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김유진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는 것과 보는 것이 완전히 뒤틀린 인생이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는 두 사람의 인생. 한없이 위태로운 두 인생이 하나로 겹쳐 보였다. (p. 181)


기억을 되돌리는 기술과 지워내는 기술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 한쪽이 공식 인정을 받아 정당한 치료로서 통용된다면, 다른 한쪽은 음지에서 돈과 욕망을 위해 암암리에 행해진다. 전자가 회복술, 후자는 제거술이다.


브레인 임상 연구센터의 의사 김수오는 담당 교수 몰래 어머니의 회복술을 집도하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과거를 잊은 것이 아니라, 강제로 기억을 제거당했다는 것. 불행히도 그 기억은 잔혹한 흔적이었고, 과거를 되찾은 어머니는 자신을 불안 속에 가둔 채 살아간다. 이제 분노한 수오가 진범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경재를 알게 되며 진실이 드러난다.


주경재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 인물은 물론, 곁에 두는 비서의 과거까지 강제로 없애는 인물이다. 삭제에 그치지 않고 가짜 기억을 심어, 수술대에 오른 이가 더 이상 '진짜 나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소설은 임상적 행위에 불과해 보이는 기억 수술이란 상상으로, 한 인간의 삶과 본래의 정체성이 어떻게 철저히 망가지는지 서늘하게 보여준다. 지나온 흔적을 복원하려는 김수오와 끊임없이 없애려는 주경재. 이들의 악연이 교차하며 치닫는 복수의 끝이 회복술과 제거술의 혼합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기억의 공백 사이로 타인의 삶이 몽땅 주입된 주경재는 숨은 쉬되 살아있지 않은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타인의 삶을 유린하던 자가 자신의 기술로 스스로의 존엄을 땅바닥에 팽개쳐버린 셈이다. 우리가 살아온 일상은 보기 좋은 면만 잘라 붙이거나 조립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위적인 손길로 삶의 궤적을 쥐락펴락하면 어떤 경고장이 날아오는지 소설은 생각해 보게 한다. 


흔히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라 말한다. 그러나 경험에 따라 살아갈 힘도, 죽도록 아픈 트라우마로 각인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라는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 삶 안으로 체화할 것인지. 좋고 나쁨을 떠나 이미 영향을 미친 기억을 나의 정체성으로 인정할 것인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한 시대가 저문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대표작 몇몇을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투명한 나선>을 펼치는 마음이 유독 묘했다.

​

'갈릴레오 시리즈' 중 하나인 <투명한 나선>은 주인공 물리학자 유카와의 개인사와 감정적 면모가 처음으로 깊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갈릴레오 시리즈는 형사 구사나기가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물리학자 유카와를 찾아가는 구도가 공식처럼 작용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익숙한 공식을 비틀며 시작한다.

​

바다에서 떠오른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고, 자취를 감춘 그의 여자친구 소노카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형사들은 소노카의 행방과 동기를 쫓던 중, 그녀를 돕는 조력자 나에가 유카와와 메일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참고인으로 찾아간다.

​

유카와는 사건과 무관한 개인 정보라며 말을 아끼지만, 사건 현장마다 모습을 드러내며 수상할 정도로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형사들 몰래 독자적으로 행동하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구사나기는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기시감을 느끼는 점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

인물들 사이에 얽힌 가족사는 핵심 내용이라 자세히 담을 수 없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그리고 아무리 냉혹한 사람이라도 저마다의 역린이 있다는 걸 말한다. 용서받기 힘든 개인의 선택이 존재함에도, 서로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때로는 눈과 귀를 닫는 인물들의 모습이 깊은 잔상을 남겼다.

​

최근 장르 소설을 잇달아 읽으면서 선명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을 자주 접해서일까. <투명한 나선>은 그들에 비해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인물 간의 관계와 가계도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프린츠하우스 ㅣ ANGST
강지영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남동 고급빌라 '프린츠하우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책은 동양의 악귀와 서양의 악마, 구마 사제와 무당까지 등장하는 새로운 오컬트 소설이다. 인간의 욕망, 돈과 권력, 이 모든 걸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조소하는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서 짙게 느껴진다.

​

고독이란 독을 가진 벌레들을 한 독에 넣어 서로를 먹고 먹히게 해서 강력한 저주의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프린츠하우스는 바로 고독의 항아리와 같다. 고독에서 태어난 신원불명의 귀신, 이를 이용하려는 악마는 어린 학생인 승아의 몸에 빙의한다. 승아를 좌지우지하는 악마는 프린츠하우스 사람들과 승아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힘을 극대화해 줄 강력한 영체인 주인공 선우까지 집어삼키려 든다.

