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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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 작가의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았음에도, 또 개항기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차이나타운 지역을 밥 먹듯이 지나다녔음에도 점점 낙후되어 가는 지역적 현실을 개탄할 뿐 제물포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개화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 소설을 읽기 얼마 전에 우연히 대불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왜 지금까지 그 호텔을 우연히도 본적이 없을까 의아했는데 이미 철거되어 자리만 남아있기 때문임을 알고 조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몇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미스터 션사인> 드라마에서 쿠도히나가 운영하는 서양식 호텔이 극의 중심적인 장소가 되고 그곳에서 코히를 마시며 허세를 부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기에, 지금까지 대불호텔이 남아 있었다면 드라마에서 재연된 장면들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제목은 [대불호텔의 유령]이지만 요즘 유행하는 좀비나 귀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환청에 시달리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헛것을 보거나 토템적인 요소가 아닌 인물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내면의 변화를 다른 목소리로 대변하고 있다. 소설의 형식 또한 독특한데, 화자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중간에 다른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액자식 구성이 몇 겹으로 연결되어 있는듯해,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이 사람이 주인공인가 싶으면, 또 다시 다른 비중있는 인물이 등장하여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흐름은 갈팡질팡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화자인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엄마의 친구 보애 이모의 아들 ‘진’을 통해서 보애 이모의 엄마 박지운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나의 엄마와 보애 이모는 둘도 없는 절친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의례 그렇듯이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연락이 끊기게 되지만 서로를 잊지 않고 지냈던 덕에 다시금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보애 이모의 엄마 박지운은 당시 드물게 청인, 지금은 화교라고 불리는 이와 결혼했지만 남편 뢰이한이 죽고 나서 재혼을 하게 되고 딸에게 무척이나 매정한 엄마로 그려진다. 처음 뢰이한 이라는 청인의 이름이 등장했을 때에는 박지운과 뢰이한의 애틋한 사연이 주된 스토리가 될까 생각했는데, 뢰이한이 일했던 중화루에 머물던 고연주와 지영현이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후의 전개는 고연주와 지영현이 어떻게 대불호텔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장기가 머물게 된 미국인 셜리와의 관계에서 극의 고조는 절정에 달한다. 특히나 지영현은 월미도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아 홀로 살아남아 인천으로 건너온 인물로 6.25 전쟁 발발 후 좌익과 우익의 어처구니 없는 대립으로 형제와 이웃이 서로를 죽고 고발하는 악연이 된 역사적 배경을 삼고 있다. 

고연주와 지영현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설가 나는 ‘진’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자신의 소설을 완성시킨다. 진의 할머니 박지운이 치매를 앓으며 그때 그때 이야기를 다르게 전했다면 중화루의 지금까지도 이어온 이청화를 통해서 전혀 다른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셜리, 고연주, 지영현, 뢰이한이라는 인물들이 남긴 흔적들은 폐허가 된 흔적을 떠도는 망령이나 유령이 아니라 나를 안심시키시려는 고단한 시기를 보낸 이들이 전하는 위로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느닷없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나는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해준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시련은 시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고통 이후 단단해지는 마음이나 냉정한 판단력 같은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여유 잇게 만드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 알겠다. 물질적인 안정일 수도 있고, 정서적인 휴식일 수도 있고, 새로인 닥쳐온 또다른 고난일 수도 있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여유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 불가해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지속되는 원한.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 가라앉지 않는 분노.(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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