이 찍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윌리엄과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함께 박사 과정을 밟던 두 명의 친구인 데이비드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는 마땅하다는 듯이 입대를 결정하고 윌리엄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슬론 교수와의 면담과 친구들의 종용에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고든이 윌리엄의 선택을 비아냥거리는 거리고 전사한 데이비드와는 는 달리 살아돌아와 점차 학교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지만 윌리엄은 그런 말과 변화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두 가지를 꼽는다면 당연히 이디스와의 결혼과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외도, 그리고 찰스 워커라는 학생과 그의 지도교수인 로맥스와의 끝이없는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너에게 있어서 아내 이디스와 동료교수 로맥스는 마치 그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희대의 빌런처럼 보인다.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스토너는 이디스와 일찌감치 이혼을 했을 것이고, 고든의 제안을 받아들여 학과장이 되어 로맥스가 스토너에게 했던 것처럼 괴상한 시간표를 수행하도록 괴롭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캐서린과의 운명같은 지독한 사랑에 빠져, 아내 이디스가 알게 되어 아무렇지 않은 듯 비난하는 소리를 감내하거나 학교에서 소문이 나 평판이 바닥을 치는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캐서린과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캐서린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스토너의 모습은 자기가 손에 쥔 것을 결코 놓을 수 없는 비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 스토너의 결단은 지옥과도 같은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에 다시 자신을 내던져 캐서린이 다른 곳에서 그녀의 노력과 성과에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열어주는 가슴아린 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주인공 스토너의 말년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칠 찰스 워커라는 학생과의 만남은 조금은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 후반에 긴장을 야기하며 그로 인해 파생될 수많은 갈등과 논쟁의 시간의 서막을 열게 된다. 사실 찰스 워커와 로맥스 교수의 얼토당토하지 않는 주장과 행태를 지켜보면 누구라도 스토너를 대신해서 화를 내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로맥스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워커 군을 그렇게 감싸고 도는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권한을 갖게 된 이가 앙심을 품고 누군가를 괴롭히려고 작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대를 거부한 윌리엄에게 비아냥거리던 고든이 같은 교수 생활을 하며 학장으로서의 중립과 스토너가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다. 스토너는 로맥스의 불의한 결정과 행동에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아주 오랜시간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것처럼 아내 이디스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과 그로 인해 자신과 멀어지게 된 딸 그레이스에 대한 그리움을 견뎌낸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스토너가 더 이상 로맥스의 폭정과도 같은 시간표 배정에 항거라도 하듯이 보란듯이 고학년의 주제들을 신입생들에게 다루며 로맥스와의 갈등은 절정에 달하지만, 종신교수로서의 수업 주제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스토너는 작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스토너의 정년퇴직 문제로 다시 한 번 로맥스의 비열함과 부딪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스토너의 건강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거대한 종양을 제거받는 수술까지 받게 된다. 스토너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디스의 반응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마치 스토너가 캐서린을 만나는 것을 알게 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신상에 커다란 변화를 마치 남일 대하듯이 하는 디아스의 정신상태를 견딘 스토너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번역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겉으로 봤을 때 스토너의 삶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애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든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이나 충분히 학과장을 할 수 있었음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학생과의 논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종국에는 암에 걸려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 노교수의 슬픈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스토너를 밖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일 수 있다. 스토너 자신에게는 이디스와 삶을 견뎌내는 것 그리고 딸 그레이스가 알콜중독자가 되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 그리고 로맥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오랜 시간 신입생들에게 간단한 개론 과목만 강의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살아내며 어느 순간 진정한 교육자와 남편과 아버지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교정의 빛을 그리워하며 충만해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스토너의 삶은 진실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폭풍같은 일들을 항구하게 견뎌낸 방파제처럼 묵묵히 자신이 삶을 걸어간 스토너 교수를 생각하며 우리 시대의 정말 필요한 귀한 얼굴이지 않을까 싶다.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276)"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대한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398-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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