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까봐
이지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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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몽환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진짜가 맞는지 계속 되묻게 만든다. 살고 있는 현실로 되돌아오면 지난날은 '서서히'도 아닌 '순식간'에 휘발되지만 그 휘발성 덕분에 그간의 기억에 매달려 기록을 남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꺼내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남겨진 기록들은 일상을 살아가며 지칠 때마다 꺼내 보는 한 페이지로 남게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까 봐』란 제목도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과거의 기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불러낸 세계이며 그것은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다. 옛 기억들을 글로 불러내면서 그것을 경험했다. 낡은 외투 같은 옛이야기들의 먼지를 털고, 밝은 햇살 앞에 드러내 다듬는 가운데 새로운 시간이 열렸다. 글을 쓰는 동안, 행복한 기억들이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자꾸 솟구쳐 올라 행복했다. (p. 7)

 

400개의 도시에서의 경험과 인연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기억엔 추억들이 자리해 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부터 여행을 다닌 저자의 이야기부터 최근의 여행담까지 먼지 쌓여 한 켠에 자리해 있던 장면과 느낌을 하나둘씩 꺼내 본다. 되짚어 보면 힘들지만 즐겁기도 했고, 황당하고 무섭기도 했던 여러 편의 장면은 부정적인 감정은 걸러진 채 웃음만이 가득하다. 그가 현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이 만나는 터전이다. (p.54)라고 말했 듯, 현재에 서 있는 그는 다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힘을 과거로부터 얻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묘사가 생생하게 재생되는 점이 좋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벅차오름과 간절함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일상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벗어나기 위한 탈주극이 여행은 마치 초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렘과 떨림의 감정을 여행에서 느낀다. 바다, 산, 음식, 잠자리, 거리, 간판 등의 모든 것이 새 포장지로 감싸져있다. 처음으로 돌아갔을 그 순간에 우리는 잠깐 본연의 '나'로 되돌아간다. 순수하게 내뱉는 '와.....'하는 탄성은 꾸며지지 않은 날 것의 내 마음이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은 덧없어 보이지만,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이 모두 다 붉은 핏방울이었다. 나도 핏방울로 글을 써왔고 세상 사람들 모두 핏방울을 흘리며 살고 있다. (p. 137)

 

 

 

우린 각자만의 방식으로 삶의 기록을 남긴다. 때론 남겨지는 것 자체가 내 눈에 보이는 것만큼 성에 차지 않지만 그래도 남겨두면 과거의 향수병을 그리움으로 치환할 수 있다. 삶과 여행은 그렇게 맞닿아있다. 그 둘의 줄다리기는 팽팽하게 맞선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야.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외치다가도 긴 시간이 지나면 그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지긋지긋한 톱니바퀴를 벗어나고 싶어진다.

우린 모두 핏방울을 흘리며 살고 있다. 피는 살아있기 위해서 필수적인 동력이다. 하지만 그 피가 수혈되지 못한 채 다 흘려버리면 우리는 숨을 쉴 수 없다. 여행은 그런 피를 수혈하기 위한 충천기라 생각한다. 떨어져 가는 내 혈액을 다시 채워 넣어줄 맑고 깨끗한 피. "떠나고 싶다"라 되뇐다면 아마 우린 추억의 피가 필요한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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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할 걸 그랬어
김소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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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MBC 아나운서'이자 현 '당인리 책 발전소' 주인인 김소영 아나운서가 쓴 고군분투 도쿄 책방 일지다. 작년, 많은 사람들이 방송에서 배제됐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한창 일해야 할 시기에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퇴사 직전까지 사내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 읽었다고 한다. 마치 이 상황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듯이, 미친 듯이 읽었지만 깜깜한 앞날의 불안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단은 '당장'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이 급선무였다.

당분간은 바삐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p.15)


당장 행복해지고 싶었던 그녀는 퇴사를 감행해 정말 좋아했던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도쿄의 여러 책방을 전전하며 개성 있는 큐레이션과 굿즈, 분위기 등을 즐기면서(사랑하는 빵과 함께) 조금씩 행복해진다.

일본은 독서량이 많은 국가로 손꼽히지만 우리나라처럼 스마트폰 등 볼거리가 많아지면서 독서량이 급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서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왜일까? 일본의 서점들은 책을 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기보단 '책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츠타야'나 '무지 북스' 등의 대형서점들이 위치한 무인양품, 백화점 등에서 서점들이 가져다주는 매출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서점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늘어나는 체류시간은 다른 상품들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전체 매출은 상향곡선을 그렸다.

