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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전
정은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정은우 작가의 [국자전]을 읽었다. 전래동화나 고전에서나 나올 법한 누구누구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 전’자가 들어간 소설이라니. 뭔가 진부한 냄새가 나면서도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오히려 신선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국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을테지만, 이국자라는 이름은 얼마나 많은 놀림을 당했을까라는 생각과 더불어 뒤에 전자를 붙이니 또 그럴듯해보였다. 이야기는 국자의 딸 미지가 독립하려는 시도를 번번이 놓쳤던 과거의 회상에서부터 시작된다. 국자와 아버지가 미지가 독립 못하도록 억지로 막아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독립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국자는 언제나 미지에게 맛깔스러운 식사를 준비하여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나면 독립을 반대하는 국자의 의견에 매번 KO 당하는 것이었다. 미지가 엄마인 국자가 요리해준 음식에 대한 묘사 부분은 정말 얼마나 맛이 좋고 입맛에 딱 맞으면 독립하고자 하는 그 열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인지 국자의 요리실력에 대한 궁금증이 마구마구 생겨났다. 그렇게 미지는 엄마의 요리에 뭔가 감춰진 비밀이 있지 않을까란 의구심을 갖고 김치 담구는 법부터 배우려 하지만 국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미지에게 간단한 레시피만을 알려줄 뿐이다. 이래서는 독립한 이후로의 식생활은 보마마나 뻔할 테니, 어쩌면 독립을 미룰 적절한 핑계를 마련한 것일지도 모른다.
국자와 미지의 독립을 둘러싼 음식 이야기가 펼쳐질 때만 해도 능력자와 반동이 나오는 히어로물이 등장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완전한 사실주의 소설인지 알았더니 국자를 비롯한 수많은 숨겨진 능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는 판타지가 삽입되어 있었다. 마블 시리즈에 환장한다면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소설 속에서의 히어로들의 등장은 뭔가 거부감이 느껴지곤 한다. 어차피 소설은 가공할 만한 이야기가 삽입되고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부풀려진 내용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되는 것과 가능성이 제로인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므로 히어로들의 등장 요소는 차치하고 국자의 과거 이야기와 사랑 등의 전개는 그들이 가진 능력과는 무관하게 현대 사회의 많은 모순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실제로 어딘가에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이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을 되돌리거나, 순간이동, 염력, 투시와 같은 능력을 가진 이들을 테스트해서 등급으로 나눌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는 국가에서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 테스트하여 능력을 가진 이들이 국가에 충성하는 이들일지 아니면 능력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국가에 반하는 이들일지 선별하는 기준의 모호함을 우선적으로 비판한다. 차라리 아무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가겠지만, 혹시나 하는 바람에 테스트를 받아 부적합한 능력을 가진 이로 판별이 된다면 강제로 교정시설에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적합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등급으로 나누어 최고 등급에 속한 이들은 스타 대접을 받으며 영웅이라는 칭한다. 이런 우상화에 길들여진 국민들은 능력을 가진 이들 중 영웅에게는 온갖 찬사와 관심을 베풀지만 부적합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혹시나 이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며 반동이라는 적대세력을 간주한다.
이렇게 능력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국자는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먹은 이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일부러 낮은 등급을 받아 튀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국자의 친구 경남 글로리아 또한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고 있지만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낮추어 국자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들이 훈련소에 있을 때 각광받던 새로 지워진 아파트 단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되고 영웅이라 칭송받던 능력자들은 때마침 해외순방 중이라 구조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보다 등급이 낮은 김숙녀와 어윤경이 무너진 건물에 깔린 이들의 구조에 앞장서게 된다. 이미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친 사고와 언제 이어질지 모를 붕괴에 두려움을 느낀 영웅과 높은 관료들은 어윤경에게 책임을 미룰 생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도 사고를 되돌릴 수는 없으며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도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어쩌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의 능력은 이미 우리 사회가 무수히 세밀한 간격으로 등급을 매겨 구분해 온 것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왔지만 그러한 시선으로 한 평생 살아가는 것은 삼시 세끼를 항상 잘 챙겨먹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재난 사고와 적합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테스트와 같은 설정은 비단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굴직한 획을 그은 사건들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자와 미지의 아버지가 된 윤수일 또는 박종일과의 사랑의 연대기는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며 비정한 사회구조 속에서도 미지가 선생님으로서의 실패를 딛고 일어날 수 있는 근원이 되지 않았나 싶다.
“회피는 생선회 접시 가장자리에 놓인 레몬 조각과 같았다. 신경썼다는 티를 은근히 내면서도 횟감에서 비린내가 나면 레몬즙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핑곗거리가 되기도 했다. 막상 레몬 조각을 짜다보면 레몬즙은 회가 아니라 애먼 손만 흠뻑 적시기 마련이었다.(346-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