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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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지 김의 [미라클 크리크]를 읽었다. 11살 때 가족들의 이민으로 한국계 미국인이 된 저자의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변호사로서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삶의 경험이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허구의 인물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등장 인물들에 대한 내면적이 묘사와 그들의 갈등과 주저함이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솔직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적인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법정 드라마의 형식으로 회피하지 말고 용기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특히나 모국어를 쓰는 타지가 아닌 언어와 문화와 풍습이 다른 먼 타지에서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그 처절한 비애와 자괴감이 한 순간에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필체로 묘사한 부분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겪었던 시간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견뎌왔던 체념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내와 같은 감정들이 때로는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저자의 생애처럼 미국으로 이민간 박 유와 그의 아내 영 그리고 그들의 딸 메리(매희)가 어느 외딴 곳에서 헛간에 고압산소요법 장치를 마련하여 현대 의학의 치료나 약물로 쉽게 치료되지 않는 병과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미라클 서브마린’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고압산소실에서 치료를 받던 이들에게 일어난 화재로 시작된다. 산소를 주입하는 관에서 누군가 담배불을 놓아 헨리라는 어린이와 자폐아 어머니 킷이 죽게 되었고 산소탱크가 폭발하며 박 유는 불구가 되고 메리는 한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 이후 과연 그들을 죽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재판이 시작된다. 재판 과정에 박 유의 가족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의사 부부 맷과 재닌이 등장하고 미라클 서브마린에서 치료를 받던 헨리의 엄마 엘리자베스, 가장 장애 상태가 심했던 로사의 엄마 테리사, 그리고 검사 에이브와 변호사 섀넌이 등장한다. 재판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증인 심문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에 집중하지 않으면 범인이 누군인지 예측하는 과정에 혼란이 생기곤 한다. 재판날이 하루 하루 늘어갈수록 처음에 가장 유력했던 범인인 엘리자베스의 증거들이 무력해지고 또 다른 용의자로 맷과 재닌 그리고 박 유에 이어서 결국 메리가 범인임이 밝혀지게 된다. 


박 유가 운영하는 미라클 서브마린에서 화재가 일어나게 된 원초적 계기 중의 하나는 고압산소요법으로 자폐아를 치료하려는 이들을 반대하는 시위대의 데모 때문이다. 이들은 자폐는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 갑자기 생겨난 병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생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폐아 자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들에게 화재 위험성이 높은 고압산소요법과도 같은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은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유명 연예인이 자신의 발달장애 자녀와 함께 방송에 출연하며 자녀를 키우는 과정을 보여주곤 한다. 어쩌면 자폐나 발달장애를 지닌 자녀들은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손길이 필요할지 모른다.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아기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너무나도 고되고 온전히 아기를 위해 자기 생활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정도 양육 기간이 지나고 나면 아이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특수한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보는 일은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내 아이를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 아이를 돌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죽을 것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그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알 수 있을까? 메리의 자백을 이끌어내며 메리의 엄마 영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머리속으로 그리며 만약 정전이 되지 않았다면, 잠수가 지연되지 않았다면, 맷의 쪽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메리가 재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박의 담배를 메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가정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영은 깨닫게 된다. 그런게 바로 인생이라고. “모든 인간은 백만 개의 경우의 수가 얽히고설킨 결과물이었다. 백만 개의 정자 가운데 하나가 정확한 시간에 난자에 도달해 탄생하는 인간은 천분의 일 초라도 어긋났다면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고 만다. 하나씩 놓고 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사소한 것들 수백 개가 모여서 -우정과 사랑이 싹트고 사고와 병이 생기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다.(506)”


“영어를 쓸 때의 박 유는 한국어를 쓸 때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대로, 언어의 유창함이 한풀 꺾이면서 유능함이나 성숙함도 한 꺼풀 같이 벗겨지는 이민자들은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 버전의 그들이 되고 만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 그는 자신이 맞닥뜨리리라 예상한 어려움에 대한 대비를 했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번역해야 하는 논리적 어색함이나, 맥락에서 단어의 뜻을 유추해야 하는 지적 부담감, 한국어에는 없는 소리를 내기 위해 혀를 익숙하지 않은 위치에 두어야 하는 신체적 난관, 하지만 그가 알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이런 언어적 불완전성이 바이러스처럼, 발화 능력을 넘어 다른 부분까지 오염시킨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사고와 태도, 그리고 성격까지도. 한국어를 쓰는 그는 배울 만큼 배운, 존경받아 마땅한 권위적인 남자였다. 영어를 쓰는 그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못하며, 매사에 자신 없고, 걱정하고, 서투른 머저리였다. 한마디로 바보.(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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