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의 황소
한이리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이리 작가의 [게르니카의 황소]를 읽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추상화를 보면 도대체 이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고개를 가우뚱 거리게 된다. 그림에 담긴 심오한 뜻을 알 필요는 없다. 그저 명화를 감상하고 각자가 느낀 바를 마음 속에 담고 타인을 조금만 더 이해하고자 하는 너그러움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땡큐가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작품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어디선가 내가 감추고만 싶은 진실을 향해 황소가 뿔을 내밀며 내 심장으로 돌진해 올 것만 같았다. 주인공 케이티가 심각한 자아분열을 겪으면서도 진실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한국인 10살 된 소녀가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된 계기에 대해서부터이다. 10살에 입양이 되었지만 자신의 이름조차 잃어버린 케이티는 한국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교도소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연을 갖고 있다. 케이티를 입양한 칼 번햄은 정신병원의 부원장이었기에 케이티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유전적인 영향을 받아 친모처럼 자라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 위해 어릴때부터 케이티에게 약을 복용하도록 했다. 케이티는 입양된 가족들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가 미술관에서 <게르니카>를 보게되고 그녀의 잠재된 미술에 대한 재능에 눈을 뜨게 된다. 케이티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지만 아버지가 주는 약을 복용하고는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약을 끊고 17살에 가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다시 아버지에게 잡혀온 케이티는 다시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하게 된다. 약을 끊고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케이티는 병원의 환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다. 


우연히 병원의 비밀스러운 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방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를 복제해 비밀의 문을 열게 된다. 그곳에는 에린이라는 실제로는 케이티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이 갇혀 있었다. 에린은 케이티가 간절히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보여주며 자신의 그림을 갖고 싶다면 거래를 하자고 제안한다. 케이티는 에린의 그림을 갖고 싶어 에린을 탈출시키고 아버지와의 연락을 끊게 된다. 케이티는 니콜을 통해서 DD에게 그림을 보여주게 되고, 점점 케이티의 그림은 인정받기 시작한다. 무려 1년 동안이나 에린을 감금했다고 착각하며 케이티는 백여점이 넘는 그림을 그리게 되고, 결국 돈이 바닥나자 다시 니콜에게 연락을 취해 그동안 그린 그림을 DD에게 보여준다. 케이티는 일약 미술계의 핫한 스타가 되고 정체를 숨긴 신비주의 화가가 된다. 하지만 니콜이 케이티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고 자신을 구타하고 도망친 에린이 실제하는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하려 애쓰게 된다. 결국 에린은 자신이 만든 또 다른 자아라는 것을 알게 된 케이티는 아버지의 병원의 비밀의 방은 곧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린을 다시 마주한 케이티는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케이티는 살인을 저지른 엄마와 그녀에 의해 죽은 아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버지 칼 번햄의 소아성애적인 욕구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케이티의 한국 이름은 수진으로 뉴욕에서 청과점을 운영하던 수진의 가족은 갈비를 먹고 오던 칼 번햄이 수진을 노리고 벌인 우발적인 교통사고의 보상금을 무마시키기 위해 수진을 칼 번햄에게 넘기게 된다. 결국 수진을 케이티로 만들기 위해 있지도 않는 끔찍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전락시켰고 뇌전증의 전조가 있던 케이티에게 지속적인 약물 복용을 통해 오랜 시간 그녀를 지배해왔던 것이다. 약물 복용으로 정신분열 증세가 심했던 케이티는 에린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냈고 엄청난 미술 작품을 창조해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케이티가 모든 사실을 알아내고 자신을 감금하며 망가뜨린 아버지에게 복수를 마치며 자신의 행적을 쓴 일기를 태우기 직전까지의 고백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후벼파는 통각의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소설과 동일한 설정은 아니더라도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로 감금당해 인생을 저당잡힌 이들의 사연이 떠올랐다. 어쩌면 저자가 그렇게 기구한 운명의 삶을 살아온 이들을 위해 이 책을 바치려 한 것은 아닐까 기대해본다. 


“나는 이제 널 불태워 없앨 것이다. 오래 전 게르니카를 함락시켰듯 널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나면 이제는 영영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세상 어느 역사책에도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 나라에서 결코 가능할 수 없는 사랑을 가능하도록 만들어보려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결코 속을 수 없는 거짓에 속아보려고 내가 얼마나 많이 눈 감았었는지. 결코. 갚을 수 없는 원수를 갚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했고, 결코 가능할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꿈속을 헤매었으며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는지. 

정말로 영영 아무도 모를 것이다. 머지않아 나 자신조차도 그러니 이제는 안녕. 나는 지금 이 노트와 함께 그 모든 신기루들을 불태우고 진짜 세상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다시는 그 어떤 환상에도 속지 않도록 두 눈을 똑바로 뜨고.(310-3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