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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평점 :
넓은 어깨와 까무잡잡한 피부, 예쁘지 않은 외모 탓에 줄곧 위축된 채 살아온 안나. 반면 오랜 시간 예쁜 외모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중심에 서 있던 경선. 소설은 두 자매가 각자의 시선으로 쌓아 올린 개별의 서사가 어떻게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았는지, 지난 기억을 몸의 노화와 이를 인식하는 두 자매의 현재 시선으로 교차해 보여준다.
부모의 죽음으로 연결고리가 끊어진 둘은 오랜 시간 왕래 없이 살다가 경선의 전남편 P의 부고를 계기로 재회한다. 마침 수술을 앞두고 간병이 필요했던 경선을 위해, 일과 육아로 분주한 딸 다은을 대신해 안나가 그의 곁을 지키며 어색한 교류가 시작된다. 같은 나이, 비슷한 몸의 변화를 겪는 둘은 지척에서 상태를 살피며, 소멸의 감각인지도 몰랐던 시간이 멈춰있지 않음을 느낀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p. 212)
경선이 퇴원한 후, P가 남긴 뜻밖의 유산으로 손녀 다니엘 그리고 안나와 돌연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동상이몽인 두 사람이 한때 친밀했던 과거를 복기하게 된 것은 여행지에서 비로소 털어놓은 몰랐던 속 이야기 덕분이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부모와 안나만 서울로 떠나고 경선은 친가에 남겨졌던 첫 헤어짐의 순간. 오랜 시간 멀어진 마음의 시작이 각자 어떻게 비치고 해석되었는지 대화하며, 기억이란 참 얄궂고 이기적이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구실이 된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고통을 겪고 또 해결하면서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변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은 어딘가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 (p. 286)
작가는 노년의 자매가 느끼는 노화에 대한 당혹감을 쓸쓸하게 그리지 않는다. 아직 모든 게 새로운 손녀 다니엘이 세상을 감각하듯, 할머니들의 여생에도 생애 '첫' 순간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기록한다. 할머니-엄마-안나와 경선-다은-다니엘로 이러지는 5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는 무한히 흐른다. 이 흐름은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건축가가 되겠다'는 다니엘의 사랑스러운 장래희망과 맞물려 깊은 온기를 남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p. 357)
변해간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도, 지나간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 너머의 문을 열 수 있는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형하고 막연한 시간이 어떻게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감촉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온전히 실감했다.
"그래. 누군가가 기억하면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거지." (p. 247)
경선의 웃음이 참 행복하고 예쁘다고 진심으로 느낀 안나처럼, 안나 역시 웃을 때의 자신도 충분히 예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아가 다니엘의 명랑함과 다은의 주체적인 선택이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우리들의 이야기'로 계속 쓰이길 응원하게 된다. 한 사람의 몸 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