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카노 위픽
김유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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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김유원의 소설 <와이카노>에는 대체로 평범한 한국 사회의 모녀가 가진, 어딘가 뒤틀린 정이 담겨 있다. 대구에서 칼국숫집을 운영하는 '선희'는 평생을 화구 앞에서 보내며 두 자녀를 키워낸다. 자식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남들과는 다른 시대의식에 적당히 편승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설거지 담당 '경숙'이 퇴직금 이야기를 꺼낸다.

빠듯한 형편은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목돈 마련은 부담인 선희는 퇴직금이라는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버럭 화를 내고, 겁을 먹는다. 그렇다. 선희는 돈돈거리는, 우리네 ‘엄마’ 같다.

다른 엄마들처럼, 선희도 자식에게 위로받고 싶어 딸 '해리'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돌아온 건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다. 해리는 오히려 따져 묻는다. 선희는 그 말들에 의문을 품는다. 그 의문은 화로, 짜증으로, 분노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딸이 괜찮은지', '경숙이 또 퇴직금 이야기를 꺼내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눈치로 두 아이를 길러낸 세대의 여성, 그게 선희다.

선희는 딸이 쓴 소설을 읽으며 점차 이들의 애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과거를 되짚으며, 자식이 갖게 된 원망 어린 감정을 알게 된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는 부모, 아니 '표현해본 적 없는' 부모에게서 자동으로 나오는 말은 결국, “니 와이카노?”다.

그 말은 단순한 사투리가 아니다. 선희가 딸에게 건네는 질문이며,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 없는 부모 세대가 자식에게 던지는 정서적 질문이다. <와이카노>는 흔한 모녀 서사를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산뜻하게 풀어낸다.

작가는 말한다. “서로의 고생을 알아주려 노력하고, 서로의 감정을 물어봐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희는 아이 둘을 잘 키워냈다는 자부심에 눈이 가려 있었고, 해리는 말 한마디 못하고 어머니의 고생을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제는 편히 쉬어도 될 나이에도, 선희는 여전히 자식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하면서도, 그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아 꾹 눌러 삼키는 그런 마음들이 “와이카노”라는 정겨운 사투리로 녹아든다.

제목이 흥미로워 펼쳐 든 책이었지만, 어느새 선희의 감정선에 깊이 이입해 읽고 있었다. 나 또한 해리처럼 퇴직금이란 엉킨 감정을 손수 마련해 퉁 내려 놓은 적이 있고, 엄마는 그런 자신이 고생만으로 환원되는 듯해 허망함을 느낀 순간이 있다. 우리도 서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나름의 노력을 하기보단 감정을 먼저 분출할 때가 많았다.

작중 ‘감탄 아래 깔린 원망’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희처럼, 나 역시 그런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선희가 식당 손님들의 무례함을 그저 넘기며 살아온 것처럼, 우리는 가까운 관계에 오히려 더 무심해지는 아둔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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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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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부터 느껴왔지만, 이서수 작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놀라울 만큼 실감 나게 그려낸다. 가정, 노동, 육아, 회사, 사회, 현실... 삶의 다층적인 면면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부당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이서수의 화자들은 좌절하거나 무너지기보다, 울렁울렁 아니 꿀렁꿀렁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그들이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며 새로운 반환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인 점이 좋았다. 


소설집 첫머리에 실린 <이어달리기>는 실직한 모녀가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이야기다.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자녀가 사실은 부모의 생계에 무임승차하고 있었음을, 세심하면서도 날카롭게 짚어낸다. 나 여시 "엄마에게 용돈을 드리는 효녀'라고 자부해왔지만, 이 소설은 생활비와 공과금 등 가정의 실질적인 경제기반을 누가 감당하고 있었는지, 진정한 자립이란 무엇인지 되묻게 만든다.


