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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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여름을 지나가다]를 읽었다. 2015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 총서 33번째 작품으로 재판되었다. 작년에 발표된 [단순한 진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니 [여름을 지나가다]에서 보여준 보편적 삶의 필수적 요소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지 좀 더 면밀히 들여다 보고 있다. 주인공 민은 종우와의 결혼을 앞두고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회계사의 일을 그만두고 얼떨결에 들어간 공인중개사에서 잠깐 동안 일을 돕는 알바를 하게 된다. 그렇게 집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집으로 안내하며 민에게는 새로운 패턴이 생겼다. 집을 보여준다는 명목하게 알게 된 디지털 도어 비번과 복사된 열쇠를 통해 집을 내놓은 이의 삶을 30분간 살아내는 것이다. 민은 폐업된 가구점에 잠시 동안 머물며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 받고자 눈물을 흘리곤 했다. 민이 다녀간 후 가구점에는 수호가 들어온다. 수호는 가구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아들이다. 빚더미에 앉은 수호 아버지로 인해 수호까지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수호는 대학도 휴학 한 채 닫혀버린 미래의 암울함 속에서 우연히 쇼핑센터 옥상에서 운영하는 놀이동산의 피에로 알바를 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오랜시간 묵묵히 버텨온 연주라는 실장을 만나게 되고 수호는 피시방에서 훔친 박선우의 신분증으로 신분을 갈음한다. 수호는 연주와 놀이동산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을 회피하고자 아버지의 가구점을 방문한다. 민이 다녀간 사실을 알게 되고 수호는 그녀가 누구일까 궁금해 하던 차에 수호는 연주의 부탁으로 지갑을 가져다 주는 길에 현금인출기를 보게 되고 연주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100만원을 인출하고 만다. 
민이 종우와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에 함께 일하던 C사는 구조조정을 위해 조작된 보고서를 만들게 되고 종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민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고백한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된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민과 그럴 수 없다는 종우! 결국 민은 믿을만한 동료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고 종우는 회사의 압박을 받으며 갖고 있는 모든 증거를 빼앗기고 만다. 종우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아마도 어쩌면 아니 분명 종우와 비슷한 상황을 목도한다면 그리고 며칠 후면 결혼이라는 큰 일을 앞두고 있고, 함께 살 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억울하게 해고된 이들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알고도 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종우의 선택은 진실을 말하게 된다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진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시궁창 속으로 자신의 삶이 내던져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미 내딛기로 한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은 이유로 단순한 진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지 못한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일까? 여름을 지나가면 무엇인가 열정적으로 타오른 나의 지나간 시간 덕분에 맹맹한 열매꼬투리라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여름이 지나고 나서 남겨진 건 땀에 쩔어 흥근해진 옷들을 수없이 빨아댄 덕분에 너덜너덜해진 옷자락 뿐이라면 너무나 허망하리라. 그럼에도 민과 종우와 수호와 연주는 헤진 옷자락을 붙잡고 여름의 끝자락에서 어떻게 될지 모를 미래의 불안감을 한고도 단순한 진심이 보여준 길을 굳건히 걸어간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 열매를 수확한 것이리라. 

“생의 시작은 어머니의 뜨거운 숨결로 보호 받지만 그 끝에서는 철저하게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치 하나의 불가해한 기호처럼 민의 여린 심장에 각인되어 갔다.(8)”
“가난은 갑자기 쌀이 떨어지거나 전기가 나가는 식의 상투적인 장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작고 구체적으로, 저마다 다른 형태로, 그러나 비참함을 느끼게 할 만큼은 충분히 강렬하게 일상과 일상의 틈새로 날카롭게 스며드는 것이다.(39)”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51)”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종우의 어머니가 고독하게, 노동하듯, 한평생 쌓아 온 견고한 기억의 구조물을 꽉 쥔 주먹으로 부수고 또 부수는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154)”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까.(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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