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김희재 작가의 [탱크]를 읽었다.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본 적이 없었던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더욱 기대감이 컸고, '탱크'라는 짧은 제목이 주는 강렬함과 궁금증이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기에 충분했다. 우선 소설 속에 나오는 '탱크'는 가장 대표적인 뜻인 전쟁 중에 쓰이는 무기인 탱크와는 무관하며, 에어탱크, 물탱크처럼 무엇인가를 저장하는 공간을 뜻한다. 그래서 이 '탱크'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철제 컨테이너를 지칭한다. '탱크'의 실질적 모습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탱크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는 탱크가 컨테이너라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소설 속에 중요한 공간인 탱크를 중심으로 연결된 인물들의 이야기는 종교와는 무관하지만 믿음이라는 자신을 존재케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귀결된다. 첫 등장인물로 나오는 도선은 우연한 계기에 시나리오 작가로 주목을 받지만 그 이후에는 이러타 할 작품을 쓰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원래 그런 재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운이 억수로 좋아서 첫 번째 시나리오가 영화화까지 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도선은 영어 학원에서 만난 제임스와 사랑에 빠지고 제임스의 나라에 가서 살며 로사까지 낳고 이혼하기까지 기나긴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딸 로사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에 다다르자 도선의 무력한 육신은 잠에서 깨어나 실체적 고통과 마주하게 되고 어떻게든 성공해서 로사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도선의 꿈과 희망은 탱크라는 특정한 공간의 기도를 통해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하게 된다.
사실 탱크는 어떤 면에서 종교적 공간으로도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 세력을 불리는 사이비적인 의식 공간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산 중턱의 어느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진 탱크라는 이름의 컨테이너는 비밀스런 조직처럼 은밀하게 방문 예약이 이루어지고 탱크를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정해진 규칙이 종용되며 그곳을 방문한 이들은 홀로 어둠 속에서 기도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탱크를 방문하고 기도했던 이들은 탱크가 가진 영험함을 믿게 되고, 은밀하게 퍼진 소문은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들에게는 탱크에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탱크를 도입하고 유지 관리하는 황영경은 탱크에서는 어떤 특별한 예식도 없고 지도자도 없으며 특정한 교리도 없기에 종교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탱크가 사이비 종교의 시발점이 광신도를 양산해 낼지 모른다는 우려는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탱크를 방문한 사람들은 홀로 짙은 어둠 속에서 그저 혼자 머물다 나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도선을 시작으로 탱크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가는 가운데 어찌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양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평범한 공장 직원인 양우는 동료들에게 이런 사람으로 비춰진다. "그러니 너도 사람들이 큰일로 여기는 것을 큰일로 여겨라,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마라, 이 작업보다 더 중요한 자신만의 생활이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도,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도 그만두어라(39-40)"라는 양우를 챙기는 두수 씨의 말. 이런 양우에게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온 둡둡은 마테라 라는 가보지도 못한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마을을 매개체로 가까워지고 연인이 된다. 동성 연인이라는 둡둡이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를 떠나서 양우와 둡둡은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왔다.
탱크라는 공간을 통해서 믿음을 키우고 그럼에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이들은 머나먼 외계에 사는 희귀종이 아니라 그냥 내 옆에 있거나 때론 나일 수도 있는 부류이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등장한 도선과 양우와 둡둡, 그리고 손부경과 황영경을 이해하고 그들을 응원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이들을 한 명이라도 마주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최대한의 인심을 써서, 아량을 베풀어야 두수 씨 정도의 애정어린 말을 해 주는 것이 다가 아닐까? 그렇다면 양우와 둡둡처럼 소수로 남을 그리고 탱크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옥에서까지 탱크를 되살리고자 하는 황영경은 누구에게 이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종교적 신념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도 몰락에 빠지게도 만든다. 절대적 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때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믿음의 항로가 이탈한 이들을 마음껏 매도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의 묶여진 삶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선사할 수 있는 것처럼 들려온 감언으로 인해 익숙해진 무한 경쟁과 자본주의 틀은 누군가 도태되어야지만 내가 그 위에 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고, 소수로 지정된 이들은 언제든 실패자로 낙인을 찍을 수 있음을 정당화 한다. 결국 탱크라는 희망의 동아줄에 목매인 사람들은 두 번이나 발생한 야산의 불로 성찰의 공간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도선과 양우는 탱크라는 공간에서 떠나간 둡둡을 통해 서로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둡둡의 아버지 강규산이 아들의 부재가 가져온 고통을 매일매일 감내하며 아들과 함께 보았던 마테라가 나오는 영화를 되돌려보는 모습은 못내 안타깝고, 둡둡 또한 마테라를 가보지 않았음에도 양우에게 마테라가 나오는 영화를 줄줄 읊어 댈 수 있었던 것은 그 영화를 보던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시간을 몹시도 그리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더 서글퍼진다.
"결국 떠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들을 통해서 기억되고 회자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니, 어쩌면 삶과 죽음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그뿐이다.(162)"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261)"
"늘 그랬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267)"
#김희재 #탱크 #제28회한겨레문학상수상작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