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김민철 지음 / 미디어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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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카피라이터의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를 읽었다. 어쩌면 근래에 여행을 자유롭게 다닌 세대의 사람들은 인류가 아우 우연히 받은 선물을 누린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이 왠지 모르게 동의가 되면서도 슬프게만 느껴진다. 만일 어떤 경제적인 또는 물리적인 이유를 떠나서 다시는 예전처럼 자유롭게 어딘가를 갈 수 없다면 생각보다 우리 삶이 갑갑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예전 기억들을 떠올리며 특별한 누군가에게 혹은 그냥 스쳐 지나간 익명에게 보내는 편지는 작금의 고통을 감내하는 모든 이들에게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언젠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거라는 희망의 서를 건내는 듯하다. 


70년대 이전의 세대들은 해외 어딘가로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아니 그런 2차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사치한 일이었기에 언감생심이라는 말로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선택하라는 종용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분들 덕택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하에 아무런 준비와 목적없이 그저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여유로운 여행자의 코스프레를 즐기곤 했다. 하지만 몇번의 여행 끝에 모든 떠남이 나를 만족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오히려 그 떠남의 시간이 현재에 만족하기 위한 하나의 훈련이었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면 여행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 마냥 편안하고 행복한 일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커다란 캐리어에 짐을 꾸려넣으며 설레여 하고 여행지에서 소소한 기념품과 선물을 구입하며 언젠가 떠올릴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저자가 여행지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도 재미있고 당황스러운 기억과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해결되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글을 빛나게 해 주는 것은 역시나 그녀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사람들이기에 그냥 무심히 지나칠수도 혹은 차갑고 무뚝뚝한 만남에 불과할수도 있는 찰나의 순간들을 고이고이 간직했다가 뒤늦은 편지의 주인공으로 소환한다. 그러한 만남이 차곡차곡 쌓여 한권의 책이 되고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당신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화자가 될 수 있다고 초대한다. 아쉽고 그립고 답답하지만 견디고 기다리는 이가 편지를 받을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어보자고 위로해주는 듯 하다. 


"점을 선으로, 한 번의 만남을 긴 인연으로,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는 만남에 물을 주고 결국 꽃피우도록 하는 정성. 저에게 없는 단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그 정성일 거예요. 낯가림이 심하다고, 심하게 내성적이라고 아무리 변명을 해보아도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죠. 그 핑계로 딱 한 뼘의 공간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있거든요. 그 좁고 그늘진 공간에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는 인연들에게만 겨우 물을 주는 형편이거든요. 그 밖의 인연들은 다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면서요. 제 마음대로 인연을 재단하면서요.(297-298)"


"우리, 다시 여행을 하는 거야.

시간 속에서, 기억 속에서, 이미 네게 기억이 많잖아.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잖아. 곱씹고 싶은 얼굴도, 혀끝에 미세하게 남은 맛도, 한없이 헤매고 싶던 오전도, 더 바랄 게 없다 싶었던 오후도, 웃다 지친 밤도, 잠들도 싶지 않던 새벽도, 네 속에 다 남아 있잖아. 여행 가방이 턱턱 튕기던 돌길도, 해보다 먼저 올랐던 성곽도, 비가 오던 숲길도, 구원처럼 나타났던 찻집도, 아주 다 사라진 건 아니잖아. 그곳을 여행하는 거야. 생생하게 되살리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어. 간절한 사람이 더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어. 여행을 좋아하는 네가, 먼저 여행을 시작하는 거야. 좋아하는 여행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야. 가장 좋아하는 집에 앉아서 가장 멀리 떠나보자. 그러기에 딱 좋은 시간이 우리에게 도착한 거야. 문득 기억이 간절해지는 시간이 찾아오면 다 또 펜을 들자. 편지를 쓰는 거지.(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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