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아방(신혜원)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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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멋질 거예요.

p. 155



내게 미술은 잘하고 싶지만 두려운 과목이었다. 꼭 반마다 그림 잘 그리는 애들이 있었고, 그 애들은 몇 번의 스케치만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나는 옆에서 잘 그린 그림을 힐끔 보다가 애꿎은 연필만 만지작거리며 수업을 마쳤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던 나는 소규모 그림 수업을 들었다. 평가하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칭찬하는 선생님은 있었다. 여전히 칭찬은 '잘 그린 수강생'에게만 돌아갔다. 내겐 그저 미소만 짓던 선생님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 뒤로 미술을 잊고 살았다.



왜 빈 종이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까. 저자 아방은 미술 학원에 다니던 때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란색 돌멩이를 그리던 이상한 애는 연필만 사용해 그림 그리고 싶은 고3으로 자랐고, 획일적인 학원의 교육방식이 싫어 '그림을 배우지 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그림 수업에서 아방은 뭘 가르쳐주지 않는다. 기술보단 보람을 느끼도록, 비판보단 칭찬을 쏟아내며 수강생을 다독인다. 좋아하는 감정만큼은 쉽게 망가지지 않도록.





"네 그림이니까 나한테 물어보지 마세요"의 숨은 뜻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 눈치 보지 마세요!


아방을 찾아온 사람들은 오랜 시간 꾸준하게 그림을 그려 나간다. 취미생활답게 긴장을 풀고 이 시간만큼은 마냥 즐겁게 지낸다.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내는 창작 활동이다. 사회에서는 온전한 내 몫이 없어도 그림은 하면 하는 대로, 되면 되는대로 나만의 것이 생긴다. 오랜 시간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온 수강생들이 스케치북을 가득 채워 돌아갈 때면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도 뿌듯해진다.


​“하라고 해서 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재밌었어요. 느는 게 보였어요. 느는 게 아니라, 하여튼 뭐가 보였어요. 사람 그리는 걸 두려워했는데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예요.”


“내가 변하는 게 보여서 좋았어요. 처음보다 자신 있게, 또 빨리 그리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조금 더 단순하게 그려보고 싶어요.”


“별생각 없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 그리고 나니까 한 권이 전부 내가 좋아하는 맥주로 채워져 기분 좋아요. 이제 맥주는 다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p. 90


너는 재능이 없으니 그림 그리지 말라는 말로 상처받은 아기 새들에게 아방은 말한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림의 장점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수강생들은 보란 듯이 '반복이 주는 멋진 대가(p. 89)'를 실감한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고민하던 나는 사라지고 조금씩 자신감을 장착해간다. 그리는 재미를 알아버린 학생들이 실력도 쑥쑥 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긍정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약한 불씨로 살피는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작고 소중한 나의 능력치



빈 종이 앞에 두고 고민하기보다, 무턱대고 그리다 보면 손이 자연스레 답을 찾아줄 때가 있다. 매일 어떤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꽤 큰 변화가 생긴다. 그 재미를 알았으면 한다. 게다가 노트와 펜만 있으면 되니 돈도 얼마 안 든다. p. 91


우리에겐 작지만 소중한 능력치가 있다. 취미생활은 귀여운 능력치를 눈치 안 보고 재미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취미도 '본격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즐거워지려 하는 것인데 내 능력이 초라해서 발도 못 붙이는 이들이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란 말에 눈물을 흘린다.