퇴사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나는 엄마를 생각해서 참지 않았다. 도리어 엄마를 떠올리며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굳혔다. 엄마가 돈을 버니까 나는 몇 달 정도 쉬어도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합리화했는데 엄마는 나를 떠올리며 참았다니. (p. 37)


이 짧은 문단 하나로, 세대 간의 책임감과 기대, 그리고 버팀이라는 이름의 착취까지도 뼈아프게 드러난다. <춤은 영원하다>에서는 이모와 엄마 그리고 딸인 화자가 '춤'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억압된 삶을 몸부림치듯 표현해낸다. 춤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인내와 억눌림, 그 모든 것에 맞서 싸우는 방식이다. "버티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동의어"가 된 지금, "친구들의 고민은 나라의 고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누간가를 웃게 하려고, 혹은 울음을 삼키려고 울렁이는 리듬을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집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모두가 제각기 다른 결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나는, 우리는 정말 안녕한가.


익숙한 듯 낯선 여성들의 삶을 따라 읽다 보니, 내 처지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이 오히려 이상한 안도감을 줬다. 사는 모양은 다르지만 어딘가는 닮아 있다는 감각. 그리고 어쩌면 그건 불안 속에서도 몸부림치는 '우리의 리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한 두 개여야 말이지. 살아가는 건 조금씩 후회가 쌓이다 어느 순간 우르르 무너져 그 밑에 깔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 230)


이서수의 소설은 바로 그 작은 움직임을 기록하고 응시한다. 부질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노력조차 이 세계를 살아내는 방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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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더불어 사는 이야기집을 짓다 - 이야기 창작의 과정
황선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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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 날. 장래희망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창작 동화 작가". 어린 시절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그 꿈의 씨앗은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결말에서 비롯되었다. 기존 동화의 틀을 넘어 삶과 죽음, 자유와 희생에 대해 곱씹게 했던 그 책은 지금도 내게 '인생의 책'이라 꼽을 만큼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점점 그때의 떨림과 열정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어린이였던 시절보다, 지금의 내가 더 절실히 동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우리 모두 한때는 어린이였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p. 34)


작가는 이 책에서 단순히 '어떻게 동화를 쓰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해' 쓰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공유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어린이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다. 작가는 어린이를 단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세상의 복잡함을 이미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존재로 본다. 그래서 동화 속에서 금기시되던 소재나 결말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단단한 태도를 유지한다. 


동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특히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쓴다는 점에서, 그 무게는 더 커진다. 아이들의 순수한 울림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진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작가는 고심을 거듭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흥미로운 작업인지를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어른이 쓴 동화가 아이의 마음에 진심으로 닿기 위해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자 진실이어야 하니까.


나는 여전히 동화가 주었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동화 속 인물들이 내 어린 시절과 겹쳐질 때면, 그들의 고민과 기쁨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유년이 언제나 반짝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끔, 아주 오래전 내가 품었던 다짐을 떠올린다. 


"나 같은 아이가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다. 동화가 단지 어린이를 위한 장르가 아니라,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해주는 문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지금 동화와는 조금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 나이지만, 이 책을 읽고 다시 적어본다. 


장래희망: 내 안의 어린 아이를 위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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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일기
소피 퓌자스.니콜라 말레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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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다듬어진 글보다 거칠고 솔직한 문장이 더 깊숙이 다가올 때가 있다. <내면 일기>는 바로 그런 문장들로 가득한 책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속삭이듯 내면을 파고들며, 독자인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매일 써 내려가던 일기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면 일기>는 몽테뉴, 카프카, 시몬 드 보부아르, 버지니아 울프, 사뮈엘 베케트 등 이름만 들어도 숨막하니는 문호들의 일기에서 발췌한 글들을 엮은 책이다. 각기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아간 이들이지만, 그들이 남긴 일기에는 공통적으로 '내면의 진실'이 담겨 있다. 문학 작품으로 만났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혹은 감춰져 있던 그들의 속내와 사유가 날것 그대로 펼쳐진다.


