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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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우리가 쓴 것]을 읽었다. ‘매화 나무 아래’, ‘오기’, ‘가출’, ‘미스 김은 알고 있다’, ‘현남 오빠에게’, ‘오로라의 밤’, ‘여자아이는 자라서’, ‘첫사랑 2020’ 이렇게 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예전에 다른 단편집에 읽었던 소설이 몇 개 있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새롭기도 하고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역시나 술술 잘 읽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마음을 꽝 울리는 부분들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을 당시만 해도 나중에 그렇게 큰 논쟁의 화두가 될지는 전혀 몰랐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온 재미있는 부분을 강론 시간에 전해주었을 때에 중년의 어머니들은 격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사실 이 시대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래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온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 뿐만 아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누릴 무렵,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는 만화로 더욱 신랄하게 젠더 문제에 대해 비판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보다 [며느라기]를 읽을 때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맞이하는 명절에는 더 이상 방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오기’에 나온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은 논쟁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사실 아주 오랜시간이 관습처럼 지속되어 온 행위들에 대한 옳고 그름은 쉽사리 판단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옳지 않은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보고 ‘양심에 털이 났냐?’,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라는 비난을 던지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아주 이상한 교육을 받지 않은 다음에야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어째서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서 생각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단한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함께 고민해왔었다. 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론]이라는 책에서 양심의 양성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모두가 양심을 갖고 태어났지만 올바른 양심이 형성되도록 교육받지 못하다면 우리는 양심에 털난 행동을 하고도 뻔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기원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차별에 대한 저항을 근간으로 여성이 무산계급처럼 남성이라는 유산계급의 소유물처럼 인식된 헤게모니를 철폐하고자 시작된 것이다. 여성에게 투표권도 주지 않고, 계집아이라서 학교도 보내지 않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소박을 맞고 살아온 기나긴 시간의 종지부를 내자는 당연한 목소리가 역차별이라는 맞대응을 소환해내고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새로운 대립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첨예한 논쟁거리에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갖고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는 발언을 할 수 있겠지만,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누군가의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인간이 모인 어느 공동체에서든 동성과 이성으로, 여러 세대를 걸치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면 진심어린 환대만이 각 개개인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예 엉엉 울었다. 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 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246)”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는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250)”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 안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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