바깥세상은 야수와 같다. 조그만 실수를 저질러도 나비효과처럼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사건이 왕왕 생겨 좀처럼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게다가 삶에는 지우개도 없어서 그냥 고쳐 쓰고 덧칠하며 사는 거다. 작은 지우개로 박박 때를 밀어봤자 어차피 뚜렷하게 지워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그림 세상은 다르다. 실수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에 안 들면 새 종이 펼치고 다시 그리면 된다. 인생에서 새 종이 꺼내려면 시간도 배로 들고 돈도 들 텐데 그에 비하면 종이 한 장은 얼마나 가벼운지. 처음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던 멤버들은 어느새 자기 지우개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p. 172


그림 세상에선 터무니없는 실수나 농담, 마음마저 내보여도 괜찮다. 그냥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잖아' 같은 기대감(p. 60)만 가지면 된다. '다음엔 어느 방향으로 연필이 움직일까?' 호기심을 붙잡고 한 번 믿어보는 거다.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한 번도 빠짐없이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고로 작품을 하려면 내 삶을 잘 알아야 한다. 삶의 방향이 작품의 방향이 되고 삶의 색깔이 작품의 색깔이 된다. p. 252



일단 그리고 보면 내 생각과 방향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수강생이 잊고 있던 삶의 즐거움을 깨닫고 돌아갔다. 삶을 채색하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나의 작품과 색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의 능력치를 그 누구보다 크게 인식하고 가꿔나간다.


다 읽고 나니 책장에 처박힌 새 스케치북이 생각났다. 더는 그림을 안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뒤, 존재를 잊고 살았는데 이젠 무엇이든 그려볼 용기가 났다. 글도 무엇이든 쓰면 되는 것처럼 그림도 무엇이든 그리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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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쓰는 날들 - 어느 에세이스트의 기록: 애정, 글, 시간, 힘을 쓰다
유수진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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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결에 맞는 ‘맞춤 자아’를 꺼낸다. 『나답게 쓰는 날들』은 쭈구리 같은 ‘초짜 자아’를 꺼내 읽었다. 항상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았던 ‘취준생 자아’와 고생 끝에 입사한 회사에서 별거 아닌 일로도 쉽게 상처받던 ‘신입 자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밖의 것들을 놓쳤던 그때가 떠올라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안도감에 흐른 눈물이다. 


저자 유수진은 말한다. “세상에는 꼭 풀어야만 하는 매듭만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꼬인 것을 꼬인 그대로 놔둘 줄도 알아야 한다고(p. 217).”


글을 쓸수록 내가 가진 것을 더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덜 짜증 내고, 더 다정하게 대하면서 나와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책을 읽으며 기다림을 채움으로 바꿨고, 내 글이 무단 도용당하는 일을 겪은 후에는 똥 밟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을 다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글 또한 막힘없이 써 내려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p. 8


책은 네 가지 유형의 ‘쓰는 자아’를 소개한다. 글을 쓰는(write) 자아, 애정을 쓰는(care) 자아, 시간을 쓰는(expend) 자아, 힘을 쓰는(exert) 자아에는 ‘처음’의 순간이 담겨있다. 허둥대며 출근하는 그녀가 딸 같아서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다 주던 남자부터, 부족한 나를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줬던 상사, 알아서 하라며 내 선택을 지지해 주던 엄마까지. 혼란해서 버겁던 처음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 모든 마감기한에 나를 질질 끌고서라도 함께 가준 사람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혼자 살아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인지를 깨달았고, 사람들이 내게 내밀어 준 그 손들이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는지도 새삼 더 크게 느꼈다. p. 44


나답게 살기 위해선 ‘모두의 노력’이 필요했다. 서로를 챙겼기에 수많은 인생의 마감을 놓치지 않고 살았다는 걸 깨닫는다. 돌아보니 잃은 것 없이 얻은 것만 가득했던 건, 배려로 가득 찬 관계 덕분이다.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관계 때문에 상대를 믿고 다음 챕터를 준비할 수 있었다.


