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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뷰티풀
앤 나폴리타노 지음, 허진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8월
평점 :
앤 나폴리타노의 [헬로 뷰티풀]을 읽었다. 친하지는 않아도 살다보면 가까워지고 근황을 나도 모르게 전해듣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냥 간단힌 신상정보만 아는 정도에 그쳐서 그런지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그 사람에게 닥친 불행한 소식이 전해져 올때면 유난히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 대신 그 사람이 대신 이 극심한 고통의 순간을 맞이한 것은 아닐까란 기우에서부터 시간이 지나 극심한 고통을 겪던 그 사람이 견디다 못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면 한동안은 나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별로 가깝지 않은 나 또한 이럴텐데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이라면 그 무너진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대낮에 지하철을 타면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많다. 이제는 가장 구석에 있는 노약자석만으로는 연세가 많은 분들을 감당할 수 없기에, 그분들도 예전처럼 젊은이들의 양보를 무턱대고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머리가 희긋한 분이 힘겹게 손잡이를 잡고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게 마음 편할 수는 없다. 설상가상으로 분주한 역이 지나고 조금은 한산해진 지하철 안에서 편하게 다리를 꼬을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찰나에 한쪽 발이 약간 기울어진 채 슬리퍼를 끌며 앉아 있는 이들에게 작은 종이를 내려놓는 분이 나타난다. 때로는 그 종이가 아주 너덜너덜해져 별로 손에 대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무릎 위에 놓여진 그 종이가 아주 예의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은 비까지 많이 내려 눅눅해진 옷가지와 이미 비에 젖어 축축한 양말에 자꾸 쓰러지려는 우산을 고정하며 슬슬 짜증이 나려는 찰나 내 무릎에 놓여진 종이의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있는데 일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라 작은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종이에 담긴 내용을 읽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혹시 누군가가 지갑을 꺼내지 않을까? 아 그런데 오늘따라 현찰을 넣고 다니는 지갑을 가져오지 않고 핸드폰에 부착하는 카드지갑만 가지고 나왔으니 천원짜리 한 장도 없는데. 결국 내가 탄 칸에서는 한 푼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종이를 회수하고 다른 칸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이 내린 자리에 덩그러니 종이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아마도 내일이면 그 사람을 금방 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 또 다른 사연이 담긴 종이를 건네는 사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럼 또 마음이 불편해지고 잠시 동안 안쓰러워지고 그날따라 현찰을 갖고 있다면 쭈삣거리며 천원짜리 한 장을 건넬지도 모르겠다. 요즘 같은 때에 천원갖고 뭘 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만원짜리를 줄 만큼 배포가 크지도 못한다. 이렇게 시시때때로 편협하게 갖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다니, 알고 지내온 이가 망가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왔던 무력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만하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네 자매의 삶을 관통하는 남자인 윌리암 워터스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누나 캐롤라인이 죽게 된다. 윌리암의 탄생과는 별개로 딸의 죽음을 맞이한 윌리암의 부모는 둘 다 상실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윌리암을 방치하게 된다.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농구공이 튀어오르는 움직임에 위로를 받게 된 윌리암은 자기 자신을 안에 가두어 둔 채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틈도 없이 줄리아를 만나게 된다. 찰리와 로즈의 장녀인 줄리아는 주도적인 성격으로 윌리암의 바른 성정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와의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게 된다. 윌리암을 역사학도로 만들어 안정된 수입을 유지하고 자녀를 낳는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 윌리암은 부상으로 농구선수의 삶을 지속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정말로 교수의 삶을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줄리아의 제안에 이끌려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아직 명확한 자녀 계획이 없었던 줄리아는 쌍둥이 동생 중의 하나인 세실리아가 갑자기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되어, 화가 난 엄마 로즈가 세실리아를 내쫓으며 분열된 가족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아이 갖기를 결심한다. 세실리아의 아이가 태어나던 날, 아빠 찰리는 딸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축복하고 나오다 병원 복도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줄리아의 집안이 그려질 때에 찰리는 경제력은 꽝이지만 시를 암송하는 로맨시스트로 나오고 아내 로즈는 찰리의 그런 면을 아주 불만스럽게 여기며 오로지 텃밭에만 집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줄리아는 찰리의 장례식에서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문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빠를 잘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찰리의 친절을 기억하며 찾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찰리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며 위로하지만 로즈는 찰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미혼모가 된 세실리아의 상황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로즈는 파다바노의 화목한 가족이 살던 집을 처분하고 갑자기 플로리다고 떠나게 된다. 곧이어 줄리아의 딸 엘리스가 태어나지만 윌리암은 더 이상 줄리아의 계획에 편승하지 못하고 이미 구멍날만큼 커져버린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호수에 빠져 죽으려 한다.