이들은 '공간 자체'를 바라보며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서점은 책을 팔아 매출을 올린다'는 단순 공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굿즈 상품을 출시하면서 공간에 대한 애정도를 높이고, 길어진 체류시간 동안 책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전문가들을 배치해 개개인이 원하는 책을 추천할 수 있게 하고,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분위기'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 여행 후, 김소영 아나운서는 '당인리 책 발전소'를 연다. 책을 읽어보면 그녀는 세부적인 계획을 갖고 서점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가게를 계약하면서 시작된 책방은 커피와 디저트 메뉴를 개발하게 만들었고 서가를 어떻게 구성할지, 책상을 어떤 걸 놓아야 할지 등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시험공부는 시험비를 결제해야 시작되는 것처럼 상황이 눈앞에 닥치게 되면서 하게 된 것들이 많아보였다. 그렇다고 대충 준비하시진 않았다. 특히, 큐레이션 부분에서 고민을 많이 하시는 게 보였다. 다른 책방과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과 베스트셀러만큼이나 사랑받았으면 하는 숨겨진 책들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등에서 말이다.

나는 작년 말에 책방을 방문했었는데 책 위에 하나하나 손으로 쓴 부부의 추천사가 놓여있어 하나하나 읽는 재미를 느꼈다. 이것부터가 차별화의 시도였다. 최대한 책방에 출근해서 일을 많이 하려 하시는 모습에서는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힘들지만 애정이 높아지는 일, 그것이 좋아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한다.


판매하는 제품 옆에 비슷한 주제의 책을 배치하는 일은 어쩌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막상 책방을 운영해보니, 참 쉬워 보이는 그 일이 참 쉽지가 않았다. 책과 책 사이에 이야기를 만들고, 물 흐르듯 배치하는 과정마다 풍부한 상상력과 사고력이 요구된다. 만약 그저 책 제목이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진열한다면 고객으로서는 책을 집어 들 이유가 없고, 결국 아까운 자리만 차지하게 될 뿐이다. (p. 218)


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니 책이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단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특히, 관심사가 같은 친구와 만나면 늘 이 이야기를 하게된다. 하지만 '현실'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요즘인지라 늘 상상 속에서만 그친다. 책방도 하나의 사업이기에 "수익 창출"을 논외로 할 수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독서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으니 사양산업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래도 요새 독립출판, 동네 서점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또 사라지고 있기도 하지만) 

 

 

당인리 책 발전소를 다녀온 뒤로 많은 서점들을 방문했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책방이여도 모두 개성이 달랐다. 그녀가 말한 큐레이션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서가만 둘러봐도 서점의 정체성을 알 수 있게끔 하는데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진작 할 걸 그랬어!"하고 외쳤으면 싶다. 내가 힘들지만 좋아할 수 있는지는 시작해보고 나서야 알 것 같다. 뭐든 시작이 없으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성일뿐이니까. 그녀도 직접 운영하면서 느낀 즐거움이 힘든 것보다 더 크기에 '더 일찍 시작할걸'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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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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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회인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어 성공유무가 달라진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출중한 재능이 있어도 기회란 녀석이 없으면 꽃 필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 한 문장 더 보태고 싶다. '그 기회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 역시 성공에 중요하다' 이 책의 주인공 티아를 보면 이 말의 뜻이 더 와닿을 수 있다.

티아는 푸드라이터를 꿈꾸는 대학원생이다. 예일대란 명문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이 화려한 도시에서 삶을 동경하면서도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움츠러든다. 뉴욕은 모든 유행의 시작이면서도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정글 같은 곳이다. 명품을 휘감은 당당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그녀가 좋아하는 셰프들의 레스토랑이 곳곳에 위치해있다. 이 도시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듯 사람들은 이를 당연시 여기고 이 명성이 깎이지 않길 바란다. 티아는 자신의 우상인 '헬렌'의 인턴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연히 만난 레스토랑 비평가 '마이클'로 인해 그 기회를 저당잡힌다.

마이클은 헬렌을 미끼로 순진한 대학원생이자 뉴욕 초짜인 그녀를 꼬드긴다. 그에겐 티아의 재능이 필요했다. 티아는 <뉴욕타임스>에 자신이 글이 실린 적이 있었을 정도로 글에 재능이 있었는데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기회가 필요했다. 마이클은 그걸 노렸다. 자신과 같이 다니며 음식을 먹고 평을 해주길 바랐다. 그는 미각을 잃어버려 지위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티아는 자신의 글이 실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이중생활을 감행한다.

