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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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다르게 깊은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소모적인 에너지를 줄이려는 본능 때문인지 조금만 결이 틀어져도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데 예소연 작가는 자꾸만 이름 모를 타인에게 다가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건네려 한다. 사소하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작은 이야기를, 마치 대단한 것처럼 속삭이고 그 속삭임의 효과로 누군가는 은둔하던 방을 치우며 사라진 소음 속에서 전환의 기점을 마련한다.


단편 <소란한 속삭임>을 대표로 책의 분위기를 말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다. 할머니, 고모, 친구 등 어쩌면 가장 친밀했지만 나를 위해 멀어질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옷자락을 다시금 잡아본다. 이 과정에서 현실 속의 비현실적인 극적 장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것이 현실로 돌아올 때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서 있는 곳이 꿈 속인 양, 먼지와 함께 부유하는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먼지를 굳이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는. "나로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조금씩 미워했고, 그건 지독하고 우스운 일이었다(p. 34)"는 고백처럼, 어쩌면 나 또는 그 부유하는 마음들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책은 어떤 말을 간절히 듣고 싶은 사람들, 그런 말의 결핍을 지닌 자들의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소설 속 인물들은 경청을 참 잘한다. 제멋대로의 필터가 만연한 시대에서 이상한 이야기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내 것처럼 들어주고, 그에 감사하며 응답하는 인물들의 케미스트리가 내가 잃어버린 온기의 위안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이 극대화된 작품이 <아무 사이>였다. '아줌마'나 '도우미'처럼 뭉뚱그려진 이름이 아닌, 온전한 내 이름을 핸드폰에 저장한 할머니에게 굳이 전화번호를 외웠는지, 그 노인의 기억력을 살아있게 해주려고 애쓰는 부분에서 감정이 터졌다. 이름을 불러주는 온기에 감응하는 발화가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위로가 아닌가 생각하며.


그럼에도 모아가 시내와의 만남을 지속했던 건 시내의 마음이 좋았고, 자신 또한 병들어 있었고, 더불어 지금이 세상에는 어디 하나 병들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p. 156


서로의 병듦을 알아채고 손을 맞잡는 공동선의 무리. 이 소설집은 그렇게 먼지처럼 부유하는 우리들이 서로의 옷자락을 찔끔 붙잡아보는, 그 연약하고도 나직한 연결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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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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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갈등은 갈수록 첨예해진다. 특히 '역차별'이라는 단어가 전방위적으로 쓰이는 현상을 마주할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다. 본래 150을 가졌던 이들이 100을 나누어 평등한 사회의 기틀을 만드는 과정임에도, 그들은 원래 내 것이었던 50을 뺏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외친다. 이 모순된 논리에 대항할 '상식의 언어'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예전엔 말도 안 되는 주장에는 논리로 반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무논리조차 견고한 성벽을 쌓고 "반박 못 하겠지?"라며 승리를 자축한다. 그 당당함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이들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저자는 이른바 '이대남'으로 대변되는 세대의 피해의식과 정치권이 이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피해자 서사를 훔쳐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며, 그동안 느낀 답답함의 실체를 정리한다.

나는 여성이다. 내 안에 수많은 의견이 있지만, SNS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안전한 쪽'으로 우회하곤 한다. 누군가의 오래된 권위에 도전하는 순간 돌아올 공격과 혐오가 얼마나 날 선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별을 떠나 이토록 선명하게 본질을 꿰뚫는 글을 쓰는 저자의 용기가 더 대단해 보였다.

여전히 정치권은 남성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 혐오를 동력으로 삼고, 페미니즘이 사회적 화두가 되었음에도 여성의 자리는 여전히 위태롭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억눌린 마음이 바로 서려 할 때 일어나는 탄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분노를 건강하게 풀어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본질을 살펴야 한다.

결국 바꾸려는 것은 거창한 권력 쟁탈전이 아니다. 나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세상, 나의 존엄이 지켜지는 일상. 그리고 미래의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토대. 그 뿐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들이 모여, 조금 더 다정한 세상이 되길 바라며. 비난보다는 비판이, 혐오보다는 공존의 논의가 오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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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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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눈을 의심케 하는 이야기가 쏟아진다. 받아쓰기나 운동장 활동, 수학여행, 생일파티 같은 학교의 일상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 아이가 다칠까 봐', 혹은 '아이 자존감에 상처가 날까 봐' 제기되는 학부모들의 항의 때문이다. 쏟아지는 민원을 감당하기 버거운 교사들은 결국 개선이 아닌 '폐지'를 택한다. 교권과 민원 사이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이제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괴이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신성아 작가는 워킹맘이자 주양육자로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털어놓으며, 이 현상의 핵심을 '돌봄의 탐욕화'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탐욕은 단순히 욕심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내 아이만큼은 세상의 모든 위험과 상처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이른바 '무균실의 아이들'을 만들려는 강박에 가깝다.

