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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평점 :
장류진 작가의 [연수]를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연수”, “펀펀 페스티벌”, “공모”, “라이딩 크루”, “동계올림픽”, “미라와 라라” 이렇게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어느 작품 하나 지루함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고, 이야기가 끝나갈 때에는 아쉬움과 더불어 마치 다음 회가 기약된 것처럼 몹시 궁금해졌다. ‘연수’와 ‘펀펀 페스티벌’은 다른 작품집에서 이미 읽었던 터라 재독하며 그때와 다른 감상을 기대하게 되었고, 나머지 단편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공모”에서 등장한 천의 얼굴이라는 이름의 회식 장소는 화자인 ‘나’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팀장이었던 김부장과의 연결 고리가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사 청탁이라는 부정적인 일은 지금에 이르러 무척이나 큰 사회적 이슈를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어디선가 남몰래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원래 있었던 사자성어처럼 통용되는 내로남불이라는 말처럼 내가 누군가의 부정한 청탁에 의해서 낙오되었다면 불같이 화를 내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겠지만, 막상 내 자식이나 나와 꽤 관계가 깊은 누군가의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 부탁을 할 수 있다면 한 번 쯤은 넌지시 말을 꺼내보고 싶지 않을까? 팀장인 김부장을 비롯한 화자가 팀장이 되기 이전의 회식 문화는 항상 그래왔듯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음주를 통해 단합을 강조하는 형태였다. 술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는 무관하게 화자 또한 직장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어 냈다. 특히나 천의 얼굴은 딱히 음식이나 분위기가 탁월하지 못함에도 김부장을 비롯한 남자 직원들의 야릇한 시선을 자아내는 천사장의 오목한 음영으로 인해서인지 화자의 직장 회식 장소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화자가 팀장이 되고 나서 팀의 회식은 천의 얼굴에서 2차를 하는 천편일률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와인바를 가서 분위기를 즐긴다던지, 영화를 보거나 볼링을 치는 식으로 변해갔고 천의 얼굴이 회식 장소에서 제외된 것은 화자의 의도도 어느 정도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흘러 화자를 팀장으로 앉힌 김부장이었던 김상무가 다짜고짜 화자에게 갑작스런 인사 청탁을 하게 된다. 화자는 알만한 사람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에 화가 나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완강히 거부하자 김상무는 결국 청탁의 대상이 천사장 딸임을 고백하며 천사장이 암에 걸렸다고, 그게 다 모질게 천의 얼굴을 외면한 화자의 탓도 있다고 질타한다. 아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분노 게이지는 더욱 올라가지만 화자는 김이사가 간곡히 내미는 입사서류를 외면하지 못한다. 자리로 돌아와 고민하는 도중 개인 트레이닝을 받던 트레이너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한 할머니 회원이 숍을 확장하는데 삼천만원의 자금을 융통해주었다는 이야기. 화자가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를 무상으로 도와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김상무의 청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하며 살펴본 천사장의 딸의 이력서와 면접을 통해 만나본 결과 정말로 만나기 힘든 똑부러지게 마음에 드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차라리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지원을 했더라도 충분히 뽑히고도 남았을 재원이었는데, 김상무의 청탁으로 혼란스러워지 마음을 다잡고자 수년 만에 천의 얼굴을 들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남겨둔 서류 봉투를 찾기 위해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때, 천사장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김상무의 뒷모습을 보게 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김상무와 천사장은 내연관계였을까? 화자가 의심했던 것처럼 천사장의 딸은 혹시나 김상무의 혼외자가 아니었을까? 란 드라마 클리세에 단골 메뉴인 소재들이 떠오르다가도, 어쩌면 김상무는 진심으로 천사장을 좋은 친구로 여기고 병에 걸린 그녀가 안타까워 슬픔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 본다.
“라이딩 크루”는 다 읽고 나서야 첫 부분에 등장한 자매와 할머니의 경악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촬영이나 실험으로 오해할 만한, 그리고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을 품을 만한 결말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딩 크루를 운영하는 화자는 여타의 동호회와는 차별화된 형태로 순수한 라이딩을 즐기는 모임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여 크루들에게 관심을 받고 리더로서 라이딩을 진행할 때 느껴지는 만족감에 도취해 새로운 크루를 모집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현재 자신과 호감을 나눈 여 크루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새로운 크루 중에 더 마음에 드는 이가 나타나지 않을까 고대하던 찰나에 화자에게 온 DM은 화자의 망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너무나 큰 기대에 눈이 가려졌던 것일까? 여자인줄 알았던 새로운 크루가 남자임을 알게 되지만, 이미 호감을 표현했던 터라 긴 머리의 남 크루를 받아들이게 된다. 다음 정모에서 처음 등장한 뉴 페이스는 이미 여성 크루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화자는 그동안 받았던 관심에서 벗어나자 묘한 질투심을 느끼며 새로운 크루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마치 종족 유지를 위해 거칠게 머리를 들이받는 거친 짐승의 본능처럼 화자는 여 크루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무모한 시도를 하게 된다. 초보자인 남자 크루가 나가 떨어질게 뻔한 아이유 고개를 라이딩하자고 제안한다. 라이딩에 있어서는 자신이 우월함을 돋보이고 싶어 시작한 코스에서 막상 새로운 남 크루가 독보적으로 앞서나가게 된다. 당황한 화자는 아주 비겁한 방법으로 남 크루를 넘어뜨리고 그가 전동기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는 그의 비겁함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자만심에 빠져 새로운 크루를 몰아세우지만, 화자의 질타에 맞선 새 크루의 논리도 만만치 않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어 급기야 모든 조건에 제외된 상태에서 경주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첫 부분에 등장한 이들이 지켜본 경악할만한 장면이다. 하기야 밤이라 해도 멀쩡한 남자 둘이 허물을 벗듯 알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경주를 한다는 게 보편적인 일은 결코 아니니 말이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