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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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의 [아직 멀었다는 말]을 읽었다. 단편 소설집으로 {모르는 영역}, {손톱}, {희박한 마음}, {너머}, {친구}, {송추의 가을}, {재}, {전갱이의 맛}이 실려 있다. 뒷편에 수록된 해설 부분에서 평론가는 저자를 ‘슬픔의 마에스트로’라고 칭한다. 전작 [레몬]에서 보여주었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수를 이번 단편집에서 좀 더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으로 세분화 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손톱}을 읽고 나서 답답함, 무력함, 자책감, 미안함, 뻔뻔함이 동시에 밀려와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차라리 몰랐으면 마음 편했을 것이라고,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내는 힘을 얻는 것인지란 의문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같은 매장에서 일하는 동료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엄마와 상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인공 소희는 언니가 열 달 동안 저금한 칠백만원과 언니 이름으로 대출받은 천만원을 들고 내뺀 엄마를 생각하다 그만 박스를 옮기기 위해 사이에 손을 넣다가 굵은 고정쇠에 오른손 엄지손톱을 푹 뚫고 나와 손톱 절반이 뒤로 꺾이고 살이 찢기는 상처를 입고 만다. 끔찍한 통증과 기괴한 모양으로 변해가는 손톱은 결국 병원비 칠만원을 날아가게 만들었고, 소희는 “손톱 없이도 된다. 엄마 없이도 살았고 언니 없이도 사는데 그깟 손톱 없어도 된다.(73)”고 되뇌인다. 
책 제목은 [아직 멀었다는 말]인데, 같은 제목의 단편은 없다. 아마도 수록된 단편들을 아우리는 제목으로 만든 것 같다. 표지에는 어느 대교의 중간 쯤을 달리는 전철을 담고 있다. 노을이 지는 순간인지, 아니면 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인지 모르겠지만 전철은 사람들을 실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슬픔의 마에스트로’라는 칭호가 어울릴만큼의 이야기를 전해준 작가이지만, 아직 멀었다는 말은 각자가 겪고 있는 슬픔의 무게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전해주는 것 같다. 겸손함이나 삶에 대한 기쁨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관찰하며 느껴지는 것들을 인정하는 순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멀었다는 말은 가야할 길이 한참 남았다는 막막함도 아닌, 누군가를 무시하고 깔아뭉개기 위한 조소의 말도 아닌 그냥 알고 싶은 것이 더 많은 그리고 슬픔의 마에스트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마나 이야기의 주인공의 마음에 머물러 보는 것. 그래서 아직 더 듣고 싶은, 보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면에서 우리는 부자라고 말하고 싶다. 

“계량기 소리 때문만은 아닌데 언제부터인지 데런은 잠들지 못하고 몇 시간씩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심신이 나른해지고 불면의 두께가 조금씩 얇아지면서 투명한 비눗방울 같은 잠이 자신을 감싸는 느낌이 들면 이제 곧 맥을 놓고 눈먼 누에처럼 잠에 빠져들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미간 안쪽 깊은 곳에서 기괴한 눈이 반짝 떠지고 흉부가 고장난 승강기처럼 난폭하게 덜컹거리면서 잠의 비눗방울은 감쪽같이 터져버리고 말았다.(87)”
“아무 기댈 곳도 없고 아무 쥘 것도 남지 않은 이제 와서야 그는 비로소 겉돌던 세상의 틀 속에 겨우 들어앉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회오리치던 그의 가르마를 누군가 단정히 잡아준 것만 같았다.(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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