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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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었다. 얼마전 읽은 [최소한의 선의]에서 "도대체 왜 법은 범죄자들에게 관대할까"라는 주제에서 이 소설이 언급되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청소년은 성인보다 가볍게 처벌받거나 처벌 대신 보호처분을 받고, 이에 대한 불만 여론도 높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처럼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소년범죄에 대한 분노를 다른 소설은 쏟아지는 공감을 얻는다.(142)" 우리나라에서도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형벌 판결이 너무 약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자주 발생되곤 한다. 특히나 소설의 배경처럼 청소년 범죄일 경우에는 강력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소년법이 적용되어 성인들과 같은 형량을 받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다보니 범죄를 저지른 어떤 아이는 자신은 어리기 때문에 큰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비아냥 거려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갱생이라는 과정을 거쳐 다시금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과 별개로 아마도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이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아이가 그럴리 없다며 자기 자식을 감싸기에 바쁠 것이다. 


예전에 '밀양'이라는 영화를 아무 사전 정보없이 보다가 말미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전도연 님의 열연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수작으로 알려졌는데, 실제 내용을 다 보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주인공 신애는 바람난 남편을 교통사고 잃고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새로운 삶을 살려고 다짐한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이가 유괴당해 죽게 되고 교회를 다니며 유괴범을 용서하라는 말에 마음이 변화가 생긴것처럼 보인다. 교도소에 가서 막상 유괴살해범을 마주하니 그자는 오히려 평온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하느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그제서야 신애는 분노와 슬픔에 울부짓으며 아들을 잃은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느냐고 목놓아 외친다. 


소설에서 고등학생이 된 에마는 친구들과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또래의 불량한 3명의 소년에게 납치되어 유린당하다가 과도한 약물주입으로 죽게 된다. 아무 생각이 없는 10대 후반의 소년들은 에마를 강가에 유기하게 되고 에마의 아버지 나가미네는 딸을 기다리다 불안감에 휩싸인다. 3명의 소년 중 실제 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마코토는 나가미네에게 아쓰야와 가이지의 범죄를 인정하고 그들은 은신처를 알리는 메시지를 남긴다. 분노에 휩싸인 나가미네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아쓰야의 아파트에 잠입하여 그들이 딸을 유린하는 비디오를 보게 되고 때마침 들어온 아쓰야를 보고 광분하며 그를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잔인한 복수를 마친 나가미네는 비디오에 등장하는 또 다른 범죄자 가이지를 찾아 남은 복수를 하고 자수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후의 이야기는 나가미네가 복수를 하기 위해 어떤 경로를 거치는지, 그리고 나가미네를 막기 위해 범죄자 가이자를 보호할 수 밖에 없는 경찰들의 수사 진행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그러한 과정 중에 경찰임에도 나가미네의 마음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오리베와 같은 형사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 외에도 직접 강간과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비겁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마코토의 반응과 그의 아버지와 다른 소년들의 부모들도 피해자와 나가미네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죄하려 하기보다는 귀찮은 현실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에 반해 소설 후반에 등장한 와카코는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고 외딴 곳에서 아버지와 팬션을 운영하며 지내다 복수를 하기 위해 팬션에 머물던 나가미네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가 복수를 않도록 마음 깊이 그 슬픔을 헤아리며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결국 나가미네는 도쿄의 우에노역에서 가이자를 엽총으로 겨누고 살해하려다 와카코가 외친 그의 이름을 듣고 주저하는 사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너무나도 슬픈 결말이고 결국 희생당한 이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파탄낸 장본인은 경찰에 호송되어 끌려가고 끝난다. [최소한의 선의]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생각해보자.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재판에 참여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 중에 실제로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가 자주 벌어지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법원에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자기 사는 집에 도둑이 든 판사는 이후 주거침입이나 절도범에 대해 엄청나게 형을 세개 내린다는 말이 있다. 그게 인간이다. 남이 일일 때와 자기가 직접 겪었을 때는 천양지차다. 정작 범죄로 인한 피해로부터 평균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법을 운용한다면, 실제 범죄 피해자들의 공포와 분노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153)"


소설을 읽는 내내 나 또한 형사 오리베와 같은 무력함과 의구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는 도대체 뭔가? 오리베는 생각했다. 법을 어긴 자들을 잡는 게 우리 일이다. 그럼으로써 악을 없앤다는 게 표면적인 목표다. 

하지만 이런다고 악이 없어질까? 체포해 격리하는 건 달리 보면 보호다. 일정 기간 '보호'된 죄인들은 세상의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 대다수는 또 다시 법을 어긴다.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어떤 보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나? 오리베는 의문을 품었다.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 '악'을 벨 힘을 가지고 있나?(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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