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장류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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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을 읽었다. 꽤 오래 전에 헬싱키를 경유하는 핀에어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경유 시간이 짧아 공항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기에 그저 깔끔하고 모던한 헬싱키 공항을 둘러보다 가판대에 적힌 콜라값을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북유럽의 물가가 상상 이상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거의 두배값에 달하는 가격 표시를 보고 이곳이 경유지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잊고 있었던 헬싱키 공항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이번 에세이는 핀란드에 대한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고, "여름에 서유럽을 왜 가? 무조건 핀란드지"라는 저자의 단호한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핀에어 항공 사이트를 뒤적거리게 된다. 


핀란드의 쿠오피오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역에 교환학생으로 당첨된 저자의 회상과 더불어 에필로그에서 가명을 쓴 친구 예진과의 리유니언 여행을 다녀온 후기를 따라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2008년이라는 평행이론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2008년 1월부터 교환학생으로 쿠오피오에 머물렀다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2008년 2월부터 해외살이를 시작했었다. 아 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같은 시기에 비슷한 낯섬과 새로움을 느끼며 긴장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냈겠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때는 그곳이 그렇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벗어나고 싶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함께 교환학생으로 절친이 된 저자와 예진이라는 친구는 15년 만에 다시금 쿠오피오를 방문하게 된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졸업과 취업,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커다란 획을 그을만한 사건들이 훅훅 지나가고 21살 때의 발자취를 뒤따라 가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그때의 자신을 커다란 나무 뒤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평행이론에 끼어맞춰보자면 2년 전에 가장 친한 동기와 내가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곳을 방문했었다. 사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일부러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야했기에 구태여 바쁜 여행 일정에 넣을 필요가 없었지만, 내가 머물렀던 곳을 동기 또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해줬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재방문하지 않았기에 내심 그곳을 가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설레이는 순간이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기에 단테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었고 온통 붉은색과 녹색이 앞다투어 꾸며진 아치를 지나 아기자기한 장식물을 파는 가판대를 휘휘 둘러보고 나니 먹거리 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출출한 배를 채워줄 티롤 지방의 소세지와 더불어 차가워진 몸을 데워줄 글루바인을 먹고 마시니 내가 진짜 여기에 다시 왔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컨디션이 떨어진 동기가 잠시 쉬겠다는 찰나에 나는 혼자 2008년에 부단히도 많이 걸었던 아주 오래된 다리를 가보았다. 서재의 메인 화면에 걸린 사진 속 오래된 다리의 강변길이 마치 마음의 고향처럼 아련히 새겨져 있었기에 옷긴을 여미고 아직 남겨진 낙엽을 밟으며 지나온 15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에는 나이가 많은 분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 분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 체력도 떨어지고 어딘가 몸이 아픈 곳이 있어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병원을 다녀야 하는 뭔가 서글프게만 보이는 시기에 이른 분들을 보고 나 혼자 지레짐작으로 그분들을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져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세세히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대에는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노 단위로도 세밀하게 떠올릴 수 있다. 오늘 뭘 먹었는지가 아니라 지난 주에 친구 누구랑 몇 시에 만나서 어디로 걸어가 무엇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낱낱이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심지어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내 삶의 어느 부분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것처럼 안개 속에 가려져 돌아보면 하루, 한달, 한해가 지나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세밀하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축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우리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너무나도 생생하다면 남겨진 시간이 두려기만 할테니 말이다. 


이전에 출간된 저자의 소설을 전부 읽었기에 당연히 소설가의 삶을 꿈꾼지 알았다. 그런데 저자가 교환학생으로 머물 당시만 해도 소설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니 정말 앞으로의 15년 후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겠지만 부디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계속 쓰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책에 나와 있듯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소설은 읽은 이에게 분명히 무엇인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는 삶이 아마도 가장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이 내 마음속에 남긴 무언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건 정말이지 '무언가'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소설을 읽고 났을 때 각자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형태로 남는 고유한 자국이다. 소설마다 다르고 또 그 소설을 읽는 사람 각각이 다른, 두 지문의 결합같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자국.(122)"


두 친구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배려하고 지나온 시간 덕분인지 사우나 안에서 너무나도 간절히 사진을 찍고 싶었던 욕심을 내려놓도록 만든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절친의 몰입에 방해가 될까 싶어 후회할 선택을 똑같이 품은 마음이 아마도 15년 후에 다시금 리유니언하는 원천적인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생이 여행이라고 치면, 일기는 마치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그 여행지에서만 찍을 수 있는 그 순간의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사진. 나는 인생이란 여행을 하면서 일기를 쓰지는 못했다. 한 마디로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신, 소설을 썼다.(391)"


아 자작나무 키친웨어 '코이비코'를 사는 부분을 읽고 아무리 검색을 해도 그런 브랜드가 나오지 않기에 정말 우리나라에는 소개가 되지 않은 레어템인가보다 생각했었는데, 에필로그에 나온 가상의 브랜드라는 말에 실소가 터졌다. 아 작가님 진짜 진심이구나, 나중에 코이비코가 대박을 터트리길 기대해본다. 


#장류진 #우리가반짝이는계절 #오리지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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