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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서 좋은 직업 - 두 언어로 살아가는 번역가의 삶 ㅣ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5월
평점 :
권남희 작가의 [혼자여서 좋은 직업]을 읽었다. 부제는 “두 언어로 살아가는 번역가의 삶”이다. 표지는 어마어마한 책장을 뒤로 저자가 역시나 책상에도 한아름의 책을 쌓아두고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다. 찐 부럽고 멋지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꿈꾸어왔던 서재의 모습이다. 보기만 해도 지겹고 머리아픈 전공책들은 어디론가 다 던져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시리즈를 컬렉션으로 꾸며놓으면 책상에 앉을 때마다 뿌뜻함이 마구마구 샘솟을 것만 같은데. 한때 그런 계획을 갖고 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몇년 전에 갑작스런 이사로 짐을 꾸리다 책에 깔려죽을 것만 같아서 도저히 빈번한 이사가 예정된 삶으로는 표지처럼 멋진 책장을 갖는 것은 그냥 꿈으로만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두 번 읽기는 이미 글러먹었음에도 어떤 작가가 신인시절부터 중견작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담긴 다양한 크기와 색감의 책들의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설레임이 생겨나곤 했기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세상에 책보다 멋진 DP를 찾을 수 있을까? 책보다 근사한 오브제를 찾을 수 있을까?
표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상 위에는 저자가 번역해온 아님 앞으로 번역할 일본어로 된 책들이 많다. 원서로 된 전공책을 공부해봐서 알지만 외국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그야말로 번역가가 새롭게 글을 쓰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한 때는 번역된 책을 잘 보지 않았다. 하지만 타국의 언어에 자유롭지 않은 몸으로는 어쩔 수 없이 번역가들의 노고가 담긴 책에 기댈 수 밖에 없으니, 저자처럼 번역 후에, 또는 번역 중에 생겨난 에피소드와 감상들을 이렇게 재미있고 진솔하게 열어주니, 앞으로 번역자가 ‘권남희’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원저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냥은 못 넘어갈 것만 같다. 작년에 출간한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를 읽고 번역가가 이렇게 재미있게 글을 써도 되는 것인가란 놀라움과 더불어 책에 소개된 오가와 이토의 [양식당 오가와]를 바로 구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오가와 이토와의 이야기를 전해주어서 또한 반갑고, 얼마전에 읽은 [무라카미 T]에서 읽고 의아했던 부분을 함께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저자가 서점에서 본인의 책을 구입하며 점원에게 ‘이 책 내가 썼어요’라는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부분은 나 또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하긴 무라카미 하루키도 도쿄의 서점에서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미국의 어느 대형서점에서 하루키를 단숨에 알아보고 즉석 사인회를 열게 한 직원은 얼마나 센스가 넘쳤을지, 나에게 그런 행운은 언제쯤 오려나 막연히 꿈꿔본다. 스스로를 은둔형 외톨이나 굉장히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처럼 그리고 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 나오는 모습들은 수줍음이 많고 응근 긴장을 많이 하는 소녀감성을 가진 번역의 달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 정하와의 다정한 대화는 아마 누구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실하고 진득함의 진수를 보여준 저자의 성실한 삶은 300여권 번역본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보여주었고, 우리나라의 많은 독자들에게 일본문학의 커다란 창을 열어주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앞으로 번역을 꿈꾸는 이들에게 롤모델의 모습을 보여주니, 앞으로 이런 책을 자주 많이 써주었으면 한다.
“종기처럼 우울증이 돋기 시작했다. 내게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다. 그 후 아예 자리를 잡은 종기는 비가 오면 도지는 노인들의 신경통처럼 날씨를 핑계 삼아 덧나곤 했다.
쉰이 되는 해의 우울증은 종기가 아니라 두드러기처럼 번지는데, 예순이 되어 쉰의 나를 돌아보면 또 이렇게 가소로울까. 나이 앞 자리가 바뀔 때마다 우울함의 도수가 높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우울하네, 사는 게 그렇지, 뭐’하고 해탈수도 높아지니 결국은 쌤쌤이다. 쉰이 넘은 뒤로 어깨 힘 빼고 적당히 열심히 살고 있다. 마감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도 않고, 일하기 실을 때는 널브러져서 데굴거리고.
이국종 교수님이 ‘나는 항상 우울하다. 그래도 그냥 버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도 그랬지, 하고 끄떡거린 이 여유.(170-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