사람의 일이 재미있는 이유는 '연결성'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연결될지 알 수 없기에 수많은 연결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p. 68)


읽는 내내 배우 김태리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종영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언젠가 한 번은 자신이 몰락할 거라 답변했다. 데뷔작 <아가씨>부터 출연한 모든 작품이 성공했지만, 지금의 성공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유연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해당 인터뷰를 읽으며 참 건강한 멘탈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도 다르지 않다. 사회의 모순에 유약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모두가 양면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착한 사람이 되기보다 정도와 빈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사람(p.145)이 되길 바란다. 우린 항상 단면과 함께한다는 걸, 매사 자각하고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괜찮은 인생을 만드는 사람은, 처음의 중요성을 알고 실패한 처음을 끊임없이 정리해 나간다. (p. 162)


비로소 나다워지는 삶은 시시콜콜한 것들에 불화(不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벌어진 일에는 분노보단 최선의 대응이 최고의 방법이다. 그녀는 쓸모를 골몰하며 기록을 남겼기에 어제보다 오늘 더 단단해지는 법을 배웠다. 쭉쭉 뻗은 길은 만들지 못해도 최소한 길을 잃는 법은 없었다.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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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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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이 더 쉽기에, 

자신을 다독여 가며 단련시키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일에서 공부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p. 9


나는 전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실무에서 전공 이론은 써먹을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배운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란 말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대학 생활이 의미 없진 않았다. 비록 학사학위는 실전 기술을 알려주진 않았지만 순수한 배움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으니까.


스물 초반의 패기는 어떤 학문이든 읽고 쓰고 경험하게 이끌었다. 10대가 '지어진 집을 잘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20대는 '헌 집을 리모델링 하는 시즌'이었다.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들


'왜 해외에 비해 국내 대학에서 공부한 이야기는 드물지?'란 고민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저자가 대학에서 배우고 성장한 에피소드를 소환했다. 그녀는 학년별로 인상 깊었던 교양수업의 강의노트를 펼쳐 대학의 고루한 이미지를 깨부순다. 맘껏 공부하기 위해 대학을 다닌 '공부 덕후'는 젊은 에너지로 겁 없이 덤벼들어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는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나는 무서운 속도로 대학을, 새로운 것들을 빨아들였다. 

p. 22

 

 

고고학을 전공한 그녀는 기억과 마음에도 층위(層位)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을 사귈 때마다 그 사람의 층위를 가늠해 보고, 어디까지 나를 내보일 것인지 결정한다. 서툴게 영어 원서로 고전문학을 읽고 번역서에 담기지 못한 언어의 깊은 울림을 체험한다. 첫인상이 별로였던 수업을 들으며 가치를 재평가하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들었던 법학 과목을 재수강해 편견을 깨부수기도 한다.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p. 117




-대학이 변화시킨 것


저자에게 대학은 내면의 성장뿐만 아니라 문해력, 이해력의 향상도 선물했다. 한자와 한글이 함께 쓰인 전공 책을 더듬더듬 독파하던 시간은 어떤 책이든 술술 읽는 힘을 길러주었다. 여러 책을 함께 독파하며 이론을 습득했던 덕분에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며 삶을 이해하는 힘이 생겼고 덕분에 현실에 좌절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식견(識見)이란 지식을 투입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추수 끝난 논에 남은 벼 그루터기 같은 흔적에서 돋아난다. 

p. 63

 

 

그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야 이해되는 게 많다. 빈출문제, 예상문제집, 보충강의가 없는 시스템에서 '진정한 자기 주도적 학습'을 실천했다. 저자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수업마다 강의노트를 만들어 하교 후 메모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어쩔 수 없이 수강신청이 망해 시간이 붕 떠버렸을 땐,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거나 카페에서 독서를 했다. 주말에는 대외활동에 참여했고 돌아오면 서평을 썼다.


교양 심리학과 전공인 아동학·사회복지학 덕분에 '내면의 어린아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현재의 문제점이 과거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고 매 순간 인지하려고 하는 건, 대학이 준 깨달음이다.


곽아람은 석박사 과정을 이어나가며 부족한 배움의 욕구를 채웠다. 무수한 리포트로 다진 필력은 기자로서 밑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배움의 발현은 배우는 당시가 아니라 배우고 난 뒤 불현듯 발휘되는 것 같다.




인간은 자주 착각하고, 착각을 진실로 믿어 가끔씩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착각에서 깨어나 슬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착각한다. 

