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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일제 침략사 - 칼과 여자
임종국 지음 / 청년정신 / 2022년 1월
평점 :
일본군은 대다수의 경우 부락을 습격해서, 그 주변에 의병들이라도 있을 양이면, 방화하기 전에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 같다. 어느 부락에서 나는 두 채의 집만이 남은 것을 발견했는데.. 일본군은 그 집의 겨우 10살 먹은 외동딸을 사살했다.
시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악랄한 행위들이 많다. 단순히 밤과 여자를 이용해 조선을 합병해 이득을 취하려고 한 의도 이외에도 본인의 개인적인 재미를 위해 벌인 일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런던 '데일리 메일'의 매켄지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었기에 그가 목격한 한국인 살륙전을 생생히 기록해 남길 수 있었다.
수 많은 마을이 초토화된 건 기본이고 산 길에 섰을 때 아래로 보이는 것은 모두 불에 타고 남은 잿더미 뿐이었다고 한다.
무기도 없는 한국인들이 바닥에 피를 토하며 만세를 외칠 때마다 총검으로 찔러죽였다고 하는 모습은 그냥 학살 그자체였다. 나중에 살아남은 주민들은 잔해를 주워 모아 묻어주었다고 한다.
모조리 약탈하고, 모조리 불 지르고, 모조리 살육한다는 삼광(三光)정책이다.
당시 이 살육작전을 지휘한 것이 하세가와이지만 그는 이런 일은 까마득히 묻히고 러일전쟁비 잉여금 50만원으로 용산 아방궁을 짓고 국적으로 비난받은 것이 끝이었다.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술통이란 술통의 마개를 모조리 뽑아 버린다. 술은 흘러 넘쳐서 부엌을 채우고 또 마당으로 한강수를 이룬다.
한 번은 도미찜 50인분을 주문했다. 그는 방석으로 그릇 50개를 덮었다. 그 위에 벌렁 나자빠져서 미친듯이 너덜웃음을 웃었다.
청일.러일전쟁과 세계 1차대전을 거치는 동안 승승장구한 미쓰이 물산은 서울 출장 파견소까지 개설하는데 초대 소장인 오다가키가 완전 난봉꾼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의 혈세로 얼마나 일제의 낭비가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다. 부정 부패로 얼룩진 행위들을 보다못해 일제 측에서 직접 제재를 걸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 모습이 어땠을지 눈에 훤하다.
일인들의 내왕이 빈번해짐에 비례해서 매춘업이 번성하자, 그에 따른 수요를 위해서 '오키야'가 1906년에 문을 열었다.
이것은 기생, 창녀를 유숙시키면서 주문에 응해서 출장 매음을 하게 하되, 제 집에서는 유흥을 하지 않는, 즉 말하자면 알선 매춘업이다.
안하무인이었는데, 그 중 하나는 지배민족이라는 우월감.
그자들은 조선에서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외에는 무엇이건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다.
여자 기생들은 밤에 접대를 하며 일본인들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졌고, 일반 평민들은 운이 좋으면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학살당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술과 여자에 홀려 저항의식이 꺾이게 하는 일제의 치졸한 방식들까지 현저하게 드러나있다.
당시 기생들의 잠자리 화대 비용이 30원인 것을 감안해 월 화대 비용이 1만원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하니 그 방탕한 생활들이 대충 짐작이 간다.
별명은 침몰정. 일진회를 중심한 패거리들이 밤을 밝히는 열락 속에서 '침몰'하면서 매국의 음모를 진행시켜 갔던 것이다.
특히나 치가 떨리는건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조선 친일파 놈들이었다.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한 당시의 외무대신은 그 대가로 고작 백작 작위를 받는다. 그 말로가 좋지 않았음은 당연하지만 책 속의 조선인들에 비하면 오히려 편한 죽음이었다고 본다.
밤의 밀실에서 이루어진 수 많은 침략과 착취 논의들을 보다보니 어느순간 분노보다는 힘이 없어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큰 무력감을 느꼈다. 도대체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걸까.
작가님이 해당 자료를 조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들었을 것 같다.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일제의 잔재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