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가
정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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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작가의 [젠가]를 읽었다.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허쉬’의 원작인 [침묵주의보] 저자의 새로운 신간이다. 어디선가 저자 자신이 가독성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 인터뷰를 보았는데, 정말로 술술 진도가 나갔고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한때 보드게임이 꽤나 유행했을 때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봤을 ‘젠가’라는 단순한 게임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쉽게 열광시켰다. 횟수가 반복될수록 쌓은 탑은 위태로워지고 누군가 실수를 해서 와르르 무너져 벌칙을 수행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위태로운 게임이 단순히 놀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측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은 고진시라는 가상의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설정하여, 고진시에서 꽤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내일전선’이라는 기업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나 주요 갈등 쟁점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되는 케이블의 납품가 관련된 비화이다. 등장 인물은 꽤나 많이 나오지만 쉽게 몰입되기에 그렇게 헷갈리지 않는다. 읽는 내내 16부작의 인기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화면이 마구 연상되는 매력을 듬뿍 담고 있다. 그래도 소설의 주인공은 구매자재팀의 서희철 과장, 경영지원팀의 이형규 차장 그리고 고진매일의 김진원 기자 정도로 볼 수 있다. 


첫 장면은 구매자재팀의 김호열 부장이 납품업체의 오발주 건의 책임을 모두 서희철 과장에서 지우면서 시작된다. 앙심을 품은 서희철은 익명으로 사내 게시판에 불합리함을 올리게 되고, 혹시나 상무이사 승진 후보에서 제외될까 겁을 먹은 김호열은 서희철을 나중에 잘라낼 것을 다짐하며 그동안 몰래 모아놓은 업무추진비로 갈음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또 다른 부서인 경영지원팀으로 넘어가게 되고 새로온 신입사원과의 회식 자리에서 이형규 차장은 이나라 사원에게 성추행을 하다 옛 연인인 강영초 대리에게 발각되게 된다. ‘내일전선’이라는 기업은 고종석 사장이 취임하면서 서울의 유명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고진시에서 자라고 고진고-고진대를 나온 이들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골품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형규 차장은 그 골품제의 성골에 해당되며 승승장구 했지만 성추행 사건으로 대기발령이 나고 이혼당할 위기에 처한다. 김호열 부장은 서희철의 비리를 캐내기 위해 이형규를 이용하다 내일전선의 거대한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또한 고진시의 신문사 고진매일의 김진원 기자는 1년 전 우연히 내일전선이 아랍에미리트의 원자력 발전소 케이블 수주에 참여했다가 적정 검사 기준에서 미달되어 탈락된 사실을 알게 되고 특종으로 보도하여 주목을 받지만 내일전선에 미운털이 박혀 고진매일은 내일전선의 광고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서울의 메이저 신문사를 갈망하던 김진원은 내일전선을 벼르고 있지만 데스크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어찌보면 등장 인물들 중에 정말로 정의롭고 진실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모습에 실망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이 이와 닮았고 그렇게 실수하고 배신하고 상처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간다. 이렇게 자기 밥그릇만 챙기던 이기적인 사람도 가족에게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상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도대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이란 말인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정의와 선을 논하기에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다. 우리는 더 잘 살고 싶어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인생의 게임에 동참했지만 어쩌면 어차피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젠가라는 게임의 일원은 아닌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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