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 우짖는 새 - 개정판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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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었다. 극장을 밥먹듯이 다니면서도 아주 유명한 영화들은 외면한 채 재미에 치중해서 영화를 보던 때가 있었다. TV에서 고전 영화를 방영해주는데 우연히 미션을 보게 되었다. 이미 스토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배우들도 다른 영화에서 익숙히 보아왔던 얼굴이고 OST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마치 그 영화를 몇 번이나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몰입이 되었다. 아메리카의 엄청난 대지를 폭력으로 점령하여 원주민들을 몰살시키고 영토 확장에만 열을 올렸던 당시 유럽의 몇 강대국은 가톨릭 선교를 수단으로 삼아 그들의 더러운 욕망을 정당화시켰다. 원시 생활을 해오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총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고 선교사를 앞세운 무리배들은 그들을 무지몽매한 이들로 치부하며 강제로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복속시켰다. 열 명의 악인 중에 한 명의 선인에 해당되는 가브리엘 신부는 원주민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성체거동을 하며 가브리엘 신부가 총을 맞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원주민의 땅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그들의 풍습과 문화를 무시한 채 선교라는 이름으로 내지른 폭력을 정당화시킨 것일까? 


어찌보면 유럽 교회가 일찌감치 무너진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불가지론자들이 갑자기 늘어나서 혹은 급격한 세속화라기 보다는 영화 미션의 사례처럼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리를 이룬 이들이 저지른 추악한 과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처럼 맹목적인 믿음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과도한 추앙은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성경에 나온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극단적인 행동의 밑바침으로 삼곤 한다.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사이비 종교가 난립하는 것은 신생교의 이름만 바뀔 뿐 사람들을 현혹케 하는 방법은 아주 유사하여 불안과 불확실에 사로잡힌 이들의 빈구석을 꿰뚫고 다가가는 이들의 얄팍한 상술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종교에 대해 무심하면서도 관대한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두 차례의 민란을 다룬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선교에 대한 생각을 되짚어 보게 해준다. 어릴 때 역사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살짝 등장했던 ‘이재수의 난’이 어설프게 기억이 난다. 조선 말기에 민란이 꽤 많이 일어났기에 그런 류의 난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을 천주교에서는 ‘신축교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제주시에서 남동쪽의 황사평에는 당시의 민란으로 가톨릭 신자 300여명이 죽임을 당하고 묻혀 있어 순교자들의 성지로 불리고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이후 약 200여년에 걸쳐 조정에 의해 기나긴 박해가 끝난지 20여년이 지난 1901년 제주의 신자들은 어째서 민란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일까? 1901년에 일어난 민란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순교터로 기억하는 황사평 성지와 반대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민심을 드높인 ‘이재수의 난’의 장두들을 기리는 삼의사비가 있는 제주는 종교가 정쟁의 도구로 사용될 시 어떤 기만과 만행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희생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희년을 맞아 한국가톨릭교회는 신축년에 일어난 사건의 과오를 반성하는 심포지엄을 갖게 되었고, 2년 전에 120주년을 맞아 신축교안과 이재수의 난이 더 이상 대립과 반목이 아닌 화해와 용서를 요청하는 화해의 탑을 세워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소설의 화자라고도 할 수 있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 거객 운양 김윤식으로 눈으로 지켜본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은 당시의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 부폐한 조정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제주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내륙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틈을 타고 목사로 임명된 이들의 수탈과 세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을지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소설에 틈틈히 묘사된 백성들의 가난과 허기짐은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물똥을 싸지른 어린 아기의 엉덩이에 묻은 똥을 키우던 개에게 핧도록 만드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세상에 매길 수 있는 모든 것에 세금을 매켜 가혹하게 수탈해 가는 봉세관과 마름들의 지독함은 치를 떨 정도로 매정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법국 신부들을 믿고 오만방자해진 교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을지도 짐작이 간다. 교세를 확장한다는 미명하에 법국 신부들은 세폐를 교폐로 연결지어 관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교인이 되지 않은 이들을 뱀의 눈으로 지켜보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을라치면 교당에 끌어다 매를 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니 과히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성교를 기쁘게 받아들일 백성들이 누가 있었을까 싶다. 


“교리책에 쓰인 말과는 실지가 영 딴판이더라 이거여. 천주 십계를 열심히 수계할 생각은커녕 도리어 욕되게 하니, 그런 개망나니들이 천당 가는 교라면, 난 죽어서 지옥불 속에 떨어질지언정 그런 교는 못 믿어. 마방이 안되려면 당나귀들만 들어온다더니, 시방 교당이 그 꼴이 아닌가. 왼 섬 몽니꾼, 심술패기는 다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쥬.(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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