마이클과의 만남은 '기회'였을지 모르지만 올바르지 않은 기회였다. 티아는 그저 평을 대신하는 마이클의 조수일 뿐이었다. 티아의 이름을 걸고 글이 나오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재능을 마이클에게 헌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 일을 끝내지 못했던 건 뉴욕의 화려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마이클의 부와 자신이 쓴 글로 외식업계가 휘청이는 권력을 즐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이룬 만큼 대가가 따르는 법,.티아는 남자친구 엘리엇과의 관계도 틀어지고, 셰프들에게 농락당하고, 오히려 역이용 당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몰락한다.

자신이 잡은 기회에 역공을 맞는 아이러니한 결과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업자득이라 생각하는가? 우리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할 다른 무언가를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얻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잃어버리는 것이 갖는 소중함은 별거 아니라 생각한다. 당연하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별거 아닌 것들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런 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숨통을 트고 살아간다.

마지막에 티아는 정신을 차려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삶은 이미 망가졌지만 더 이상 망가지는 건 막기 위해 폭로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원하는 기회, 헬렌과의 인연을 얻게 된다. 새로운 기회 앞에서 그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것이다. 첫 실수를 통해 기회란 것의 양면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티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회를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 본인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성공의 토대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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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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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베어 타운'. 과거 하키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쇠락한 숲속 마을일 뿐이다. 이 조그만 마을의 희망은 청소년 하키 팀이 승리를 거두어 주목을 받는 것이다. 어른들은 오로지 그 목표 하나만으로 하키를 숭배하고 즐기며 모든 노력과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그저 스포츠일 뿐인데, 나이가 많아봐야 열일곱인데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 압박을 받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을 보고 배운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측면도 다분하다. (p. 528)

 

우린 얼마 전 평창 동계 올림픽을 통해 강한 희열과 감동을 맛보았다. 비인기 종목이었던 컬링과 썰매 종목이 뜻밖의 메달을 획득하면서 국민의 관심이 쏠렸고, 스피드 스케이팅에선 팀워크가 문제시되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단 몇 분간의 경기로 하나가 되었다. 때론 메달 색을 따져가며 아쉬워했고, 실망스러운 결과에는 비난과 격려가 공존했다. 이때 우리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베어 타운으로 옮겨가면 왜 이들이 하키에 이만큼 목숨을 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키로 얻는 그 순간의 기쁨, 어른들이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성을 통해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스포츠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만큼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초월을 느끼는 몇 번의 순간들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불사르고 피를 흘리고 울부짖는다. (p. 205)

 

이 스포츠 세계는 그만큼 냉혹하다. 우리는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의 차별 대우에서 이미 느끼고 있다. 메달을 따지 못하면 쏟아지는 악성 댓글로 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알고 있다. 재능 있고 백이 있는 선수 뒤에는 그를 지키기 위한 서포트 선수가 있고, 후원자의 유무로 어린아이들조차도 소위 줄을 바꾼다. 아이들도 돈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를 더욱 부추기고 당연한 것으로 체감하게 한다.

베어 타운은 그 모든 게 응축되어 있다. 부와 재능을 동시에 가진 유망주 케빈, 그를 다치지 않게 온몸으로 서포트하는 벤 이, 재능이 있지만 돈이 없는 아맛 이들은 모두 팀워크를 강조하는 하키 세계에서 빈부격차로 생겨난 위계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코치도 모든 전략이 "이기자"인 사람, 올바른 선수로 자라나는 것이 우선인 사람, 무능한 사람 등으로 제각각의 성향을 보인다.

베어 타운을 보면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키가 아니어도 청소년들은 학업으로 압박을 받는다. 부와 재능을 둘 다 겸비한 아이는 늘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부모 역시 이를 반드시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루에 학원을 대여섯 개씩 옮겨 다니며 각종 스펙도 준비하여 서울대를 가야 한다. 친구지만 늘 경계해야 한다. 상위권을 받쳐주는 성적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교내에서 선생님들도 오로지 성적에 따른 차별 대우를 일삼는다. 매우 잘하는 애들은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나머지는 야생동물처럼 방치한다. 아예 가망도 없어 보이는 아이는 거들떠도 안 본다. 과연 이 마을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법한 이야기일까?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에 따라 윤리와 정의는 뒷전으로 물린 베어 타운의 모습은 하키라는 단어를 공부로 대체하면 지금 우리 사회와 섬뜩하리만치 닮은 구석이 많다. (p. 569)