줄리아와 막역한 사이인 둘째 실비는 이미 윌리암의 공허함을 눈치채고 있었고 딸들 중에 유일하게 아빠 찰리의 시 암송을 좋아했기에 윌리암과 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윌리암의 자살 시도 이후 줄리아는 큰 충격을 받지만 자신을 거부하는 윌리암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일자리를 핑계로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윌리암과 줄리아의 이별과 더불어 윌리암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져가던 실비는 용기를 내어 윌리암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고 윌리암을 살리기 위해 줄리아와의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형부를 사랑한 처제라는 통속적인 얘기가 될 수 있는 소재이지만, 윌리암이 어린시절 부터 겪은 커다란 상처의 구멍을 메워가는 실비의 헌신적인 사랑과 용감한 선택은 줄리아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도저히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납득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담겨져 있다. 실비의 용감한 결정이 비록 줄리아와 엘리스의 삶을 고독하게 만들고 파다바노의 자매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게 되지만, 종국에는 실비의 뇌종양이 다시금 자매들을 모이게 만들고 행여나 윌리암이 자신으로 인해 딸 엘리스의 삶을 망가뜨릴까 두려워 혈연 관계를 포기했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준다. 윌리암은 실비의 죽음으로 엘리스를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되고, 엘리스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빠 윌리암의 어처구니없던 과거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된다.
윌리암의 부모는 어린 딸의 죽음 이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견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어린 윌리암의 마음마저 구멍나게 만들 만큼 망가진 삶을 살다 떠났다. 어쩌면 윌리암이 실비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우울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또 다시 비극적인 선택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다바노 자매는 각자의 부족함을 잘 알았고 서로를 채워주고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에, 배신의 상처에 가슴 아파하며 의절한 상태로 아주 오랜 시간 지내왔음에도 단숨에 원래의 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구원과 화해의 장을 마련하게 된다.
언제든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삶의 커다란 생채기가 만들어내는 구멍을 방치해서 허우적 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머물며 정감어린 눈으로 바라봐주는 것, 당신에 대한 침묵의 지지가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윌리암과 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넌 뭘 원하니?
예전의 실비라면 대답이 두려워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제 그녀는 진실하고 강렬하게 자신이 되고 싶고 가장 진실하고 강렬하게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을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더욱 확실히 그랬다. 줄리아와 함께일 때는 다른 사람이었고, 쌍둥이와 함께일 때는 조금 더 솔직한 사람이었다. 실비는 자기 생각과 가정을 통제하고 자신과 싸우면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길로 스스로를 끌고 가려고 애썼다. 함께일 때 온전한 자신이 된 기분이 드는 사람은 딱 한 명, 윌리엄 밖에 없었다. 실비는 그와 함께일 때면 온전한 자신이었고 심지어 그 이상이 될 여유마저 느꼈다. 윌리엄은 어떤 판단이나 기대도 없이 그녀를 보았고, 실비는 그 여유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씩씩함과 명석함과 다정함과 즐거움의 가능성을 느꼈다. 이 모든 돛이 그녀라는 배의 갑판에 있었다. 그녀의 것이었지만 실비는 처음 보았다. 윌리엄의 병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기 전에는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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