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함, 인생을 담아드립니다 -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환대하는 법
최나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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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영원한 시간 중에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건 찰나의 삶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기록을 남겨야 한다. (p.5)


그리워할 모, 특별하게 다룰 리, 담을 함. 모리함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소망을 작은 액자에 담아 보존하는 작가의 일이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전통 표구를 배우게 된 그는,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 시간에 닳지 않고 언제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사연을 듣는다. 그리고 그 원형과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표구의 재료와 복원의 과정, 메시지의 시각적 구현까지 진심을 담아 완성해 나간다.

이 책은 ‘기억’에 대해 찬찬히 돌아보게 만든다. 가까운 현재의 기억은 선명한데,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기억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어떤 기억은 그리움이 되고 어떤 기억은 끝내 닿을 수 없는 꿈으로 기록된다. 그 아이러니함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작을 기록하는 것도, 이어지는 삶을 보듬는 것도 결국은 함께한 물건들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 우리를 다시 처음으로 데려간다. 사라진 것 같아도 그 앞에 서면 마음은 다시 출발선에 선 듯 떨린다. 그렇게 그 물건은 삶의 시작과 끝을 잇는 다리가 되어준다. (p. 57)

모리함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한 조각을 작품으로 남긴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파편을 물리적으로나마 붙잡아 두고, 그 액자를 통해 초심을 상기하며 다시 여행을 떠난다. ‘기억을 오감으로 확장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싶었다. 장마다 소담하고 정성스럽게 놓인 액자들을 보고 있자니, 내 기억이 아님에도 마음이 자꾸만 뭉클해졌다.

우리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이들의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마음을 다하여 다가가고 싶다. 이것이 그 기억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정중한 답례라고 믿는다. (p. 86)

수많은 기억들 가운데, 나는 과연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 연말에 어울리는 고민 하나를 선물 받은 기분이라 오히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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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작별
김화진 외 지음 / 책깃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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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이꽃님, 이희영, 조우리, 최진영, 허진희. 우리 곁의 현실을 가장 예민하게 포착해온 여섯 명의 작가가 참여한 앤솔로지 소설집 『우연한 작별』은 ‘이별’이라는 단어를 관계의 종결이 아니라, 삶을 옭아매던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으로 다시 정의한다. 이 책에 담긴 여섯 편의 이야기는 특정 인물, 과거의 시절, 미해결 감정과 트라우마 등 각자의 삶을 붙잡고 있던 짐과 서서히 작별하려는 인물들이 갈림길 앞에서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청년과 청소년의 시선을 통해,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과거에 두고 떠나보내야 하는지를 묻는다. 표제작인 김화진의 「우연한 작별」은 늘 비교 대상이었던 또래 친척이자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애써 외면해왔던 열등감과 질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꽃님과 이희영의 작품은 청소년기의 불안정한 자아와 관계의 균열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조우리와 최진영은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상처와 선택의 무게를 보여준다. 허진희의 작품에서는 AI와 기술 발전으로 계층 갈등이 더욱 심화된 근미래가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도 인물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결국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의 고민은 결코 낯설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혹은 몇 달 전의 내가 품고 있던 생각들이고, 지금은 스스로 화해했다고 믿고 있지만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감정의 시한폭탄이기도 하다. “질투와 혐오 사이, 그 어디쯤 내 마음”(p.25)이라는 문장은 현실과 타협하며 애써 지켜온 또래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분노로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쥔 채 버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정확히 짚어낸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의 출발점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자연스러움이 기계로 대체되고, 성적과 학벌, 재력이 인간의 가치를 가르는 기준이 되더라도, 작가들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끝내 자기 마음만큼은 옳다고 믿고 지켜내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그 마음을 쓰지 말라고, 자신을 갉아먹는 기준과는 작별하라고.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상상해본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어린 나의 손을 잡아줄 사람들을. 그리고 그 손길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의 나에게도 늦지 않게 다시 건네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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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양장 특별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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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대표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새 옷을 입고 돌아왔다. 작품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예전에 <카스테라>를 읽다 포기했던 기억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테마라니… 사랑 이야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더욱 망설여졌다. 그에 무색하게도 이 묵직한 책을 단 사흘 만에 읽어 치워 버렸다.

소설은 믿음이 사치가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세 남녀의 허무와 온기를 더욱 섬세하게 비춘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그와 그녀, 그리고 두 사람 곁을 묵묵히 지키는 조력자 요한. 세 사람은 첫 마음을 붙잡지 못한 채 맴돌면서도, 진심이라는 투명한 감정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꾸밈없이 보여 준다.