​

소설은 고독처럼 터지기 직전인 화려함의 이면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선우의 집에 세입자로 들어온 승아가 알고 보니 이 집의 전 주인이고, 승아에게 빙의된 악마가 선우를 농락하며 제 입맛대로 조종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

조력자로 알았던 무당 한신이 파놓은 함정에 걸린 선우는 승아를 구하려 했던 이사악 신부와 그를 믿으며 퇴마에 동참한 프린츠하우스 사람들의 비밀에 다가서며 이 집에 깨끗한 사람이란 없단 걸 깨닫는다. 그들이 퇴마하는 대상은 악령만이 아니다. 지난날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이자 여전히 숨기는 욕심이다. 악령이란 무형의 존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취약함과 아이러니가 얽히고설키는 과정 자체가 호러였다.

​

이 집의 흉흉한 소문을 모르는 타인에게 집을 팔아넘기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선우. 불행을 털어내기 위해 타인에게 불행을 전가하는 집을 사고파는 행위. 그 반복 속에서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악마를 퇴치하며 튄 불티는 상흔을 남겼다. "쓰는 내내 죽을 맛이었다"라는 작가의 말이 지극히 이해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웃는 숲 - 제19회 중앙공론문예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소담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울창한 숲 '가미모리'에서 다섯 살 자폐 아동 마히토가 실종된다. 대대적인 수색에도 찾지 못했던 아이는 일주일 만에 무사히 돌아온다. 돌아온 마히토는 숲에 가기 전엔 알지 못했던 노래와 단어, 어딘가 달라진 행동을 반복하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았는지 묻을 때마다 "곰아저씨를 만났다"라는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한다.

​

삼촌 도야는 마히토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며 사라진 일주일을 추적해간다. 그 과정에서 마히토가 만난 네 명의 어른이 드러난다. 각자의 사정으로 아이를 신고하지 못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있는 그대로 마히토에게 호의를 베푼다.

​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던 아이는 생존을 위해 그들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낯선 사람들과 교감하며 마음까지 어루만진다. 겉보기에는 어른들이 위험에 처한 아이를 도와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처투성이 어른들이 마히토를 통해 잃어버린 생의 의지를 회복해 간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숲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과 절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마음이었다.

​

곰 아저씨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는 소소한 반전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며 여운을 남겼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른들은 마히토를 '눈치를 살피며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닌 '마음을 나누는 존재'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

악연이라 생각한 인연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숲속의 외로움과 추위 속에서도 울거나 떼쓰지 않고 씩씩하게 길을 걸었던 마히토처럼, 누구나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길 응원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하기와 듣기는 일상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말하고 대답하며 소통을 이어간다. 그 속에서 '진짜 듣기'는 과연 얼마나 이뤄지고 있을까.


타인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 친한 친구와 있어도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휴대폰으로 시선이 향한다. 계속 듣고 있으니 말하라며, 스스로 단단한 벽이 된다. 이런 건성으로 듣는 태도 때문에 위로보다 불화가 쌓이고, 대화의 맥락 대신 꽂히는 특정 어휘만 뇌리에 박히곤 한다.


비밀을 듣기 위해서는 상대방 삶의 맥락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의 말을 유심히 듣는 수밖에 없다(p. 8). 저자가 10년 동안 기자로 만난 이들은 혼자서는 안고 갈 수 없는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줄 때까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12·3 사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참사 유가족, 각종 혐오 사건의 당사자와 춥든 덥든 광장으로 나서는 이들까지. 유지영은 그들을 취재하고 들으며 스스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담담히 털어놓는다.


듣기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행위다. 내가 들은 말은 좋든 나쁘든 나와 내 삶을 바꾸었다. 나는 많은 사람의 말하기 덕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 내게 듣기란 타인을 보는 창이고, 때로는 강강술래처럼 함께할 수 있는 놀이다. (p. 9)


그는 "나는 내가 들어온 것의 총체(p. 17)"라고 말한다. 우연히 내뱉은 말, 계속 기억되는 말은 모두 '듣는 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들은 말의 무게를 무책임하게 옮기지 않고, '내가 정확히 그렇게 들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가꾸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 퍼즐 조각의 모서리가 빈 공간에 딱 들어맞은 것 같은 정확감, 내가 어찌저찌 흘러온 삶이 말하는 이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고, 말하는 이의 감정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p.48~49)


요즘의 일상은 타인의 불편감으로 가득 차 있다. 저마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털어놓으며 온전한 환대를 바라지만, 정작 감정 쓰레기통처럼 변해버린 대화가 듣는 이의 영혼에 어떤 생채기를 낼지는 생각지 못한다. 말에는 나만 가득 차 있고 답은 정해져 있다.


무엇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거라고. 내가 뭔갈 듣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내가 그걸 듣고, 느끼고, 변화하겠다는 뜻이다. (p. 7)


제대로 듣기 위해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왜 나는 이 부분이 불편할까', '그 불편함은 내게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내가 들은 것을 쉽게 옮길 때 나의 듣기는 온당했는가', '나는 훌륭한 청자였는가'.


내 삶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남의 말을 담을 수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제 듣기의 중심을 바꿔야 한다. 머리가 아닌 마음, 그 중심인 심장을 향하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