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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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최진영 [썸머의 마술과학], 서유미 [토요일 아침의 로건], 최은미 [그곳], 구병모 [있을 법한 모든 것], 손보미 [끝없는 밤], 백수린 [빛이 다가올 때] 이렇게 7편이 실려 있다. 어느덧 해마다 짙은 가을이 오면 한해를 마무리하기 전에 김승옥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쓸쓸해지고 흩어지려는 마음을 억지로라도 다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는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의 삶의 이면,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웃들의 이야기 등등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나는 얼마나 더 이기적인 모습을 살아왔을까 막막하고 두렵기만 하다. 


대상을 받은 권여선 작가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제목만 보고 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도저히 예상이 되지 않았다. 사슴벌레를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시에 살다보면 아예 곤충이라는 벌레 자체를 마주하는 것이 희미한 일이 되어 버리고 그러다보니 아무 이유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현실에서 제목부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른바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펜션 주인과의 대화에서 그 말도 안되는 것 같은 문답이 어디까지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다보면 내가 정답이라 생각해 왔었던 범주의 영역이 때로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사슴벌레를 무시하고 혐오했던 시간들에 용서를 청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슴벌레가 들어올 만한 데를 찾을 수 없는데,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어디로든 들어와”라는 대답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진부한 질문에 “인간은 무엇이로든 산다”라는 말문이 막히는 대답을 전해준다. 커다란 실패와 배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란 막막함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자기 삶이 아니니까 막던지는 말처럼 들려오는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어”라는 무책임한 대답이 애써 감춰놓았던 지뢰의 뇌관을 건드리는 것처럼 폭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게 되면 나를 폭주하게 만들었던 그 허무맹랑한 대답이 결국은 현실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 나는 어떻게든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당연하고도 진부한 철학적 명제가 이루어지기까지 타인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버텨왔던 시간의 밀도를 감히 어떻게 측량할 수 있을까? 


백수린 작가의 [빛이 다가올 때]를 읽고 나서도 내가 생각해왔었던 두려움과 고통이 반드시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살 차이 나는 사촌 자매의 첫사랑의 감정에 대한 풋풋한 고백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시각을 상실해가는 큰 이모의 딸인 인주 언니가 엄마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욕망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란 화자의 추측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보기 좋게 엇나가게 된다. 화자의 인주 언니에 대한 묘사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중병을 앓게 되거나 장애가 생기게 되었을 때 혈육이라는 관계는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게 되는 현실의 무게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인주 언니는 큰이모를 돌보며 이른 나이에 철든 효녀로 자라매김하고 급기야 엄마의 꿈이었던 대학교수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엄마를 돌보며 반듯한 삶의 범위로만 살아온 인주 언니는 안식년을 계기로 화자와 뉴욕에서 재회하여 10개월 간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게 되고 스무 살이나 어린 카페 직원인 개리를 짝사랑하게 된다. 너무나도 뉘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몰입하며 행여나 인주 언니가 엄마 때문에 묻어 놓았던 욕망을 폭발시키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지만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의 삶의 살아가게 된다.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첫사랑의 감정을 십대가 아닌 사십대에 치르게 되었다는 통속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릴 뻔한 순간에 화자는 인주 언니와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독자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인주 언니가 시각을 상실한 큰 이모와 해질녘의 산책한 날들의 대화이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하루에 한 번씩 해질녁에 산책을 나섰어. 언니가 큰이모 이야기를 꺼내는 건 재회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더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앞이 안 보이는 큰이모가 언니의 팔꿈치를 부잡은 채로 둘은 동네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고 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엄마와 그렇게 꼭 달라붙은 채 매일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다른 사람들은 누리지 못할 축복이었어.’ 그리고 언니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걸으면서 언니는 큰이모를 위해 보이는 풍경을 묘사해주곤 했다고. ‘엄마와 여길 같이 걸었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애를 썼겠지. 사방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온통 부드러운 흰빛이라고. 눈 위로 떨어져내리는 햇살은 아주 연한 노란색이라고.’ 그렇게 묘사를 하고 나면 큰이모는 ‘이젠 내 차례야’라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그리고 큰이모는 시각을 잃은 후 얻게 된 예민한 다른 감각들을 활용해 큰이모가 느끼는 풍경을 언니에게 묘사해주었다. 바람이 어제보다 부드럽고 가볍구나. 눈 때문인지 사방에서 지난여름 우리가 쪼개 먹었던 수박 향이 나는구나. 까치 소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들리는구나. ‘엄마가 묘사해주던 그 세계 역시 정말로 아름다웠어’”(317-318)


지나간 시간들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선택이 아닌,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돌고 돌아 지금과 같은 상황을 비슷하게 마주하고 있지는 않을까 라는. 그래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 회피하고만 싶은 현실을 가치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 아니었을까란 어리석은 후회만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 불행으로만 여겨지는 순간이 오히려 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유와 근거를 찾아 타당함을 주장하기 보다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맞닥뜨린 현실이 주는 무게를 겸허히 받아내는 것만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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