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재영 작가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었다. 부제는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이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하길 꺼려하는 주제들이 몇 가지 있다.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성향과 더불어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걸쳐 있는 차별금지법과 생명 보호와 존중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바로 그러하다. 사전적인 지식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런 주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한 마디로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 당장 내 삶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도 그렇게 비춰질 것이다. 개를 농장에서 키우고 팔고 죽이고 먹는 것이 대체 우리 삶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것이다. 꽤 근래까지도 개를 먹는 것에 대해서 큰 거부감이 없던 관습 때문인지 반려견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었음에도 먹는 개와 키우는 개를 구분하거나, 개는 원래 집 밖에서 키우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나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양의 어느 배우가 '개고기를 먹는 미개한 나라'라는 비난 섞인 말을 기사로 접했을 때, 나 또한 '지가 뭔데 개고기 하나로 우리나라를 싸잡아 욕하느냐'고 발끈하곤 했다. 개식용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한 나라가 오랫동안 답습해온 문화를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인의 비아냥 거림으로만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니 개고기에 대한 문화 상대주의는 중동 어느 나라의 명예살인과 강제할례와 같은 인권 유린에 비판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230). 우리가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비난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니들이 뭔데 우리나라의 관습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 상대주의가 윤리적 상대주의와 맞물리게 될 경우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생명 존중에 대한 다양성을 토대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사실'을 '진리'인 것처럼 여길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동물권이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직 인권에 대한 인식도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한 것 같은데, 동물권이라니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까 혹은 반려견을 키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사치한 논쟁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동물권에 대한 수많은 사례 중에 유독 유기견, 번식견, 식용견에 대한 말이 많은 것 또한 단순하게 반려견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보신탕집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아예 고기를 먹지 않는 비거니스트가 되는 것은 조금 유난떠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이렇게 되기까지 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부끄러웠다. 


공장식 축산 산업에 대한 문제와 심각함은 다른 책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건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작가들의 책에서 왜 그런 결정을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는지, 그들의 선택을 종요한 인식의 전환은 어떤 계기였는지 어렴풋이만 짐작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르포라는 부제가 달린 것처럼 그 어떤 설명보다 직설적으로 개농장의 실태를 보도하고 있다. 뜬장에 갇힌 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느껴져 몸서리가 처진다. 그리고 그렇게 개들이 돈이 되는 물건 취급을 받으며 팔려나가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법규에 분노가 차오른다. 세금을 내지 않는 불법을 저지르며 썩어가는 음식쓰레기를 사료로 먹이고 이득을 취하는 개농장 주인에게 던진 '개고기를 먹는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이 없는 부분은 참담함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해마다 10만 나리의 개들이 죽음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단 한 마리의 개를 구조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분투를 읽으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을 가슴 깊숙이 되새기게 된다. 결국 동물권에 대한 자각과 성찰은 인간이 만물의 주인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이 피조물을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과 종이 다른 동물이라 할지라도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종보다도 앞서 기억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의 저촉을 받지 않음에도 가장 미약한 동물을 자발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피터 씽어의 말처럼 동물 애호가라는 표현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로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를 배제한다. 동물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고 연민을 확장하는 일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의 것이다.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씽어가 비유했듯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유생인종 애호가라 부르지 않고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여성 애호가라 부르지 않는다면,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사람을 동물 애호가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49-50)"


"동물실험에 반대하는 국제 동물보호단체인 '크루얼티 프리 인터내셔널'이 공개한 영상에서는 드레이즈 테스트를 위해 상자에 갇히 토끼가 목을 돌려 옆에서 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의 눈을 정성스레 핥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에 의문을 품게 만는다. 우리는 '짐승 같다'는 표현을 잔인함으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도덕적인 무엇으로 사용하지만 저 영상 속에서 인간적인 것은 누구인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같은 처지의 친구를 돌보는 토끼인가, 아니면 토끼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인간인가?

만약 담뱃갑에 붙어 있는 경고문처럼 식품에, 화장품에, 의류에, 침구에, 그 제품의 생산을 위해 희생된 동물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 동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고문이 없으므로 기억은 의지의 문제가 된다.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장도 왜곡도 없이 동물은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같은 종의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책임도 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 내가 갔던 그 장소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인간다움이라고 믿는다.(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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