착각할 수 있는 존재하는 것,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 229


지금은 손실을 따지는 어른이 되었지만 캠퍼스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도 배움을 즐기고 동경하며 살아간다. 여전히 좋은 강의가 있나 기웃거리고, 괜찮은 커리어를 닦기 위해 지금처럼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쓴다.


타고난 것을 바꿀 순 없지만, 이를 갱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공부 같다. 그녀가 말하는 공부의 위로란 배움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쓸모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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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잘 있습니다 - 엄지사진관이 기록한 일상의 순간들
엄지사진관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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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기 이전에 낯선 곳이었으므로 나는 자주 힘들었다. 

그래도 결국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이곳에서

조금 더 낯설게 행복해지기로 했다.

(p. 7)


나는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서울에 살던 기억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 연고도 없어 막연했던 타지 생활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타지인 제주에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엄지사진관은 제주를 안식처로만 그리지 않는다. 꿈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제주행은 전환점이 됐다. 도피처로 택한 제주에서 조각난 마음을 다잡고 사진가로서 인생 2막을 연다.


낯가림을 낯설음으로 돌파했던 부담감은 아름다운 필름 감성으로 덧칠되었다. 오늘을 잘 살고 내일도 잘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들이 사진과 함께 수록됐다. 이젠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이자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의 모습을 담아낸다.


사진과 나 사이의 지구력을 기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마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나의 시선으로 찍어내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화려하고 경이로운 순간을 기록하고, 내내 곱씹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사실 나는 필름 카메라 하나만 들고 골목길을 걸을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해진다. 매번 같은 지붕, 같은 골목길이라도 그 순간이 좋다. 온전한 순간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나에겐 어느 무엇보다 가치 있고 소중하다. 누군가는 지루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느린 리듬의 고요함이 값지다. 카메라에 일상을 담겠다는 생각이 쌓이고 쌓여 나의 지구력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며 아주 오래 걷고 싶다. (p. 131)


제주에서 엄지사진관에게 위로가 된 장소는 여행자의 낭만이 깃든 곳보다는 일상감이 묻어나는 장소다. 출퇴근을 반복하는 골목, 이름 모를 시골길, 비포장도로같이 이목을 잡아끌지 않아도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곳 말이다. 그 틈에서 활기를 느끼고 활력을 되찾는다. 공간을 향한 사람들의 애정이 그 공간으로 들어선 이방인에게 따스함이 되었다. (p.110)


그 모습을 보며 나의 제주를 떠올렸다. 나야말로 '여행지로서 제주'보다 '일상으로서 제주'가 더 익숙한 사람이니까. 별생각 없이 찾는 단골 카페, 힘들 때마다 찾아가는 함덕의 바다, 마음속 고향인 구좌와 어릴 적 기억이 선연한 남원의 풍경. 기억 속의 제주는 피드 속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진조차 찍지 않는 일상적인 곳들이다.


거창하게 무언가를 바라기보다 

하루하루 끼니를 챙기고,

평온하게 지낸 오늘이 잘 쌓이길 바랄 뿐.

그걸로 충분하다.

욕심내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을 마주한다. 

무슨 일이 생길까?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까?

아무것도 단정짓지 않기로 해. 

(p. 236)


그는 제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잘 지낸다. 어쩌다 이런 삶을 살 뿐인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려고 사진을 찍는다. 엄지사진관의 제주에는 사랑한다고 모든 걸 껴안을 수 없는 마음이 진솔하게 드러난다. 추억이 빛을 발할만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일, 상상 속 공간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 좋은 파동이 다시 카메라를 들게 한다. 카메라 속에 담긴 일상이 조금은 미화되어 문득 꺼내 봤을 때 뭉클해지도록.