흥미로운 건, 이 일기들이 결코 매끄럽거나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문장이 다소 엉성하기도 하고, 논리적인 흐름이 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 허술함 속에서 오히려 더 진한 감정이 느껴진다. 문장 구조나 표현 방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나느냐가 핵심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기가 가진 힘 아닐까.


"나는 어떤 일기를 쓰고 싶은가? 코는 성기게 짜였으나 소홀함 없는 어떤 것. 뇌리에 떠오르는 중대하거나 가볍거나 아름다운 모든 것을 아우르기 위해 충분히 유연한 어떤 것. 검토하지 않은 채 수많은 것을 아무렇게나 던져둘 수 있는 낡고 바닥이 깊숙한 사무용 책상이나 드넓은 벽장을 닮았으면 좋겠다." - 버지니아 울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기는 문학의 원형이자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장르가 아닐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위한 글. 그래서 더 자유롭고, 더 진실하며, 때로는 더 아프다. 작가들의 고백과도 같은 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나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무심코 써온 내 일기도 문득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저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일 뿐이었던 일기장이, 이제는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예술처럼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내 일기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글이자, 가장 나다운 기록 일지도 모른다.


<내면 일기>는 그런 깨달음을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전해주는 책이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것들을 언어로 꺼내고 싶어질 때, 이 책은 좋은 동반자가 되어준다. 일기를 쓰는 사람, 쓰고 싶지만 망설이고 있는 사람, 또는 그저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은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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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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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린 종종 잊곤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차별과 혐오를 행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저자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어떻게 차별로 이어지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설명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특히, 우리가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되돌아보고 변화할 것을 촉구한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p. 60)


그래서 위 문장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우리'라며 환대하는 태도와 '그들이라며 배척하는 태도 사이에는 극명한 온도 차이가 있다(p. 50)는 말마따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약자가 되기도 하고 강자가 되기도 하며, 주관적인 관념에 따라 경계를 짓고 살아간다. 사각지대는 생각보다 많고 그걸 일일이 지적해 줄 사람은 너무도 적다. 가볍게 이 책을 펼친 것처럼 가벼이 차별에 가담하게 되는 가해자가 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렇듯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는 많은 기준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편향되어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p. 111)


남을 돕는 게 천성이라 믿고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지금도 복지 차원의 일을 하고 있다. 복지라는 천사같은 단어와 다르게 이 업계는 '조건'에 따라 편을 가르고, 대상자를 '선별'하고, 그 과정에서 '불편부당한 차별'이 자주 발생한다. 누군가의 더 나은 삶을 만들고자 하는 일이지만, 그 생각이 독이 될 경우가 많고 알게 모르게 색안경을 낀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볼 때도 많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한번도 내 마음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왜 저러고 살까 한숨도 쉬었으면서.


TV에 나오는 권력이란 것을 나도 갖고 있었고, 자주 갑과 을의 입장에서 호오를 판별하고 있었다. 공공질서라고 하는 '공공'이 다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소수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만능 논리가 탄생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다수를 위해 희생하는 쪽이 늘 발생함을 인지하면서 그 시스템을 바꿀 힘은 우리에게 없다고 자조하고 있었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상징이며 선언이다. (p. 205)


마지막까지 읽고서야 참았던 숨을 후우 내뱉을 수 있었다. 공존의 조건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옳은 삶을 규정하지 말기라는 차원에서 차별을 바라봐야 한다는 그의 조언이 아직은 막막하게 다가왔다. 일단 내가 있는 곳이 작은 새장이었단 걸 인식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내가 서 있는 곳이, 살아가는 사회가 점점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다가온다.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아무렇지 않게, 내게 해가 될 일을 제거하며 살기 위해서 오롯이 나만을 위해 그렇게 살아왔다. 그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젠 더 나아가 '선량한'이란 단어를 지울 수 있게, 최소한 '노력하는' 차별주의자라도 될 수 있게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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