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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티파니 D. 잭슨의 [그로운 GROWN]을 읽었다. 해마다 사순시기가 되면 다니엘 예언서에 나오는 수산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마도 1년 중에 가장 긴 미사 독서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은데, 욕정에 가득찬 두 늙은이가 수산나라는 남편이 있는 여인에게 음욕을 품고 그녀를 계략에 빠뜨려 자기들과 관계를 맺도록 협박하다가 다니엘이라는 지혜로운 이를 통하여 신문을 받고 자기 꾀에 빠져 죽음을 맞게 되는 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쓰인 성경에도 당시에 나름대로 권력을 갖고 있던 이들이 음욕을 품고 어떤 비열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여러 가지 윤리적인 교훈을 찾아낼 수 있도 있겠지만 이번 작품과 견주어 생각해보면 힘이 있는 자들이 약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도 그루밍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게 된 것은 고양이가 혀로 제 몸을 핥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고양이처럼 털이 많은 동물들은 집사가 갈기가 달린 기구로 털을 빗겨주면 몹시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에 그루밍에 담긴 뜻은 그런 애정어린 행동을 뜻하지 않게 변질되어 버렸다. 그루밍 뒤에 성범죄라는 말이 붙지 않아도 가해자가 자신보다 어린 피해자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난 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성적 학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루밍과 더불어 가스라이팅이라는 말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사실 이런 범죄심리학적 용어들을 일반적인 사람들이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알려진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형태의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가해자로부터 벗어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기사들이 보도될 때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아니 왜 도대체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느냐고, 혹시 자신도 동의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런 반응은 가스라이팅의 세계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오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그루밍과 비슷한 형태로 가해자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스스로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지경까지 세뇌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나 이 소설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가수를 꿈꾸는 17살의 소녀 인챈티드가 처한 상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닷가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살던 인챈티드의 가족들은 어쩌면 우리나라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교육을 위해 비좁고 낡은 거주지를 선택하며 도시의 팍팍한 삶을 시작한다. 인챈티드는 맏딸로 같은 고등학생 동생인 셰이를 빼고는 나머지 3명의 동생들을 쪼꼬미라 부르며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돌보는 착한 딸이다. 할머니와 같이 살던 바닷가에서 당시 인챈티드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욘세의 노래가 아닌 휘트니 휴스턴의 오래된 노래를 부르며 막연히 가수를 꿈꾸게 된다. 어느 날 인챈티드는 흑인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유일한 다른 유색인종이라고 생각하는 갭의 부추김으로 오디션을 보러 간다. 인챈티드는 그곳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28살의 코리 필즈라는 가수를 만나게 된다. 코리는 마치 인챈티드의 숨겨진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오디션에 떨어진 인챈티드에게 비밀스러운 만남을 제안하게 된다. 인챈티드는 흑인 소녀에 가정 형편은 넉넉치 않고 가수가 간절히 되고 싶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상황에서 코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해마다 미국의 인종 차별에 대한 심각한 사건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듯이 소설 속의 인챈티드 또한 그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인챈티드를 비롯한 흑인 학생들의 미국 전역의 모임인 월앤드윌로우 라는 조직 안에서도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에 따라서 차등을 두려고 하는 내용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챈티드가 처한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소설 속에서 톱스타의 위치에 있는 코리가 내민 제안들과 그가 처음에 인챈티드에게 보인 상냥한 말투와 다정한 행동들은 인챈티드가 아닌 그 누구라도 너무나도 쉽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인챈티드가 꿈꾸는 가수가 되도록 도와주겠다니, 천군만마를 얻은듯이 행복했을 인챈티드가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코리의 투어에 따라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후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얼굴로 인챈티드에게 행한 감금, 폭력, 강간, 몰카촬영 등은 그루밍 성범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코리가 본색을 드러내며 인챈티드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 독자라면 응당 ‘지금이야, 어서 빨리 도망쳐’라고 외치게 된다. 하지만 인챈티드는 너무나도 순진하게 코리의 사랑을 믿고 그에게 사랑 받기 위해 호텔 방에 갇혀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가 얼음통에 소변을 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이 정도면 가수고 나발이고 정신 차리고 집으로 가야할텐데, 인챈티드는 코리가 윽박지르며 내민 가족들까지 얽힌 조건들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행여나 자신이 코리를 떠나면 파업으로 인해 수입이 줄어든 가족들이 어려움에 처하지 않을까란 걱정과 더불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버텨내면 코리가 인챈티드의 음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인챈티드는 이미 코리가 던져놓은 덫에 걸려 헤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명의 흑인인 십대 소녀와 엄청난 인기와 부를 가진 유명 가수가 어떤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누구 말을 믿게 될까? 저자는 인챈티드가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런 성범죄가 벌어졌을 때 도움이 되기 보다는 약점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것은 약자들이 궁지에 몰려 강자에게 어떤 선택을 종용 받았을 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특히나 몸만 어른이지 경험의 부족으로 손쉽게 판단을 내리는 10대들이 안전하게 그 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책임있는 어른들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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