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양장 특별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평점 :

박민규의 대표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새 옷을 입고 돌아왔다. 작품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예전에 <카스테라>를 읽다 포기했던 기억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테마라니… 사랑 이야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더욱 망설여졌다. 그에 무색하게도 이 묵직한 책을 단 사흘 만에 읽어 치워 버렸다.
소설은 믿음이 사치가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세 남녀의 허무와 온기를 더욱 섬세하게 비춘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그와 그녀, 그리고 두 사람 곁을 묵묵히 지키는 조력자 요한. 세 사람은 첫 마음을 붙잡지 못한 채 맴돌면서도, 진심이라는 투명한 감정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꾸밈없이 보여 준다.
이야기는 불륜으로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둔 그, 그리고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 될 만큼 못생긴 외모로 상처받아 온 그녀가 서로에게 닿아 가는 과정을 그린다. 80~90년대를 배경으로 한 탓에 ‘추녀’라는 설정은 지금의 시선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흐린 눈으로 바라보면, 외모라는 키워드 뒤에 겹겹이 숨어 있는 자기혐오가 어떻게 한 사람을 잠식하는지, 그리고 사랑이 그 혐오를 이길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서로의 상처를 건드릴까 조심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순간들은 아프지만 아름답다. 가시를 숨기지 못한 고슴도치를 살살 쓸어내듯, 스스로 내면화해 버린 혐오의 가시를 더듬어 가던 그녀가 결국 사랑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 하는 장면. 그 진심이 담긴 마지막 고백 편지는 얼어붙어 있던 나의 심장을 천천히 녹여 냈다.
시간이 지나 그녀를 찾아가는 그, 그리고 불의의 사고. 그 이후의 삶을 서로 다른 가능성으로 펼쳐 보이는 세 개의 결말은 모두 각자의 여운을 남긴다. 특히 미숙한 두 사람의 속내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들어 준 요한은 다시 보니 더욱 인상적이었다. 염세적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사랑이 고팠던 인물. 그의 곁에도 누군가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괜히 오래 남았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p. 16~17)
결국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나도 몰랐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너’를 사랑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관계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자격 같은 건 없다고, 긴 연서를 끝맺고 난 뒤에서야 우리는 어둠 같은 세상 속에서도 왜 사랑을 붙들게 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작품이 영화로도 제작된다고 들었는데, 이 복잡하고도 순수한 세 사람을 어떻게 구현할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