 

소설의 후반부에서 케빈이 코치의 딸 마야를 성폭행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가해자인 케빈은 옹호 받는다. 오히려 팀 내 전력에 피해가 가자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피해자인 마야를 가해자로 만든다. 케빈은 후원자의 아들이다. 이들의 지원이 끊기면, 유망주인 케빈이 몰락하면 베어 타운의 미래는 보장받지 못한다. 그들은 그 어떤 윤리적 행위보다 이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곧 진실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가 생각난다. 마야가 신고를 해고 진술을 해도 사람들은 마야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한다. 여기에는 여성차별적 시각도 보인다. 그 시간에 여자애가 남자애 방으로 들어갔으면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가장 뻔하면서도 죽지 않는 말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피해자는 증명을 통해서 계속 자신이 피해를 입증만 해야한다. 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지, 왜 상처 부위를 사진으로 찍어놓지 않았는지, 왜 이제서야 신고를 했는지 취조를 통해 피해자가 오히려 내몰린다.

소설에는 하키 퍽을 치는 소리를 "탕탕탕"으로 표현한다. 이는 총소리와 유사하다. 마야가 케빈에서 총구를 겨눈 건 케빈이란 아이로 표현된 사회의 부정함에 총을 겨눈 것일 테다. 하키 퍽을 치는 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탕탕탕"은 작가가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함에 겨누는 경고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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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의 인생상담 (20만부 판매기념 특별판)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김신회 옮김 / 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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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신세계가 열리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고민만 늘어갔다. 하고 싶은 걸 다할 수 없어서 매일 갈등을 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기 위해서 늘 신중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기 시작했고,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삶의 전반적인 고민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다들 나이 드는 게 처음이니까 그래서 불안한 거야."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은 어른도 계속 처음인 순간을 산다. 처음이니까, 나라는 존재가 2명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걱정과 고민만 늘어간다. 그 안에는 '잘하고 싶다'라는 의지가 숨겨져 있다. 잘하고 싶으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별거 아닌 일에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우리는 늘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보노보노와 친구들이 수많은 고민들에 대해 내리는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우리가 꼭 해야 한다고 하는 일들에 '왜?'라는 질문을 끼얹는다. 예로,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는 "사과를 꼭 할 필요가 있는지?"로, "취미를 어떤 것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는 "억지로 하는 게 취미인지?"로 반문하는 것이다.

 

[동성 친구를 좋아하게 됐어요] p.127


보노보노: 결정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힘든 일이지
포로리: 다들 힘든 일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에 더 힘들어져.
보노보노: 도망치지 않으면 돼?
포로리: 응. 만약 상대가 눈치채면 어떻게 할 건지를 지금부터 정해놓는 거야.
보노보노: 그렇구나. 미리부터 정해두면 좋은 거구나.
포로리: 그래도 힘들겠지만.
보노보노: 역시 힘들구나 ······.
포로리:
보노보노, 사는 건 힘든 거야. 힘들지 않게 사는 법 따윈 없어.

 

때론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다가도 납득이 안 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처럼 저들끼리 토론을 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말이라 생각될 때가 있다. 이 밖에도 왜 보편적으로 정해놓은 평균에 우리가 맞추어야 하는지, 반대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왜 잘 안돼서 슬퍼할 걱정을 먼저 하는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건데 왜 꼭 해결해야 하는지 등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고민을 바라봤을 때 비치는 모순점을 보여주며 생각해 보게 한다.

수많은 고민들이 보노보노와 친구들을 거쳐갔지만 해답은 없다. 오히려 '이게 답인가?' 싶다. 그건 모든 고민은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기 때문일 거다. 보통 고민의 해답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고민을 하든 하지 않든 너무 깊게 들어가 생각하다 보면 배배꼬여 머리만 아파진다. 때론 고민은 고민인 채로, 저 멀리 내버려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면서 잠시 숨을 고르는 건 어떨까 싶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모든 고민에 대해 "그게 어때서?"라고 말한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설령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준다. 우리가 고민을 안고 보노보노를 찾아가게 된 까닭은 이렇게 '그 자체'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처음인 인생을 틀렸다고 생각하기 보다 내가 발견하고 개척해 나간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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