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화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베어 타운'. 과거 하키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쇠락한 숲속 마을일 뿐이다. 이 조그만 마을의 희망은 청소년 하키 팀이 승리를 거두어 주목을 받는 것이다. 어른들은 오로지 그 목표 하나만으로 하키를 숭배하고 즐기며 모든 노력과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그저 스포츠일 뿐인데, 나이가 많아봐야 열일곱인데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 압박을 받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을 보고 배운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측면도 다분하다. (p. 528)

 

우린 얼마 전 평창 동계 올림픽을 통해 강한 희열과 감동을 맛보았다. 비인기 종목이었던 컬링과 썰매 종목이 뜻밖의 메달을 획득하면서 국민의 관심이 쏠렸고, 스피드 스케이팅에선 팀워크가 문제시되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단 몇 분간의 경기로 하나가 되었다. 때론 메달 색을 따져가며 아쉬워했고, 실망스러운 결과에는 비난과 격려가 공존했다. 이때 우리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베어 타운으로 옮겨가면 왜 이들이 하키에 이만큼 목숨을 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키로 얻는 그 순간의 기쁨, 어른들이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성을 통해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스포츠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만큼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초월을 느끼는 몇 번의 순간들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불사르고 피를 흘리고 울부짖는다. (p. 205)

 

이 스포츠 세계는 그만큼 냉혹하다. 우리는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의 차별 대우에서 이미 느끼고 있다. 메달을 따지 못하면 쏟아지는 악성 댓글로 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알고 있다. 재능 있고 백이 있는 선수 뒤에는 그를 지키기 위한 서포트 선수가 있고, 후원자의 유무로 어린아이들조차도 소위 줄을 바꾼다. 아이들도 돈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를 더욱 부추기고 당연한 것으로 체감하게 한다.

베어 타운은 그 모든 게 응축되어 있다. 부와 재능을 동시에 가진 유망주 케빈, 그를 다치지 않게 온몸으로 서포트하는 벤 이, 재능이 있지만 돈이 없는 아맛 이들은 모두 팀워크를 강조하는 하키 세계에서 빈부격차로 생겨난 위계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코치도 모든 전략이 "이기자"인 사람, 올바른 선수로 자라나는 것이 우선인 사람, 무능한 사람 등으로 제각각의 성향을 보인다.

베어 타운을 보면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키가 아니어도 청소년들은 학업으로 압박을 받는다. 부와 재능을 둘 다 겸비한 아이는 늘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부모 역시 이를 반드시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루에 학원을 대여섯 개씩 옮겨 다니며 각종 스펙도 준비하여 서울대를 가야 한다. 친구지만 늘 경계해야 한다. 상위권을 받쳐주는 성적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교내에서 선생님들도 오로지 성적에 따른 차별 대우를 일삼는다. 매우 잘하는 애들은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나머지는 야생동물처럼 방치한다. 아예 가망도 없어 보이는 아이는 거들떠도 안 본다. 과연 이 마을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법한 이야기일까?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에 따라 윤리와 정의는 뒷전으로 물린 베어 타운의 모습은 하키라는 단어를 공부로 대체하면 지금 우리 사회와 섬뜩하리만치 닮은 구석이 많다. (p. 569)

 

소설의 후반부에서 케빈이 코치의 딸 마야를 성폭행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가해자인 케빈은 옹호 받는다. 오히려 팀 내 전력에 피해가 가자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피해자인 마야를 가해자로 만든다. 케빈은 후원자의 아들이다. 이들의 지원이 끊기면, 유망주인 케빈이 몰락하면 베어 타운의 미래는 보장받지 못한다. 그들은 그 어떤 윤리적 행위보다 이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곧 진실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가 생각난다. 마야가 신고를 해고 진술을 해도 사람들은 마야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한다. 여기에는 여성차별적 시각도 보인다. 그 시간에 여자애가 남자애 방으로 들어갔으면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가장 뻔하면서도 죽지 않는 말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피해자는 증명을 통해서 계속 자신이 피해를 입증만 해야한다. 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지, 왜 상처 부위를 사진으로 찍어놓지 않았는지, 왜 이제서야 신고를 했는지 취조를 통해 피해자가 오히려 내몰린다.

소설에는 하키 퍽을 치는 소리를 "탕탕탕"으로 표현한다. 이는 총소리와 유사하다. 마야가 케빈에서 총구를 겨눈 건 케빈이란 아이로 표현된 사회의 부정함에 총을 겨눈 것일 테다. 하키 퍽을 치는 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탕탕탕"은 작가가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함에 겨누는 경고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