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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햇빛에 반짝이던 표지와 ‘여름은 고작 계절’이라는 제목이 너무 잘 어울려서, 처음엔 찬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계절은 생각보다 깊고 우울했고, 무엇보다도 아팠다. 김서해는 사춘기라는 예민하고도 격렬한 시기를 살아가는 소녀의 내면을, 너무도 섬세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펼쳐 보인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소녀가 있다. 제니와 한나. 이야기는 제니가 어른이 된 후, 과거를 돌아보며 시작된다. 그녀는 한나를 중심으로 한 우정의 기억, 그 안에 뒤섞인 애증과 후회, 폭력과 침묵을 하나둘씩 더듬으며, 그 시절을 다시 살아낸다. 어린 시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엔, 제니의 내면은 너무 복잡하고 절박하며, 한나는 그 감정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비추는 존재다.
과거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매번 다른 모습이 된다. 기억들은 계속 변화한다. 하지만 내 이야기에는 바뀌지 않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고, 나는 그것을 빈틈없이 헤아리고 싶다. (p. 8)
IMF가 드리운 불황 속에서 제니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그러나 그곳은 동화 속 꿈이 아닌, 인종차별과 배제로 가득한 냉혹한 현실이었다. 제니는 ‘그들 무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독하게 익히고, 운동신경을 뽐내며 인정받고자 한다. 하지만 백인 아이들과의 관계는 늘 불안하고 모래 위에 쌓은 탑 같았다. 결국 제니는 자주 자기 자신의 폭력성과 연약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 중심엔 한나가 있다.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자신은 해나가 아닌 한나라고 똑똑히 말하려 애쓰는 소녀. 어딘가 모자라 보이고, 제니처럼 싸우거나 버티려는 의지도 없어 보이는 한나는, 그래서 더 눈에 밟히고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동시에, 제니는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까 봐, 애써 무심한 척, 방관자의 자리를 택한다.
그러다 제니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한나를 보며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이 결국은, 자신이 스스로를 향해 느끼던 조악한 감정이라는 것을. “한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으면서 자꾸만 그 애를 생각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는 마음은 불가능함을 안고 애써 살아가던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제니가 한나의 이름을 절절히 외치며 무너져내리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마침내 제니가 자신이 피해자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또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폭력이 될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고 느꼈다.
우리도 모두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일의 진상보다 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게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외면하고, 애써 외면한 그 사람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후에야, 무너지는 마음을 뒤늦게 껴안는 순간.
모든 일에는 부스러기가 있으니까. 사건이 끝나도, 시간이 지나도 그것의 부스러기는 계속 굴러가니까. 사건은 애초에 끝이 나질 않으니까. 세상은 지긋지긋하게 연속되고 있으니까. (p.307)
그래서 여름은, 결코 고작 계절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의 여름은 그저 한 시절의 통과점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뜨겁고도 아픈 조각이다. 그리고 독자인 나에게도 그 여름은 내 안 어딘가를 건드리며 평생을 추위에 떨게 할 기억이 되었다.
우정이란 무엇일까. 서로를 구원하거나, 서로를 망가뜨릴 수 있을 만큼 가까웠던 두 사람. 제니는 회고 끝에 무엇을 얻었을까. 나는 이 긴 여정을 함께하며 바란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신만의 윤곽을 조금씩 더 분명히 그려갈 수 있기를. 형체를 알 수 없던 시절이 지나고,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된 그때의 마음들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