이 섬에서 오늘도 빈틈없이 행복하길,

모든 시절이 호시절이길.(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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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숲으로 여행 간다 - 전국 자연휴양림.숲체원.국립공원 야영장 50
안윤정 지음, 서은석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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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겨울이 가고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 봄을 알리는 벚꽃이 하나둘씩 피어나고 만개한 꽃들 앞에서 환한 웃음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니 저절로 행복해진다. 계절을 체감하는 순간은 싱그러운 자연 앞이라는 건,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다. 변치 않는 생명은 숲에서 빛난다. 푸르게 우거진 녹음 속에서 나무가 내뱉은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며 지쳤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안윤정, 서은석은 전국의 수많은 숲을 찾아다니며 기록을 남겼다. 쉬는 날마다 떠났던 순간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자연휴양림부터 숲체원, 국립공원 야영장까지 ‘진짜’만 모은 숲 정보는 야영과 캠핑을 즐기는 이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1. 숲을 알아야 즐거움을 느낀다


책은 숲의 기본부터 시작한다.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곳’이란 뜻의 숲은 국가에 의해 관리된다. 마음대로 들어가고 여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익히 수련회 등으로 찾았던 숲들 모두 ‘공인된 숲’으로 허가를 받아 사람들에게 개방된 곳이다. 자연휴양림, 숲체원, 치유의 숲, 국립공원이 대표적인 ‘공인된 숲’이다. 때론 공인된 숲이라도 보호를 위해 잠시 문을 닫기도 한다. 그래서 숲 예약은 치열하다.

숲마다 입장 인원, 숙박 및 취사 여부가 각기 달라 정보를 잘 확인해야 한다. 저자들은 독자들이 궁금할 정보를 전부 정리해 알려준다. 고르고 골라 보여준 숲의 시설, 환경, 볼거리까지 경험의 곳간을 탈탈 털었다고 할 수 있다. 끝나지 않는 코로나와의 싸움, 복잡한 도시와 업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쉼의 이야기를 전한다. 테마를 정해 취향껏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2. 숲에서 정비하는 마음


숲속에는 '진정한 쉼'의 의미도 깃들어있다. 휴식을 찾아 숲으로 간 이들에게 온전히 쉬라고 일러준다. 시설 좋은 곳에서 마냥 노는 게 아니라 내 몸이 '제대로 쉬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휴식은 노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재정비하고 기운을 충전하는 것이다. 쉴 수 있을 때 푹 쉬고 쉴 수 없을 때도 짬을 내서 쉬자! 그 쉼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해당된다. 긴장,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머리를 비워야 온전한 휴식일 것이다. (p. 66)


숲에 나를 던진다. 나무에 몸을 맡긴다. 울창한 나무와 그 이파리가 그늘막이 되어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눈을 감는다. 천천히 고요한 시간이 찾아오고 새소리, 풀벌레의 미세한 속삭임이 조금씩 다가온다. 온전한 숲속, 잡념이 살짝 발을 들였다가 이내 하얀 무(無)가 자리 잡는다. (본문 중)



초록이 가득한 사진들을 보니 눈이 힐링한다. 두 저자가 들려주는 숲 소식에 여름이면 찾는 수목원이 생각났다. 에어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준 그늘 속에 있으면 금세 시원해진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디서 바람이 솔솔 불어 머리칼을 들썩인다. 이어폰을 빼고 귀를 기울이면 새소리와 나뭇잎의 찰랑거림, 동물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무해한 자연 속에서 고단한 하루가 지나간다.




'숲'이란 이름으로 불리면 좋겠다. 새소리에 잠들고 나무들 손짓, 몸짓 하나하나 느끼며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바쁘게 살다 보면 어느덧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주말마다 짬을 내서 하는 '숲' 생활. 캠핑도 여행도 그런 연습 중 하나가 아닐까? 나는 숲이 되고 숲은 내가 된다. (본문 중)


내 첫 숲은 언제일까. 학생 때 매달 올랐던 오름들, 자연휴양림, 소풍까지. 기억 속에 많은 숲이 살고 있다. 그때 그 기억을 더듬으며 책을 읽으면 나만의 숲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여행지는 울창한 숲이다. 옛 숲에 새 숲을 덧칠해 추억을 만들면 더없이 충만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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