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 연대기 1~3 세트 - 전3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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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3]을 읽었다. 22년 전 군복무 중에 읽고 꽤나 오랜 시간 대서사시와 같은 전개의 감흥에 빠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에는 4권으로 출판되었는데, 2년 전 민음사에서 김난주 번역가의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판 되면서 3권짜리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예전 출판본의 제목은 [태엽 감는 새 1-4]였는데, 이번에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3]으로 제목도 조금 부가되었다. 1권은 ‘도둑 까치’라는, 2권은 ‘예언하는 새’라는, 3권은 ‘새 잡이 사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요즘 민음사에서 출판되는 책들은 디자인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이 세 권짜리 세트도 책장에 꽂아놓으면 꽤나 멋져보이니 DP용으로 구입해도 손색없을 듯하다. 

이번에 다시 한 번 긴 이야기를 정독하며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너무나도 인상 깊었던 내용이었기 때문인지 어렴풋이 다음 내용이 떠오르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하루키의 전매특허처럼 생각되는 달과 우물에 대한 시작은 이 작품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후 출판된 [1Q84]라던지 [기사단장 죽이기]와 같은 장편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도대체 말도 안되는 것처럼 생각되는 달과 우물의 등장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태엽 감는 새]를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하루키의 긴 장편에는 꼭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는데,[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는 1930년대에 있었던 ‘노몬한 전투’가 나온다. 1권 뒤부분의 하이라이트라고도 볼 수 있는 마미야 중위의 고백은 그야말로 독자를 전장의 한 가운데로 데리고 가, 러시아 장교와 몽골 장교가 자행하는 만행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언제가 그러하듯 전쟁에 대한 일본의 우익적 입장과는 정반대의 비판적인 시선을 하마노 중사의 입으로 드러나게 해 준다.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전쟁은, 어느 모로 보나 정상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소위님. 전선이 있고, 적과 대치해서 결전을 치르는 그런 전쟁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죠. 적은 거의 싸우지도 않고 도망칩니다. 그리고 패주하는 중국군은 군복을 벗고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가 적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도적 떼 사냥, 패잔병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죄 없는 무수한 사람을 죽였고, 식량을 약탈했습니다. ~~  난징에서도 몹쓸 짓을 참 많이 했습니다. 우리 부대도 마찬가지였어요. 수십 명을 우물에 던져 넣고, 위에서 수류탄 몇 발을 던집니다. 그 외에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짓을 했어요. 소위님, 이 전쟁에 대의 따위는 없습니다. 이건 그저 살육입니다. 그리고 짓밟히고 죽는 것은 결국 가난한 농민들입니다. ~~ 그런 사람들을 아무 의미 없이 죽이는 게 일본을 위한 일이 되겠느냐고요.(1권 295)”

처음 이야기가 시작될 때에는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으러 나서는 주인공 ‘오카다 도오루’와 그의 부인 ‘구미코’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어느덧 고양이를 찾으러 나갔다 만나게 되는 ‘가사하라 메이’라는 십대 소녀와의 만남 그리고 ‘가노 마르타’와 ‘가노 크레타’라는 미래를 내다보는 신비로운 자매와의 만남 속에 갑작스럽게 ‘노몬한 전투’이야기 등장한다. 하루키가 이렇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때로는 전혀 개연성이 없어보이는 환타지 요소까지 삽입하며 우물에서 어느 호텔방으로 순간 이동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못내 어이없이 느껴지는 하지만 그런 모든 이야기의 뜬금없는 요소와 뜻밖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하나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결국 이 주제를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한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니까,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그 결과 우리는 상대의 본질에 어느 정도까지 다가가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여기는 상대에 대해서, 정말 중요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1권 53)”

그래서 그런지 하루키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그리고 그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마미야 중사의 우물 속 신비체험과 그 길을 따라가보는 주인공 오카다가 구미코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에서 찾아보려 한다. 

“인생이란 그 와중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라는 행위 속에 빛이 비추는 것은 한정된 아주 짧은 기간뿐입니다. 어쩌면 불과 10여 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이 지나 버리고 나면, 그리고 그 빛이 보여주는 계시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후의 인생을 구원 없는 깊은 고독과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같은 황혼의 세계에서 사람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있어야 할 것의 허망한 잔해에 지나지 않습니다.(2권 84)”

아무런 낌새를 남기지 않고 갑작스럽게 집을 나가버린 아내 구미코를 되찾기 위해 고민하던 오카다는 3년 전 아내가 오카다가 출장 간 새에 아이를 혼자 지우러 갔었던 일과 더불어, 대학교 2학년 때 여자친구와 같이 낙태 시술을 하러 갔었던 일을 떠올린다.

“하지만 전철을 타고 지바현의 조그만 동네에 갔다가 다시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 나는 어떤 의미에서 다른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내 방으로 돌아와 혼자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변화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나는 ‘새로운 나’이며, 이제 두 번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이제 더는 자신이 무구하지 않다는 인식이었다.(2권 135)”

어떤 심각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상황을 접하게 되면 시간을 되돌려 다시금 그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고만 싶어진다. 너무나 간절히 원해도, 아무리 후회하고 자책을 해도 절대로 이전의 내가 있던 장소로 돌아갈 수 없다. 오카다는 그 후회와 자책으로 허망한 잔해만을 안고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우물 속으로 내려간다. 우물 속에서 꿈을 꾸며 구미코가 자신을 떠나게 된 이유를 기억의 홍수 속에서 찾아내려 부단히 애를 쓴다. 

“태엽 감는 새는 실제로 있는 새야.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소리밖에 못 들었어. 태엽 감는 새는 이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서 세계의 태엽을 조금씩 감아. 끼익끼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태엽을 감지. 태엽 감는 새가 태엽을 감지 않으면, 세계가 움직이지 않아.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몰라. 세상 사람들은 모드 훨씬 더 복잡하고 멋들어지고 거대한 장치가 세계를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사실은 태엽 감는 새가 온갖 장소에 가서, 가는 곳곳마다 조금씩 태엽을 감기 때문에 세계가 움직이는 거야. 태엽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에 달린 것처럼, 간단한 태엽이야. 그 태엽을 감기만 하면 되지. 하지만 그 태엽은 태엽 감는 새 눈에만 보여.(2권 295-296)”

구미코를 되찾기 위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근원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물 속을 헤매던 오카다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마미야 중사의 말처럼 영원히 예전의 온전했던 나를 찾지 못할 지 모른다.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가 태양이 정면으로 우물을 비추는 그 찰나의 시간에만 주어지는 은총과 계시의 빛을 놓쳐버리고 나면 남은 긴 세월을 껍데기 뿐인 나로 살아갈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세상이 멋들어지고 그럴듯한 완벽한 장치로 돌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고 어디선가 모든 장소에서 태엽 감는 새가 그저 조금씩 천천히 태엽을 감아가며 흘러가는 것처럼 흑백사진처럼 여백에 불과한 자신의 선택과 용기 있는 기다림이 상흔이 가득한 나를 새로운 나로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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