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집 -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 아무튼 시리즈 44
김혜경 지음 / 제철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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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님의 [아무튼, 술집]을 읽었다. 부제는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이다. 아무튼 시리즈 44번째 책이다. 얼마전 오랜만에 외식 약속이 있어 식당에 먼저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10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아서 응근 부아가 치밀어 오르며 어서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약속 시간을 정했던 카톡 대화방을 여는 순간 약속 시간이 1시간 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마이 갓!! 내 인생에 약속 시간을 착각해서 이렇게 일찍 나온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라는 허탈함과 더불어 남은 시간을 어정쩡하게 남들 먹는 모습을 지켜볼 수 만은 없어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는 어색한 인사를 남기고 근처의 독립서점을 가보았다. 읽고 싶은 책은 이미 대부분 사놓은 터라 서점만 구경하고 오려고 했는데, [아무튼, 술집]이 눈에 띄었다. 책 분량도 무게도 남은 시간 동안 읽기에는 최적화된 책이라 생각하고 일행을 기다리며 술집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약속을 마치고 읽던 책들을 보느라, 다른 신간을 읽느라 젖혀 놓았던 책이 드디어 다시 나의 눈에 들어올 차례가 되었다. 

약속을 착각했던 덕분일까? 책의 부제도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들 치고 술집을 적게 다닌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모임은 식사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술자리 그리고 이어지는 2차 술자리는 새로운 맛집과 새로운 분위기 또는 익숙하고 특색있는 맛집과 술집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딱히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술집의 분위기와 왁자지껄함은 긴장된 사회생활의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풀어주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보다 오히려 학생 시절에 술집을 많이 다닌 것 같다. 당연히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대학생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매번 끌려다녔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술집을 따라가는 시간은 거의 군복무만큼이나 당연하고 해내야만 하는 거대한 숙제였다. 무슨 쌍팔년도(여기서 말하는 쌍팔년은 1988년이 아니라 1955년으로 당시에는 단기를 사용하던 시절로 단기 4288년이라 쌍팔년이라 불렀고 흔히 지금이 쌍팔년도 시절도 아니라고 하는 말은 한국전쟁 후 열악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다)의 시절도 아니었지만 술로 군기를 잡는 문화는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기 전까지 지속되었고 나는 거의 십여년 동안 그 시절의 마지막 희생양으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지금도 가끔 나이드신 신자들과 식사를 하다 내게 권한 술을 마다하면 한결같은 조언을 듣곤 한다. ‘이제 술 좀 배우셔야겠네요. 자꾸 마시면 늘어요. 제가 술 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잊고 있었던 술자리의 폭언과 추악한 기억들이 떠올라 갑자기 혈압이 오르며 불같은 화를 추스르느라 억지 웃음을 짓게 되다. 그분들이야 당연히 아무런 악의없이 어쩌면 진심으로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건넨 말일 수도 있음을 알기에 정말로 화를 낼수는 없다. 그래서 한때는 진짜 나도 술 좀 잘 마셔서 싸나이들의 세계를 평정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아무리 그런 큰 야망을 가진다 한들 나는 영원히 술꾼이 될 수 없다. 

그래도 [아무튼, 술집]은 재미있다. 저자가 소개한 술집을 다 가보고 싶다. 못 마시는 술이지만 맛이라도 한 모금 머금고 싶다. 망원동이 그리 핫하다는데 나도 망원동의 새벽길을 걸어보고 싶다. 쿠바의 럼주도, 영화 덕분에 더 유명해진 모히또의 몰디브도, 파인애플이 화살표로 꼿힌 피냐 콜라다도 마셔보고 싶다. [아무튼, 술집]을 읽고 났더니 코끝에 알콜향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만 같다. No, No 재팬이지만 올림픽 기간이니 조만간 하이볼이나 한 잔 하러 가야겠다. 

“기실 술자리에 대한 기억은 ‘우리 어제 좋았지’ 정도의 대략적인 느낌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취기가 무르익을수록 술자리는 지나친 동어 반복, 통제를 벗어난 감정 표출, 행위예술 수준의 보디랭귀지 등으로 범벅되니까. 그런 자리를 거듭해본 분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망각은 괜히 선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모두의 품위 유지를 위해 적당히 흘려보내는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술자리, 그런 의식 있는 자리들의 집합소가 술집이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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