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까봐
이지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여행은 몽환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진짜가 맞는지 계속 되묻게 만든다. 살고 있는 현실로 되돌아오면 지난날은 '서서히'도 아닌 '순식간'에 휘발되지만 그 휘발성 덕분에 그간의 기억에 매달려 기록을 남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꺼내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남겨진 기록들은 일상을 살아가며 지칠 때마다 꺼내 보는 한 페이지로 남게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까 봐』란 제목도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과거의 기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불러낸 세계이며 그것은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다. 옛 기억들을 글로 불러내면서 그것을 경험했다. 낡은 외투 같은 옛이야기들의 먼지를 털고, 밝은 햇살 앞에 드러내 다듬는 가운데 새로운 시간이 열렸다. 글을 쓰는 동안, 행복한 기억들이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자꾸 솟구쳐 올라 행복했다. (p. 7)

 

400개의 도시에서의 경험과 인연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기억엔 추억들이 자리해 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부터 여행을 다닌 저자의 이야기부터 최근의 여행담까지 먼지 쌓여 한 켠에 자리해 있던 장면과 느낌을 하나둘씩 꺼내 본다. 되짚어 보면 힘들지만 즐겁기도 했고, 황당하고 무섭기도 했던 여러 편의 장면은 부정적인 감정은 걸러진 채 웃음만이 가득하다. 그가 현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이 만나는 터전이다. (p.54)라고 말했 듯, 현재에 서 있는 그는 다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힘을 과거로부터 얻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묘사가 생생하게 재생되는 점이 좋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벅차오름과 간절함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일상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벗어나기 위한 탈주극이 여행은 마치 초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렘과 떨림의 감정을 여행에서 느낀다. 바다, 산, 음식, 잠자리, 거리, 간판 등의 모든 것이 새 포장지로 감싸져있다. 처음으로 돌아갔을 그 순간에 우리는 잠깐 본연의 '나'로 되돌아간다. 순수하게 내뱉는 '와.....'하는 탄성은 꾸며지지 않은 날 것의 내 마음이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은 덧없어 보이지만,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이 모두 다 붉은 핏방울이었다. 나도 핏방울로 글을 써왔고 세상 사람들 모두 핏방울을 흘리며 살고 있다. (p. 137)

 

 

 

우린 각자만의 방식으로 삶의 기록을 남긴다. 때론 남겨지는 것 자체가 내 눈에 보이는 것만큼 성에 차지 않지만 그래도 남겨두면 과거의 향수병을 그리움으로 치환할 수 있다. 삶과 여행은 그렇게 맞닿아있다. 그 둘의 줄다리기는 팽팽하게 맞선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야.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외치다가도 긴 시간이 지나면 그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지긋지긋한 톱니바퀴를 벗어나고 싶어진다.

우린 모두 핏방울을 흘리며 살고 있다. 피는 살아있기 위해서 필수적인 동력이다. 하지만 그 피가 수혈되지 못한 채 다 흘려버리면 우리는 숨을 쉴 수 없다. 여행은 그런 피를 수혈하기 위한 충천기라 생각한다. 떨어져 가는 내 혈액을 다시 채워 넣어줄 맑고 깨끗한 피. "떠나고 싶다"라 되뇐다면 아마 우린 추억의 피가 필요한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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