과거에 돌봄이 공동체의 책임이었다면, 현대 사회의 돌봄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짐이 되었다. 국가와 사회가 비워둔 그 틈새로 부모의 불안이 싹을 틔웠다. 내 아이가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돌봄을 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가두고, 급기야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라도 내 아이의 안녕만큼은 확보하려는 비정상적인 형태로 변질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단 한 명의 어른이 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게 누구든 우리 사회의 미래 세대라는 점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p. 211)

이러한 돌봄의 위기는 개인의 유난스러움을 넘어,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구조적 결함에서 기인한다. 책임질 자녀도, 부양할 식구도 없는 비혼 여성인 내가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돌봄이란 결국 아이를 키우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취약함'과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은 설마 내가 그런 부모가 될 줄 몰랐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려 현대 사회 돌봄의 정체성을 묻는다. 우리는 아이를 상처받지 않게 키우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지만, 실은 아이가 세상의 거친 풍파를 견뎌낼 '사회적 면역력'을 빼앗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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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예찬 - 문구인 김규림이 선택한 궁극의 물건들
김규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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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고 비싸고, 누가 봐도 좋아할 것 같은 물건들.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것들에 큰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자취를 하면서였다. 작은 방을 내 취향으로 가득 채워 보고 싶었지만, 막상 살아 보니 ‘취향’보다 먼저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4평 남짓한 방은 생각보다 더 작았고, 필요한 것만 들여놓아도 금세 숨이 막힐 듯 빼곡해졌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생각보다 꼭 필요한 건 많지 않다는 걸.


자취를 마치고 돌아온 뒤, 나는 더 이상 물건으로 취향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실용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작고 귀엽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기꺼이 귀찮은 일들을 곁에 두는 이 마음이 결국 나를 더 나답게 살아가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p.24)


그 마음을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 건 저자의 소비 일기 때문이었다. 저축과 투자로 ‘불리기’가 미덕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소비의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과시도 변명도 없이, 그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결국 소비는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무엇으로 나를 기쁘게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


작가는 ‘아무거나’의 자리를 조금씩 줄이고, ‘반드시’의 자리를 넓혀 간다. 덤으로 받는 안경닦이 대신 매일 손에 닿는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생필품을 더 좋은 것으로 교체한다. 그 선택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묘하게 단단하다.


나 역시 그런 소비를 따라 해 보았다. 매일 쓰는 물건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바꾸는 일. 생각보다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나를 조금 더 또렷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이었다.


내가 진짜 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단순히 돈을 쓰는 소비 행위를 넘어, 잘 소비한 물건 하나가 삶을 훨씬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이끌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한 진심 어린 ‘예찬’이다. (p.278)


소비는 낭비가 아니라 태도일지도 모른다. 나의 하루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은 분명하게 나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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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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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한 발 뒤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크게 분노하지도, 선명하게 편을 들지도 못한 채 작은 표시만 남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태도가 부끄럽게 느껴져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책이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악인이 흔할까? (p. 7)

그래, 알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사이코패스일 리 없고,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하루를 계획하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는 것을. 그럼에도 수없이 스쳐가는 타임라인을 보면 온통 의도적인 악인들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진다. 말 한마디, 선택 하나, 침묵조차도 끊임없이 의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앎과 삶 사이에서>는 저자가 그동안 연재해 온 칼럼들을 주제별로 묶은 책이다. 각 글은 독립적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실리’ 이상의 무언가를 향한 질문이 공통으로 흐른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그 앎은 과연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 조형근은 거창한 정의의 자리에 서기보다 어중간하게 살아온 소시민의 위치에서 사회와 정치를 바라본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다채롭지만, 그 출발은 삶에 있다. 

누군가 앞장서서 대신 비판하고, 분노해 주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오히려 복잡해졌다. 명쾌한 결론 대신, 판단의 책임이 다시 독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책 전반을 관통하는 '책임'에 대한 감각은 송곳처럼 미세한 일상의 틈새를 파고든다. 

실수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오랜 생각과 신념의 결과라면 과연 어디까지 개인의 책임으로 물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지치지 않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혐오가 일상화된 시대. 그가 꺼내는 이슈에 머리가 지끈거린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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