이야기는 불륜으로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둔 그, 그리고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 될 만큼 못생긴 외모로 상처받아 온 그녀가 서로에게 닿아 가는 과정을 그린다. 80~90년대를 배경으로 한 탓에 ‘추녀’라는 설정은 지금의 시선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흐린 눈으로 바라보면, 외모라는 키워드 뒤에 겹겹이 숨어 있는 자기혐오가 어떻게 한 사람을 잠식하는지, 그리고 사랑이 그 혐오를 이길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서로의 상처를 건드릴까 조심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순간들은 아프지만 아름답다. 가시를 숨기지 못한 고슴도치를 살살 쓸어내듯, 스스로 내면화해 버린 혐오의 가시를 더듬어 가던 그녀가 결국 사랑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 하는 장면. 그 진심이 담긴 마지막 고백 편지는 얼어붙어 있던 나의 심장을 천천히 녹여 냈다.

시간이 지나 그녀를 찾아가는 그, 그리고 불의의 사고. 그 이후의 삶을 서로 다른 가능성으로 펼쳐 보이는 세 개의 결말은 모두 각자의 여운을 남긴다. 특히 미숙한 두 사람의 속내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들어 준 요한은 다시 보니 더욱 인상적이었다. 염세적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사랑이 고팠던 인물. 그의 곁에도 누군가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괜히 오래 남았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p. 16~17)

결국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나도 몰랐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너’를 사랑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관계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자격 같은 건 없다고, 긴 연서를 끝맺고 난 뒤에서야 우리는 어둠 같은 세상 속에서도 왜 사랑을 붙들게 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작품이 영화로도 제작된다고 들었는데, 이 복잡하고도 순수한 세 사람을 어떻게 구현할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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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다 읽을 거야 일력 - 빈 책을 채우자 나의 이야기로
임진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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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향하는 매일은 결국 나를 읽는 일상에 가깝다는 작가의 말이 유독 마음에 오래 남는다. 한 페이지씩, 한 챕터씩 넘기며 숫자보다 오늘의 문장을 고르고 그러다 마음이 멈추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하루의 속도가 달라진다.


임진아의 <2026 다 읽을 거야> 일력은 단순히 날짜를 표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바쁘다는 이유로 흘려보낸 시간을 다시 붙잡아 주는 작은 멈춤의 장치처럼 느껴진다. 뺴곡한 일정으로 가득 찬 캘린더를 보다가 이 일력의 한 장을 넘기면, 잠시라도 나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일력 속 짧은 문장들은 떄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단단하게 하루의 마음가짐을 바로잡아 주며,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순간들의 가치를 다시 일꺠워 준다. 그래서 이 일력은 새로운 한 해를 계획하는 도구를 넘어, 나를 천천히 읽어내는 조용한 기록장. 이곳에 나의 마음도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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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 결심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두번째 선택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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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신선한 충격이 선연하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나의 행복을 우선한다'는 사고방식은 어쩌면 작은 혁명이었다. 초개인화가 삶의 기본값이 되는 시대가 올 거라 상상하지 못했던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나 멀리 와 있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10년 전보다도 한층 더 솔직하고 꾸밈없는 얼굴을 보여준다. "결국 이 모두가 그저 살면서 거쳐가는 과정"이라는 그의 말처럼, 판사에서 전업 작가로 인생 2막을 시작하며 마주한 현실의 민낯을 담담히 고백한다. 


'지금 이 일이 나와 꼭 맞고 너무 행복하다'는 식의 깔끔한 결말은 이 책에 없다. 대신 직업을 바꾸며 얻은 자유와 감당해야 했던 불안, 그럴싸해 보였던 계획들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오랫동안 자부심을 갖고 일했던 조직에서 부정을 겪고, 결국 퇴사해 진짜 꿈을 찾는 과정은 살 전체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내가 끊임없이 겪는 불안 역시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조차도 여전히 겪고 있는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써 내려가는 문장에는 첫 번쨰 삶에서 배어 나온 경험의 결이 진하게 묻어난다. 성공과 실패라는 단순한 잣대로 행위를 재단하는 사회 속에서도, 어떤 도움을 받았다면, 어떤 이득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태도가 느껴진다.


현실에서 포기해야 하는 선택지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개인주의자 선언>이 벌써 10년 전 책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의 이번 결심은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줄임표가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결심'처럼 읽힌다. 여전히 흔들리고, 다 써 내려가고, 또 수정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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