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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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작가의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이다. 제목과 부제부터 묵직한 어두움을 안겨준다. 의학과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두배 이상으로 연장시켜주었다. 이제는 백세시대라는 말이 그냥 막연한 꿈이 아니라 실재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고 오래 산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체감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인간의 삶이 남긴 흔적은 먼지처럼 흐릿할 뿐이지만 개개인이 겪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은 참으로 지리멸렬한 시간이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안락사'라는 단어는 조금 생소한 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죽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안락사와 자살이 뭐가 다르냐는 듯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생명연장의 가속도가 붙으면서 또한 웰빙과 더불어 웰다잉이라는 말이 번져가면서 안락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조조 모예스의 [미비포유]라는 소설을 읽기 전에 스위스에서 실제로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설에 나오는 이그니타스라는 병원은 실제하며 그곳에서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시기에 자발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벌써 수년 전이니 아마도 지금은 스위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어느 곳에서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실행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18년 연명의료 결정법이 실행되었다. 사실 연명의료 결정법이 법적으로 공표되고 법적 효력을 갖기까지 논의된 가장 큰 화두는 인간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인정할 수 있느냐, 아니야의 문제였다. 오용과 잘못된 이해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와 불필요한 치료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의 상황을 받아들여 임종기에 이른 사람에 한해서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문서가 법적 효력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시 이 법이 국회에 상정되고 공표되기까지 가장 염려한 부분이 바로 안락사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란 우려였다. 이런 우려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얼마전 어느 국회의원이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취지의 법을 상정했기 때문이다. 


연명의료 결정법에서도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존엄한 죽음'이라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연로한 어른들은 아직 큰 병을 앓고 있지 않아도 혹시나 갑자기 중병을 얻어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어차피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느니 차라리 좀 더 상태가 원만할 때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의 일반적 상태가 아닐까 싶다.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기저귀를 차고 배변을 배출해야 하거나 제대로 먹지고 마시지도 못하고 가족들에게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될까 두렵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존엄한 죽음이라는 표현은 아직 죽음과는 먼 거리에 있는 건강한 사람들의 시선이 아닐까? 막상 나 자신이 생사를 오가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온전히 대소변을 자발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이 차이가 과연 임종자에게 존엄함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죽음 이후의 경험을 듣고 볼 수 없기에 죽는 자가 존엄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이 스스로 존엄함을 느끼고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삶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죽음 또한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조작하고 선택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존엄한 인간임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안락사 현장에 대한 동반기는 페이지를 넘기기에 참으로 힘든 시간이지만, 가족이 아닌 제3자의 시선으로 안락사를 선택한 이의 여정을 좀 더 객관적으로 남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권리로 생각하며 안락사를 법으로 제정하고 싶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생명연장이라는 꿈같은 일이 가능해지는 세상에 이렇듯 개인주의적인 선택의 만연이 팽배해질 상황에 저자의 맺음말이 더욱 깊이있게 와닿는다. 비록 죽음은 한 개인의 소멸인듯 하지만 그 개인이 함께한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속된다. 나의 삶을 당장 끝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나의 소멸 이후에 살아갈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은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숙제이니 그 숙제를 잘 마무리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부재의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최고의 스승이 가르치는 과목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곧 사랑을 일깨운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죽음보다 더 깊었던 무지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그 무지란 사랑하는 능력을 그냥 묻어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전 존재를 거는 일'입니다. 나의 관심사나 이기적 욕구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나를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 갑니다.(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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