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억속에서 사라진다 해도

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프레드릭 배크만의 [일생일대의 거래]를 읽었다. 다산북스 매3소 열독 프로젝트의 두 번째 책이다. 아주 짧은 우화인듯 하면서도 삽화에 담긴 풍경들을 상상하며 저자만의 고유한 인간탐구의 색깔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주인공인 아버지 '나'는 아마도 암에 걸리고 나서야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하는 듯 하다. 우리내 아버지들의 모습이 의례 그런 것처럼 성공하기 위해서,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돌아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다시는 자식과 옆구리를 찌르며 까르르 웃는 장난을 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뭔가 어색한 공간이 메워지지 않고 겉으로만 맴도는 시간들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암에 걸려 입원한 병동에서 나는 아주 어린 꼬마 여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도 몹쓸 병에 걸려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엄마와 함께 미래의 일을 상상하는 놀이를 하며 견뎌내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중년의 남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녀를 마주치며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의 곁을 맴도는 회색 옷을 입고 폴더를 옆구리 낀 여자를 떠올리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는 오늘도 나의 눈에 띄며 폴더를 열어 누군가를 데리고 갈 것처럼 행동한다. '사신인가요?'라는 그의 질문에 회색 옷을 입은 여자는 '나는 사신이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은 태우고 가서 내려주는 것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바로 그 소녀를 대신해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나는 차를 몰고 나가서 라이트를 끄고 커다란 트럭이 다가올 때를 기다려 달려 나간다.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오면서 그녀에게 부탁한다. 소녀의 죽음을 대신해 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며, '죽음을 죽음으로 맞바꿀 수는 없고, 목숨을 목숨으로 맞바꿀수만 있을 뿐이라고'. "네가 죽는 걸로는 부족해. 그 여자아이의 온 생애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려면 다른 생명이 존재를 멈추어야 하거든. 그 생명 안의 내용을 삭제해야 해. 그러니까 네게 네 목숨을 내주면 네 존재는 사라질 것야. 너는 죽는 게 아니라 애당초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이 되는 거지.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않아. 너는 여기 없었던 사람이니까." "네 아들은 그대로 남지만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될 거야. 너의 업적도 모두 그대로 남지만 다른 사람이 일군 업적이 될 테고, 네 발자취는 사라져. 너는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이 되고, 너의 인간들은 항상 언제든 목숨을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실제로 어떤 일이 수반되는지 알아차리기 전의 얘기지. 너는 네 유산에 집착하잖아, 안 그래? 죽어서 잊히는 걸 감당하지 못하잖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처럼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만, 세상에 길이남을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닐지라도 나의 죽음 후에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그리워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정한 희생이란 그렇게 내가 살아온 흔적 자체가 사라지는 댓가를 치뤄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댓가로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